227화. 킹메이커 (5)
고현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원인은 성윤아와 함께 온 남자 때문.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도 모자라, 병진공업에서 납품받고 싶으면 자료를 제출하라는 헛소리를 해댔다.
이때까지만 해도 웬 미친놈인가 싶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유수의 재벌가 자제들.
마음만 먹으면 중소기업 하나쯤은 쉽게 말려 죽일 수 있다.
대체 뭘 믿고 그딴 소리를 했나 했는데……
‘컨티뉴 캐피탈 한미루라고?’
근래 한국 재계에서 있었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꼽아보라 한다면 모두가 한정그룹 해체를 꼽을 것이다.
2004년 사모펀드 관련법이 만들어진 후 한국에도 사모펀드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외국계 사모펀드들도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0년이 넘은 세월이 흐른 지금,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모펀드들은 이제 재벌들의 강력한 경쟁자로 급부상했다.
실제 기업 인수전에서 재벌이 사모펀드에 밀려서 실패하는 일도 많아졌고, 일정 이상 지분을 매입해 경영 개선을 요구하는 행동주의 펀드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설마 사모펀드에 의해 재벌그룹의 경영권이 빼앗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한정물산 경영권을 장악한 KSGI와 엘리언트는 지주회사가 가진 계열사 주식을 전부 팔아치웠고, 이를 배당으로 돌려 투자금을 회수했다.
여전히 ‘한정’이라는 간판을 쓰는 계열사들은 남아있지만, 더 이상 ‘한정그룹’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경영을 못 해서 망한 그룹은 많아도 사모펀드에게 경영권을 빼앗긴 경우는 최초였다.
심지어 그냥 그런 그룹도 아닌 무려 10대 그룹이다.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거의 모든 그룹들이 경영권 점검에 나섰고, 전경련은 경영권 보호를 위한 법안을 마련해 달라며 대놓고 정치권에 요청했을 정도다.
삼자연합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한정그룹 경영권 공격을 주도한 것은 누가 뭐래도 컨티뉴 캐피탈.
그리고 마지막 순간 주총장에 주현진의 위임장을 들고 나타난 사람이 바로 한미루다.
때문에 재계 사람들은 한미루라는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재계 자제들이 모인 파티장에 나타난 것이다!
다들 한미루를 보며 수군거렸다.
“윤아랑은 무슨 관계지?”
“원래 DA증권에서 일했다고 하잖아.”
“아, 맞다. DA증권에서 양정욱 전무님 날리고 나갔지.”
“그러고 나서 컨티뉴 캐피탈에 들어간 건가?”
“그래 봐야 월급쟁이 아니야?”
“사모펀드면 월급만 받는 건 아닐 테니까.”
잘나가는 사모펀드의 경우 월급보다 성과급이 훨씬 크다.
컨티뉴 캐피탈은 한정물산 주식을 매입해 주철진 부회장을 경영에서 내쫓은 다음, KSGI에 주식을 전량 매각했다.
이때 거둔 수익만 2조가 넘는 걸로 알려졌다.
당시 한미루의 직함은 한국 대리인. 그러니 성공보수로 최소한 수백억을 챙겨갔을 것이다.
그 외에 컨티뉴 캐피탈이 벌인 다른 일들을 생각한다면, 1천억을 벌었어도 이상할 게 없다.
만약 본인의 재산을 따로 투자했다면, 그 액수는 몇 배로 늘어났을 테고.
그의 악행(?)은 이미 재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만큼, 파티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한미루와 그와 함께 온 성윤아에게 쏠렸다.
고현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 자리는 그녀의 생일파티고 그녀가 주인공이어야 했다. 그런데 분위기는 완전히 엉망이 됐고,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현지는 성윤아를 따로 불러서 따지듯 물었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내가 왜?”
“혹시 일부러 나한테 이러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저 사람이 컨티뉴 캐피탈 한미루라며? 왜 속였어?”
