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일상 (7)
김범석.
매직캐슬, 고백, 이별 편지, 그때 그 소녀 등을 비롯해 주옥같은 명곡들을 다수 발표한 유명 가수다.
별다른 기교 없이 담담하게 말하는 듯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음색이 특징이다.
본인 말로는 정식으로 음악과 발성을 배운 게 아니라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런 것 치고는 저음부터 고음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작사, 작곡에도 뛰어나 본인이 부른 노래 외에도 주옥같은 명곡들을 만들어 다른 가수들에게 줬다.
특히 감각적인 작곡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TV나 예능 출연을 거의 하지 않은 만큼 대중적인 인지도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가 만든 노래를 안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매직캐슬의 경우 유성전자 CM송으로까지 쓰였으니까.
가사와 목소리 때문인지 여자에 비해 남자 팬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특히 ‘고백’의 경우에는 남자들이 하도 여자 앞에서 불러서 오죽하면 ‘여자들이 뽑은 남사친이 절대 노래방에서 부르지 말아줬으면 하는 노래’ 베스트3 안에 들었다.
한번은 초청을 받아 군대 위문열차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남자 가수가 나오면 쳐다도 안 본다는 군인들이 떼창을 부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그런 그에게 놀라운 반전이 하나 숨어있으니, 바로 본업이 금융인이라는 것.
가수가 연기나 예능을 잘하는 거야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쪽은 한 카테고리로 묶이니까.
하지만 펀드매니저는 좀 뜬금없긴 하다.
대학생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때는 기업 설명회 시즌.
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이 학교로 찾아와 남부증권에 대해 실컷 설명하다가, 집중력이 떨어질 때쯤 익숙한 노래를 몇 곡 부른다.
처음에는 ‘어! 저 펀드매니저가 왜 저렇게 모창을 잘하지?’라고 생각하던 학생들은 이내 진짜 가수라는 것을 깨닫고 함성을 내지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융인으로서의 능력은 어땠을까?
사람이 두 가지를 하다 보면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인데, 김범석은 본업에서도 엄청난 성과를 냈다.
1회차 때 남부증권에서 투자전략 본부장 자리까지 올랐고 ‘더 뮤지션 펀드’를 출시해 직접 운영을 맡았다.
철저한 기업분석을 통해 저평가된 기업들을 사들였고, 자신이 잘 아는 엔터 쪽 주식들을 적극적으로 담아 대박을 터트렸다.
이런 걸 보면 세상에는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분야에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물론 나는 전혀 아니기 때문에 그냥 하던 투자나 열심히 하기로 했다.
김범석은 나에게 물었다.
“정말 가수 활동을 병행해도 될까요?”
“그럼요.”
“그래도 일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을 텐데.”
“회사에서 최대한 배려해드리겠습니다.”
1회차 때 김범석은 가수로서 어느 정도 성공하고 소속사도 생긴 다음 3년 뒤쯤에나 남부증권에 입사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로 인해 그 전에 컨티뉴 캐피탈에 입사했다.
현재 컨티뉴 캐피탈은 큰 성공을 거두고 있고, 그 역시 일에 재미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쪽으로든 마음을 쉽게 정하지 못하는 듯했다.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나와는 달리, 동호 선배는 부정적이었다.
“딴 데 한눈팔지 말고 그냥 회사 일이나 열심히 하자. 리카르도 센세의 비교우위론에 따르면 말이야…….”
“거, 다 아는 얘기 좀 하지 마세요.”
중학교 교과서에서 나올 법한 이론을 왜 꺼내는 거야? 물론 대학에서 더 자세히 가르치긴 한다.
내용은 대충 한 사람(또는 기업이나 국가)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으니, 제일 잘하는 일을 하자는 거다.
김범석의 경우로 보면 투자와 음악을 둘 다 잘해도 투자 쪽이 더 효율이 좋으니 이쪽에 집중하자는 것.
틀린 말은 아니다.
그만큼 컨티뉴 캐피탈이 잘 나가고 있으니까.
당장 김범석이 받는 돈만 해도 연봉은 1억이 안 되지만, 성과급은 그 10배가 넘는다.
