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일상 (9)
엔터주 투자는 신중해야 한다.
업종 특성상 유형 자산은 거의 없고 무형 자산이 대부분이다. 이렇다 보니 가치 측정이 쉽지 않다.
만약 소속된 아티스트가 계약 기간 만료로 이적하거나 하면 기업가치가 한순간에 낮아질 가능성도 크다.
메이블 엔터야 김범석과 계약을 한 데다가 루나틴즈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인수했지만, 다른 회사들에 대해서는 10~30퍼센트 정도만 매수할 예정이다.
동호 선배가 말했다.
“생각해 보면 얘가 가수라서 다행이네. 연기자면 겸업이 불가능했을 거 아니야?”
“그렇겠죠.”
연기자는 촬영장에 매여 있어야 하지만, 가수는 노래만 녹음하면 음원으로 낼 수 있다. 음악프로그램 출연이나 콘서트 같은 건 그때그때 스케줄을 빼면 되니.
“범석이가 만들어 놓은 노래만 30곡이래. 그 외에 작사 작곡해놓은 게 수십 개는 더 있는 것 같고. 대체 이 많은 곡들을 언제 만들었지?”
집에 오면 뻗어서 자기 바쁜 나와는 다르게, 일하면서도 틈틈이 곡 작업을 했다고 한다.
아무리 천재면 뭐하나?
생산성이 받쳐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런데 김범석은 재능에 더해 미칠 듯한 생산력마저 지니고 있다.
한 곡 작사 작곡하는 데 길어야 하루, 짧으면 30분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든 노래 하나하나가 명곡이다.
만약 이 노래들을 동시에 발표하면 차트 줄 세우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동호 선배는 고개를 내저었다.
“난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못할 것 같은데.”
“안 돼요, 안 돼.”
내가 죽었다 깨어나 봐서 확실하게 아는데, 죽었다 깨어나도 없던 재능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이런 재능은 그냥 타고 나는 거다.
“설마 내 친구가 재능충이었을 줄이야.”
가수만 하기에는 펀드매니저로서의 재능이 아깝고, 펀드매니저만 하기에는 가수로서의 재능이 아깝다.
그러니 둘 다 하는 수밖에.
“혹시 나한테도 뭔가 숨겨진 재능 같은 게 있지 않을까?”
“그런 거 없으니 고민하지 마세요.”
“아니, 너무 그렇게 단정 짓지 말고…….”
대화를 하는 사이 김범석이 출근했다.
며칠 만에 한 출근인데, 그동안 녹음을 하느라 잔뜩 지친 것 같은 모습이다.
동호 선배는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물었다.
“기획사에 있는 동안 루나틴즈는 봤어? 애니 예뻐? 주영이 예뻐? 누가 제일 예뻐? 악수는 했어? 혹시 같이 밥 먹을 일 있으면 나도 좀 불러. 애들한테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해봐.”
“…….”
이 인간은 머릿속에 걸그룹 생각밖에 없나?
“음악 활동은 어때요? 잘되고 있어요?”
내 물음에 그는 살짝 잠긴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녹음하니 쉽지 않네요. 제가 부를 곡을 제외하면, 다른 곡들은 판매할 생각입니다.”
“곡 달라는 요청이 빗발친다면서요?”
김범석은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여기저기서 문의는 많이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누구한테 줄지는 생각해 놨어요?”
“예.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부탁드릴 게 좀 있어서요.”
“뭔가요?”
“지유한테 곡을 주고 싶은데, 아시는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
걔가 날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 * *
지유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응. 안녕. 오랜만이야.”
놀랍게도 기억하고 있었다.
트레이닝 바지에 후드가 달린 집업을 입고 런닝화를 신었다. 키는 160센티 정도. 그런데 얼굴이 워낙 작아서 비율이 좋아 보인다.
그녀의 이름은 지유.
아이돌 판이나 다름없는 한국 가요계에서 한창 뜨고 있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만 해도 그냥저냥 이름이 알려진 정도였는데, 지금은 전국민이 다 아는 스타다.
지금 시간은 자정이 지난 새벽.
장소는 첨당동의 한 카페.
아이돌 가수 출신 지혁이 차린 카페라고 한다. 24시간 운영하고 자리가 칸막이 형태로 되어 있다.
가격이 좀 비싸긴 한데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만큼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 모양이다.
“바쁠 텐데 이렇게 나와도 괜찮은 거야?”
