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킹메이커 (4)
고현지.
GL그룹 고본승 회장의 손녀이자, GL케미칼 고재익 사장의 막내딸.
재벌가에서 태어난 것도 모자라 모두가 선망할 만한 예쁜 외모까지 타고났다. 그야말로 금수저 두 개를 동시에 물고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에 두 오빠도 있는 만큼 경영권 문제에서도 한 발 떨어져 있다. 그러니 별다른 견제도 받지 않고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이제까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했을 테고,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 잘 보이려 했겠지.
이 파티장에 있는 사람들만 해도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기에 급급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GL그룹 회장이 아끼는 손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아니다.
나중에 GL그룹에 입사할 것도 아니고.
문제는 내가 아무리 관심 없다고 말해봐야 못 알아먹을 것 같다는 것.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내 진심을 그녀에게 전할 수 있지?
난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현지 씨에게 궁금한 게 좀 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고현지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요. 뭐가 궁금한데요?”
“윤아 씨 친구라고 들었는데, 혹시 윤아 씨가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나요?”
“……예?”
“아까 전부터 남자들이 계속 윤아 씨한테 말을 거는 것 같은데 신경이 좀 쓰여서요. 사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윤아 씨 같은 타입을 좋아하거든요.”
고현지는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어째서요?”
“매력적이잖아요. 예쁘기도 하고.”
“윤아가요?”
“예. 파티장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예쁘지 않나요?”
“더 예쁜 사람도 있지 않아요?”
“그래요? 찾아봐도 윤아 씨보다 더 예쁜 사람은 없는 것 같던데.”
“…….”
자기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본인 입으로 말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나저나 프라이드가 보통이 아니다.
어째서 고등학생 때 일로 아직까지 성윤아에게 삐쳐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게 그녀가 살면서 겪은 가장 큰 패배가 아니었을까?
고현지는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승리(?)하듯 웃으며 말했다.
“뭐,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거니까요.”
“예. 취향에 따라서는 현지 씨 같은 타입을 좋아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
여전히 웃고는 있는데, 입가가 살짝 떨렸다.
‘나한테 이런 남자는 니가 처음이야’ 같은 느낌은 눈곱만큼도 없고, 그냥 엄청 화난 것 같은 모습이다.
워낙 미인이다 보니 화내는 모습도 예쁘긴 하다.
“그래서 윤아 씨가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는지 아시나요?”
“하! 그걸 왜 저한테 묻죠?”
“친구잖아요.”
“몰라요. 직접 물어보든가.”
그녀는 몸을 획 돌려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뒷모습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어오는 듯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왠지 원한을 산 것 같지만…… 뭐, 상관없겠지.
* * *
그 뒤로도 파티는 이어졌다.
젊은 남녀들이 모여 있으니, 이런 자리는 보통 만남의 장이 되기 마련.
남자들은 적극적으로 여자들에게 말을 걸었고, 반대로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말을 거는 경우도 있었다.
재계 모임인 만큼 어차피 건너건너 다 아는 사이다. 다들 반갑게 인사하며 얘기를 주고 받았다.
안타깝게도 나를 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난 재계 사람이 아니니까.
혹시 나한테 말 걸어주는 여자는 없나?
말만 걸어주면 재미있게 해줄 수 있는데. 블랙우드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고, 사마라 회장을 어떻게 탈출시켰는지만 얘기해줘도 빵빵 터지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나에게 관심을 갖는 여자는 없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웬 남자가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성윤아를 보는 건 줄 알았는데, 나를 보는 게 맞았다.
그는 결심했는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설마 나한테 고백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 앞에서 선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저희 어디서 보지 않았나요?”
“그래요?”
“예. 중요한 자리에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나서요.”
이 사람이 날 어디서 봤을까?
설마 한정물산 주총장에 있었나?
난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전 오늘 처음 봅니다.”
“전 최경수라고 하는데,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 자리에서 이름을 말했다가는 괜히 딜이 박히는 수가 있다. 그렇다고 물어보는데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난 적당히 둘러댔다.
“전 에드몽 한이라고 합니다.”
“흠, 그렇군요.”
이 자리에 교포 출신이나 검은머리 외국인이 많아서 그런 건지 어쩐건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리며 다른 자리로 가자, 지켜보고 있던 성윤아가 물었다.
“에드몽 한은 뭐예요?”
“별로예요?”
“예. 그게 정말로 이름이에요?”
“아니요. 게임 아이디인데.”
“…….”
성윤아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너무하네.
나름 골드 티어까지 오른 아이디인데. 안 한 지 오래 되서 지금은 떨어졌겠지만.
“고마워요. 윤아 씨 덕분에 이런 곳도 다 와보네요.”
“오길 잘한 것 같아요?”
“예. 평소 재벌들은 어떻게 노는지 궁금했거든요.”
매우 좋은 경험이었다.
“그, 그럼 다음에 또 파티 있으면 같이 올래요?”
“저야 좋지만, 윤아 씨는 괜찮아요?”
괜히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하려고?
“그럼요.”
슬슬 갈까 생각하는데, 고현지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까 화난 게 다 풀렸는지 생글생글 웃는 표정이었다.
“여기 있었네요. 윤아 씨 친구분께 이분들을 소개해 드리려구요.”
“저한테요?”
“예. 알고 지내면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자 같이 온 사람들은 인사를 건넸다.