“속인 적 없는데.”
“병진공업 사장 아들이라고 했잖아.”
“그건 너가 미루 씨에게 부모님이 어떤 일하는지 물어봐서 그렇게 대답한 거잖아. 본인 직업이 궁금했으면 그걸 먼저 물어봤어야지.”
“…….”
그녀의 기준에서는 자식이 부모의 일을 물려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본인 직업을 굳이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 저 사람을 여기 데려온 건데?”
“미루 씨가 못 올 데라도 왔어?”
“다들 불편해하잖아.”
“글쎄. 내가 보기에는 너만 불편한 것 같은데.”
“뭐?”
성윤아는 고현지가 적반하장으로 화내는 모습을 보니 왠지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지. 미루 씨가 나서서 컨티뉴 캐피탈 다닌다고 밝힌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린 건 너 아니야?”
“…….”
맞는 말이다.
한미루는 분명히 분위기를 망칠까 우려된다며 말을 안 하려고 했으니까. 굳이 말하라고 한 건 그녀다.
할 말이 없어진 고현지는 우기듯 말했다.
“됐으니까 당장 저 사람 데리고 나가.”
“뭐라고?”
그러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아름이 한마디 했다.
“흐음, 괜찮겠어? 미루 씨, 우리 오빠랑 친한데. 요즘 사업도 같이 하고 있어서 자주 만나고.”
여기서 그녀가 말한 오빠란 다름 아닌 유재호 회장.
최근 유성전자는 컨티뉴 캐피탈이 보유한 스노우 크래시와 대규모 협업을 하는 것은 유명한 사실.
“그리고 그런 걸 떠나서, 파티에 온 사람을 쫓아내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안 그래, 현지야?”
고현지는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민아름의 말에 반박하지는 못했다.
‘이게 대체 뭐야?’
* * *
정체를 밝히고 나자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단지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 거리도 크게 느껴졌다.
왠지 사방에서 딜이 박히는 것 같다.
잠깐 고현지와 대화하고 돌아온 성윤아가 나에게 물었다.
“무슨 얘기 했어요?”
“별 얘기 아니에요. 그런데 미루 씨 괜찮아요? 불편하면 이만 돌아갈까요?”
난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은데, 다만 윤아 씨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게 걱정이죠.”
내로라하는 재벌이라 한들 나한테는 눈곱만큼의 위협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컨티뉴 캐피탈이 재벌들에게 위협이 된다.
마음 먹고 공격하면 어느 그룹이든 흔들어 놓을 수 있을 테니까.
이래서 사람은 돈이 많아야 하는 것이다.
성윤아는 고현지를 한번 보더니 말했다.
“아니요. 저 신경 쓰지 말고 미루 씨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요.”
한국 재벌들은 때로는 경쟁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관계다. 그래서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거고.
하지만 DA그룹은 금융그룹.
돈을 빌려주는 입장인 만큼, 다른 재벌그룹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별로 없다.
저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이려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한정그룹 일가와 친분이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난 경영권을 빼앗아 그룹을 해체시켰다.
당연히 좋게 보일 리는 없겠지.
저쪽에서 고현지가 장유선과 대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난 그 둘을 가리키며 성윤아에게 물었다.
“저 두 사람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그래요?”
“예.”
생각해 보니 두 사람은 훗날 결혼한다.
장유선은 대연차그룹 회장의 삼남. GL그룹이 자동차 전장과 배터리 사업을 같이 하는 만큼, 정략적으로도 꽤 좋은 결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장유선이 내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설마 한미루 씨를 이런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요즘 컨티뉴 캐피탈 명성이 자자하던데.“
난 겸손하게 말했다.
“저희가 좀 잘나가긴 하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 그래서 엄청 잘나가지만, 좀 잘나가는 정도로 줄여서 말했다.
대화가 시작되자 주위 사람들이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한정그룹 해체를 주도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요?”