지유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
“저보다는 선배님이 훨씬 바쁘지 않나요? 몇 번 타톡했는데 답장도 없고.”
난 변명하듯 말했다.
“아! 그동안 진짜 바빴어. 핸드폰 꺼져 있는 경우도 있었고.”
“언니한테 듣긴 했어요. 컨티뉴 캐피탈에서 일하신다구요.”
“응.”
“거기 엄청 유명한 곳이잖아요.”
“알아?”
“그럼요. 아! 이번에 우리 회사에도 투자한다고 들었어요.”
“응. 그럴 거야.”
“호, 혹시 저 때문인가요?”
“……응?”
지유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엔터 회사가 그렇게 많은데 굳이 우리 회사를 콕 집어서 투자하는 거 보면 저 때문인가 싶어서요.”
“거기뿐 아니라 엔터주 회사들 전반에 투자하는 중인데. 한 스무 곳 정도.”
“……예?”
얘들 자매는 착각이 특기인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유의 새하얀 얼굴이 실시간으로 새빨갛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지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러다가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돼 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살이 더 빠진 것 같은데.”
“그래요?”
“칭찬 아닌데.”
“힛, 그래도 기분 좋은데요.”
원래 마른 몸이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말랐다.
“설마 다이어트 중이야?”
“그런 건 아닌데 바빠서 밥을 잘 못 먹어서요.”
하긴, 이 시간까지 일할 정도니.
눈에도 피곤이 가득해 보였다.
“얼른 집에 가서 자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오면서 차에서 좀 잤어요.”
어린 나이에 정말 열심히 산다.
내가 이 나이 때는 뭐했더라? 당구장이랑 PC방이나 다녔던 것 같은데.
“그런데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지난주에 봤잖아.”
“예? 언제……?”
“경태랑 한별이 결혼식에서.”
“아, 맞다. 그날 결혼식에 오셨다고 들었어요. 죄송해요. 그날 뒤에 스케줄이 있어서 축가만 부르고 바로 떠났어요.”
“죄송은 무슨. 그런데 축가는 어쩌다 부르게 된 거야?”
“한별 선배님께 부탁받았거든요.”
“스케줄 빼기 힘들었을 텐데, 부탁 들어준 걸 보면 의리 있네.”
지유는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럼요. 아무리 바빠도 선배님들 결혼하는데 축하해드려야죠.”
기특하다.
“그새 드라마도 찍었던데.”
“혹시 봤어요?”
“응.”
다 보진 못하고 대충만 봤다.
1회차 때는 씨랩과 얽히는 바람에 크랭크인 전에 하차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정대로 촬영했다.
여주인공은 아니고 서브 여주로 나온다. 남자 주인공을 좋아하는 4차원끼 있는 대학생 역할이었던 것 같다.
이미지가 잘 어울려서인지 연기는 호평을 받았고, 드라마는 1회차 때보다 훨씬 더 크게 떴을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대박을 터트렸다.
덕분에 가수뿐 아니라 연기자로서의 입지도 굳혀가는 중이다.
이대로 성장하면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이 되지 않을까?
지유는 탄산수를 마시며 말했다.
“그럼 선배님은 회사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시는 거예요?”
“기업을 분석하고 투자하는 일을 주로 하지.”
경우에 따라서는 재벌그룹을 해체하거나, 랜섬웨어 사태를 해결하거나, 보석 중인 회장을 일본에서 탈출시키거나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얘기들은 별로 재미없으니 패스하고…… 얘가 재밌어할 만한 얘기가 뭐가 있을까?
마침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혹시 나이트라이트라는 게임 알아?”
“들어본 것 같아요.”
“앞으로는 게임 안에서 콘서트하는 것도 가능해질 거야.”
“정말요?”
“응. 가수와 똑같이 생긴 캐릭터가 콘서트를 열고, 게임 캐릭터들이 모여서 관람하는 거지. 게임인 만큼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도 가능해. 우주나 바닷속 같이 가상의 배경을 만들 수도 있고, 캐릭터가 하늘을 날거나 변신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일 수도 있지. 물론 공연인 만큼 노래는 실시간으로 부르지만.”
“우와!”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지유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엄청 재밌을 것 같아요. 게임 속에서 하는 콘서트라니. 저도 꼭 한번 해보고 싶어요. 상상하는 모든 걸 구현할 수 있는 거잖아요. 공간의 제약도 없으니 전세계 팬들이 한곳에 모일 수도 있구요.”