앞으로는 훨씬 잘 벌게 될 테고.
돈만 생각한다면 굳이 가수 활동을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살아야죠.”
난 진세연과 지유를 떠올렸다.
둘 다 나로 인해 미래가 좋은 쪽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김범석은 어떻게 될까?
어쩌면 나로 인해 가수로서의 꿈을 접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음악을 좋아하긴 하는데, 제가 과연 잘할 수 있을지…….”
난 단호하게 말했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한 법입니다.”
동호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미루 말 들어. 폼은 일시적이라잖아.”
“…….”
보통은 뒤에 나온 말에 좀 더 비중을 두지 않나?
김범석의 표정을 보니 대충 절교할까 고민 중인 듯했다. 나였으면 진작 손절했다.
난 계속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저런 걸그룹 노래만 듣는 음알못 따위의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음알못이라니! 니들이 걸그룹의 매력을 알아?”
단지 꿈만 컸다면 나도 말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뛰어난 실력과 빛나는 재능이 있다. 이런 재능을 나 때문에 피우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내가 그의 노래를 듣고 싶다.
결국 고민 끝에 김범석은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한번 해보겠습니다. 누구 때문에 오기가 생겨서라도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그 누구가 누군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알 것 같다.
그러자 동호 선배는 갑자기 태도를 싹 바꿨다.
”훗, 그런 결심이라면 더 이상 말릴 수 없겠군. 테스트를 통과한 걸 축하한다.”
“뭔 헛소리야?”
“내가 반대한 건 너에게 추진력을 주기 위함이었다는 거지.”
“너 때문에 추진력이 상실될 뻔했는데?”
동호 선배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 근데 너 가수 되면 혹시 걸그룹도 만날 수 있어?”
난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만나면 뭐하게요?”
“글쎄.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아! 같이 코노를 가는 건 어떨까? 난 눈 감고도 누가 어느 파트 불렀는지 다 맞출 수 있는데.”
“…….”
코노 같은 소리하고 있네.
표정을 보니 마음은 벌써 최애 걸그룹과 코노에 가있는 듯했다.
어쨌거나 가수 활동을 하기로 결심했으니 이제 중요한 건 기획사 선택.
요즘 기획사들은 체계적인 훈련과 지원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이름 들으면 알 만한 대형 기획사나 중견 기획사 얘기. 아직도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기획사들이 넘쳐난다.
우리는 다 같이 연락 온 기획사들을 살펴보았다.
동호 선배는 깜짝 놀랐다.
“어! 뭐야? 에스오티랑 디와이에서도 연락 왔네. 여기 3대 기획사잖아. 너 이 정도였어?”
“그래, 이 자식아.”
김범석은 이미 만들어놓은 곡도 많은 데다가 가수로서뿐 아니라 작사, 작곡, 편곡에도 능하다.
보통 아이돌 그룹 하나 런칭하는 데까지만 해도 수십억씩 들어가는 반면, 그는 바로 전력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그러니 서로 데려가려 하는 거겠지.
그중 눈에 띄는 곳이 하나 있었다.
“메이블 엔터테인먼트?”
“오! 여기 루나틴즈 소속사잖아.”
“알아요?”
“그럼. 1집 컨셉이 애매해서 못 뜨긴 했는데 그래도 노래는 좋아.”
매달 아이돌 그룹이 수십 팀씩 쏟아져 나오는 판에 그걸 다 외우는 것도 힘들다.
그러나 루나틴즈는 걸그룹에 별로 관심 없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몇 년 안 돼 빌보드 차트 순위에 오르고 미국과 유럽에서 공연하는 글로벌 걸그룹으로 성장하니까.
그야말로 K-POP의 위상을 전세계에 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었다. 초기에는 온갖 고생을 다 했다고 한다.
회사 역시 몇 차례 큰 어려움을 겪으며, 대충 이 시기쯤 중국 자본의 투자를 받았던 것 같다.
나중에 상장하며 엄청난 대박을 터트렸지.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이 회사를 인수하는 건 어떨까요?”