체격 좋고 잘생긴 남자가 말했다.
“장유선이라고 합니다. 대연위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대연차그룹 장희수 회장의 삼남이다.
“오엔철강의 김상민입니다.”
이쪽은 오엔그룹 회장의 차남.
그 외에도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그룹의 자제들이다.
그들은 나에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병진공업이라는 중소기업을 운영하신다면서요?”
“대기업 납품을 준비 중이라 들었는데.”
“찾아보니 나오지도 않던데, 어떤 회사인가요?”
난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나?”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말 안 해도 알 것 같다.
성윤아는 고현지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너 진짜…….”
고현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왜 그래? 난 도와주려는 건데.”
난 화내려는 성윤아를 제지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여기서 화를 내는 건 상대의 수작에 말려드는 거나 다름없다.
나를 망신 줄 생각인지 성윤아를 망신 줄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좋은 의도가 아님은 분명하다.
말이 안 통하는 상대라면, 그에 맞게 대응을 해줘야 한다.
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병진공업은 인천에 있는 공장 하나짜리 작은 회사입니다. 현재 공장 증설과 함께, 대기업 납품을 목표로 기술과 제품을 개발 중입니다.”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도 모여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내로라하는 재벌가의 자제들.
병진공업 정도 사이즈의 중소기업이 대기업이 직접 납품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떻게 보면 이 자리에서 무릎 꿇고 애걸복걸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굴하게 허리를 숙이며 부탁하는 모습 정도는 기대하고 있겠지.
난 그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병진공업의 제품을 납품받고 싶은 분이 계신다면, 어떤 제품을 얼마나 간절하게 필요로 하는지, 어떻게 기술 개발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등을 상세하게 작성해서 제출하시면, 병진공업과 거래할 만한 회사인지 철저한 심사를 거친 후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요즘 대기업들이 하청업체에게 갑질하는 일이 많습니다. 단가를 후려치거나, 기술을 탈취하거나 하는 쓰레기 같은 기업들도 있고. 아무리 병진공업의 납품을 받고 싶다고 해도 그런 기업은 자격이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
갑자기 조용해졌다.
왜 그러나 해서 봤더니, 다들 동작그만 상태였다.
몇몇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을 지었고, 몇몇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뒤를 보니 성윤아 역시 멍한 표정이고, 민아름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허리를 숙인 채 끅끅 소리를 냈다.
완전히 빵 터졌구나.
그 모습을 재밌게 구경하는데, 고현지가 따지듯 물었다.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 알고 지내면 도움이 될 거라면서요? 그래서 이분들께 도움을 드리는 중입니다. 원래 병진공업이 아무 대기업과 거래를 트지 않지만, 그래도 현지 씨 체면을 생각해서 여기 계신 분들께만 특별히 기회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쪽이 도움을 받아야지…….”
“제가요? 왜요?”
“그, 그건…….”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서로 납품해달라고 사정하면 좀 곤란한데. 이래서 아버지께서 병진공업한다는 걸 알리지 않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현지 씨가 소문을 내는 바람에 제 상황이 좀 난감해졌네요. 탈락하거나 자격이 안 된 분들께는 현지 씨가 잘 좀 얘기해주세요.”
“…….”
고현지는 ‘뭐 이런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다 있지?’라는 표정을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왠지 내가 이긴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난 그들에게 말했다.
“이 얘기는 이쯤 하죠. 병진공업은 아버지 회사지 제 회사는 아니니까요. 이런 자리에서까지 부모님 덕 볼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부모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가 뭐가 중요한가요? 본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가 중요하지.”
그러자 장유선이 쏘아 붙이듯 물었다.
“그럼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건 이 자리에서 밝히기가 좀 그런데.”
“어째서요?”
“괜히 좋은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으니까요. 원하신다면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군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하고 있나 보지?”
“그래봐야 중소기업 사장 아들 아니야?”
“어이가 없네.”
여기저기서 빈정거리는 말과 비웃음이 들렸다.
조금 전까지 그럭저럭 우호적이던 분위기가 적대적으로 변한 것 같다.
고현지가 말했다.
“괜찮으니 한번 말해보세요.”
난 그녀를 보며 물었다.
“정말 괜찮나요?”
“예.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 법이잖아요.”
이런 말은 꼭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더라.
어쨌거나 본인이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전 컨티뉴 캐피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다들 귀를 의심하는 듯했다. 그만큼 ‘컨티뉴 캐피탈’이라는 회사명이 지닌 임팩트가 컸다.
잠시 후, 고현지가 입을 열었다.
“커, 컨티뉴 캐피탈이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 회사가 맞습니다.”
재계 사람들이라면 우리 회사 이름을 모를 수가 없겠지.
주위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아까 나한테 말을 걸었던 최경수가 소리쳤다.
“맞다! 한미루! 그날 한정물산 주총장에서 봤었구나!”
그는 이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뭐? 한미루라고?”
“헉! 한미루?”
”설마 그 한미루?
“잠깐. 그러고 보니…….”
“맞아. 그날 주총장에서 봤던 것 같아.”
“한정물산 주총장에 위임장 들고 나타났던!”
“그놈이 왜 여기에?”
놀랍게도 내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순식간에 사위가 조용해졌고, 파티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태연하게 손에 든 샴페인을 마셨다.
왠지 오늘 밤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