“직접 주총장에 위임장을 들고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한마디로 내가 막타를 쳤다는 뜻.
이 자리에 있는 몇몇은 주총에 참석해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오해를 좀 풀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건 오해입니다.”
“뭐가 오해라는 겁니까?”
“한정그룹 해체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일이었으니까요.”
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설명을 해주었다.
“저희는 다만 경영을 개같이 하고 범죄를 저지른 경영자를 쫓아낸 다음, 회사 경영을 정상으로 되돌린 것뿐입니다.”
“…….”
다들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난 계속해서 말했다.
“외국에서는 경영을 제대로 못 한 경영자가 기업에서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총수 일가가 경영권에서 쫓겨나는 것을 무슨 역성혁명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더군요. 당연한 상식을 말씀드리자면 기업의 주인은 주주입니다. 경영자는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그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죠. 경영자에게 월급을 주는 것도 주주입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김상민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따지고 보면 그 주주들이 우리 덕에 먹고 사는 건 아니고?”
난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어디 가서 그런 무식한 소리하지 마시죠. 특별히 이번에는 못 들은 걸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는 발끈했다.
“뭐? 무식한 소리?”
“그럼 WST에 제보해드릴까요? 오엔그룹 회장 아들 김상민 씨는 주주들이 재벌 덕에 먹고 산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이 발언이 나가면 오엔그룹 주주들이 퍽이나 좋아하겠네요.”
“…….”
그러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기왕 말이 나온 된 김에 재벌가 자제들의 정신교육을 시켜주기로 했다.
“그냥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면 모를까, 재벌가에서 태어났으면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책임 의식? 설마 뭐 봉사활동이라도 하라는 건가?”
그렇게 말한 사람은 유원그룹 회장 백만수의 아들 백정태.
“봉사활동 좋네요. 얼마 전 보니까 아버님이신 백만수 회장님께서도 충북까지 내려가 꽃동네에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시고 계시던데.”
“뭐, 뭐?”
당연하게도 회장님께서 갑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서 봉사활동 하러 간 건 아니고, 회삿돈 30억 횡령했다가 기소돼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그리고 사회봉사명령 200시간을 받았기 때문이다.
30억을 해먹었음에도 고작 사회봉사 200시간이라니.
다른 나라에서 이랬으면 무조건 구속이겠지만, 대한민국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재벌 회장님을 고작 30억 때문에 구속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는 진규석이 나에게 물었다.
“혹시 재벌이 악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는 좋은 재벌과 나쁜 재벌이 있을 뿐이죠.”
“그럼 어떤 재벌이 좋은 재벌입니까?”
난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죽은 재벌이죠.”
“…….”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난 피식 웃었다.
“농담입니다.”
내가 이렇게 유머 감각이 넘치는 사람이다.
뉴스에서는 잊을 만하면 재벌들의 갑질이나 폭행 등의 뉴스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도덕성 문제일 뿐.
재벌의 진짜 문제는 그런 게 아니다.
“주주의 이익을 위하는 게 좋은 재벌입니다. 반대로 주주의 이익을 해치는 건 나쁜 재벌이죠. 그런데 한국에는 나쁜 재벌이 많습니다. 그런 경영자를 쫓아내고 기업의 경영을 정상화시킨 다음, 다수의 주주에게 이익을 돌리는 것이 바로 사모펀드의 역할입니다.”
분위기는 어느새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사방에서 나를 향한 강렬한 적개심이 느껴졌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말했다.
상대에게 사랑도 느끼게 하고 두려움도 느끼게 하는 게 좋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편이 낫다고.
500년도 전에 쓴 책이지만, 지금도 맞는 말이다.
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 중 누군가는 거대 그룹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작은 계열사라도 하나 맡아서 운영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명심하세요. 항상 주주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주주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한정그룹 꼴 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작품에서 묘사하는 인물과 지명, 단체, 그 밖의 일체의 명칭이나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이고,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