동호 선배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야? 얘 가수시키겠다고 엔터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김범석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아,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무슨 말이에요? 직원이 가수한다는데 회사가 팍팍 밀어드려야죠. 전혀 부담 갖지 마세요.”
“…….”
부담으로 사망할 것 같다는 표정이다.
“꼭 그런 것 때문은 아니고 한국지사도 따로 투자해야 할 거 아니에요? 언제까지 본사 서포트만 할 거예요?”
“흠, 우리도 기업을 인수해서 키우자는 거야?”
“그렇죠.”
대부분의 사모펀드는 저평가된 기업과 건물을 사들여서 건실하게 키운 다음 높은 가격에 매각하는 걸 목표로 한다.
한국 역시 이제 사모펀드가 대중화됐다.
리디야 커피, 흥부네 부대찌개, 킹버거 등등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프랜차이즈는 물론이고, 도심 중심에 솟은 마천루들도 알고 보면 사모펀드 소유다.
좀 공격적인 곳들은 스타트업에 투자하기도 하고.
그야말로 사모펀드 전성시대랄까?
“분석해서 투자계획 세워 봐요.”
“내가?”
“그럼 누가 해요? 내 회사다 생각하고 열심히 해봐요.”
“흐음,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건가?”
“그렇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한국지사는 나중에 동호 선배에게 넘겨줄 생각이다.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이 정도 못 해줄까?
어차피 컨티뉴 캐피탈 전체에서 한국지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니, 떼줘도 별 상관없기도 하고.
얼마나 챙겨갈 수 있을지는 본인의 능력에 달려있다.
* * *
메이블 엔터테인먼트.
3대 기획사 중 한 곳인 에스오티 엔터에 있던 홍서진이 나와서 차린 회사다.
그는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먹히는 걸그룹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다국적으로 구성된 4인조 걸그룹 루나틴즈를 만들었다.
데뷔를 했을 때 그는 생각했다.
‘우리 애들은 무조건 뜬다!’
안 떴다.
1집은 예상 밖의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데뷔할 때 뜨지 못한 그룹이 나중에 뜰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루나틴즈의 가능성을 믿었다.
지금은 잠깐 때가 안 맞을 뿐.
‘우리 애들이라면 분명히 뜬다!’
문제는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다.
이미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데다가 지인들 돈까지 싹 끌어다 썼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이대로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다행히 투자제안이 들어왔다.
하지만 중국 투자사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회사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있는 만큼 거의 후려치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 조건이라도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실장이 말했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누군데?”
“김범석이라고 합니다.”
“……응?”
최근 에이튜브에서 유명해진 가수다.
찾아보니 명곡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체 이제까지 왜 안 떴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워낙 유명해진 데다가 따로 돈을 들여 제작을 거칠 필요 없이 바로 데뷔가 가능한 만큼, 노리고 있는 기획사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메일을 보내놓고도 거의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회사로 찾아올 줄이야!
홍서진은 바로 김범석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김범석입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장을 입은 반듯한 청년이다.
외모만 봐서는 가수가 아니라 회사원 같은 느낌이다.
“이쪽은 제 친구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동호입니다.”
혼자 온 게 아니라 친구와 함께였다. 친구는 기획사의 모습이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루나틴즈 안에 있나요?”
“지금은 숙소에 있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이다.
“일단 앉아서 얘기 나누시죠. 해웅 씨, 차 좀 준비해줘.”
세 사람은 미팅실에 앉았다.
홍서진은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노래 잘 들었습니다. 요즘도 계속 음악 활동을 하고 계신 건가요?”
김범석이 말했다.
“지금은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실례지만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여기서 일하고 있습니다.”
김범석은 정중하게 명함을 내밀었다.
홍서진은 명함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컨티뉴 캐피탈이면…… 설마 여기가 거기는 아니죠?”
“거기라니요?”
“얼마 전 한정그룹 해체한 곳이요.”
“거기 맞습니다.”
“……예?”
홍서진은 입을 쩍 벌렸다.
‘아니, 뭔 발라드 가수가 사모펀드에서 일해?’
게다가 그냥 사모펀드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컨티뉴 캐피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