“그렇지.”
역시 똑똑하다.
참고로 동호 선배는 이 얘기 듣자마자 ‘가수를 직접 보는 것도 아니고 캐릭터를 보는 거면 누가 그런 거에 돈을 쓰겠냐’며 헛소리 취급했다.
……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애널리스트가 된 거지?
“오늘 보자고 한 건 할 얘기가 좀 있어서.”
“하, 할 얘기요? 저한테요?”
“응.”
왜 이렇게 놀래?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모습이 마치 새하얀 토끼 같다.
“어, 어떤 얘기인데요?”
“일 얘기인데.”
“아, 일 얘기…….”
왠지 실망한 것 같은 표정이다.
설마 또 뭔가 착각했나?
“김범석 알지?”
“알죠.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저 진짜 너무너무 팬이에요. 음원으로 나온 건 다 들어봤어요. 지금도 차로 이동할 때마다 듣고 있고,”
“어떤 노래가 좋아?”
“다 좋아요.”
“하나만 꼽자면?”
“음, 그럼 ‘이별 편지’죠.”
“나도 그 노래를 제일 좋아해.”
“이번에 올라온 기사도 봤어요. 메이블 엔터와 계약하셨다고. 그럼 신곡도 새로 내시는 거예요?”
“응.”
“혹시 나중에 콘서트도 하신대요? 저 보러 가고 싶은데.”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립서비스가 아닌 정말 팬인 모양이다. 하기야 음악 스타일이 좀 비슷하긴 하지.
어쨌거나 팬이라고 하면 말하기가 좀 편하다.
“잘됐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보자고 한 건데.”
“그것 때문이라니요?”
“그동안 써놓은 곡들이 좀 있는데, 그중 몇 개를 니가 불러줬으면 하나 봐.”
내가 이렇게 직원을 위해 발로 뛰고 있다. 이러니 근무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였는지 지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정말요?”
“응. 기획사 쪽으로 오퍼가 가긴 할 건데 그 전에 의사를 한번 물어보고 싶어서. 음알못인 내가 들어도 정말 좋은…….”
“저 할래요.”
“무슨 노래인지 듣지도 않고?”
“예. 무조건 할래요.”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다.
“어떤 노래인지는 안 궁금해?”
“궁금해요.”
“가이드 녹음해놨다고 하는데, 한번 들어볼래?”
“네네. 들어볼래요.”
난 스마트폰과 연결된 이어폰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한쪽을 귀에 꽂더니 반대쪽을 나에게 내밀었다.
“같이 들어요.”
굳이?
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노래를 틀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할 때 매번 듣던 목소리인데 이렇게 들으니 또 새롭다.
이런 사람이 가수를 안 하는 건 국가적 손실이다.
지유를 보니 눈을 감은 채 노래에 맞춰 살짝 머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
너무 가까이 있는 거 아닌가?
이어폰 선 길이가 짧아 어쩔 수 없다.
노래가 끝난 후, 지유는 눈을 떴다.
“한 번 더 들어봐도 돼요?”
“응.”
지유는 그 자리에서 몇 번을 반복해서 듣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따라 불렀다.
“마음에 들어?”
“너무 마음에 들어요. 딱 제 노래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제목은 ‘꿈을 찾는 소녀’다.
원래는 가영이라는 여자가수가 불렀다.
1회차 때도 들으면서 지유가 부르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지유에게 가게 될 줄이야.
“원한다면 피처링도 해주겠다는데.”
지유는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정말이죠? 나중에 아니라고 하면 저 진짜 엄청 실망할 거예요.”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해.”
“김범석 선배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연락처 알려줄 테니, 직접 말하는 건 어때요?”
“네. 그럴게요.”
지유는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어느새 눈도 반쯤 감겨있다.
“졸리지? 이만 일어나자.”
“저 괜찮은데.”
“나도 피곤해서 그래.”
전혀 안 피곤하지만, 더 있다가는 얘가 여기서 쓰러져서 잘까봐 걱정된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앞에는 매니저와 차가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아까 왜 계속 저 보며 웃었어요?”
“내가 그랬나?”
“예. 그랬어요.”
“그냥 기분이 좋았나 봐.”
나 때문에 미래가 잘된 사람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지유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다음에도 꼭 연락 주세요.”
“알았어. 조심히 들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