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성공 투자법-217화 (212/529)

217화. 일상 (4)

홍경석 주위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동호 선배 옆에서 보험 영업을 하고 있던 혁수 선배도 어느새 그쪽으로 가 있었다.

나와 동호 선배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새 직원 뽑았어요?”

동호 선배는 당황했다.

“응? 니가 뽑은 거 아니야?”

“그럴 리가요.”

“아무도 안 뽑았으면 쟨 어떻게 입사했는데?”

“…….”

설마 본사에서 뽑았나?

나도 모르는 우리 회사 직원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투자은행도 아닌 사모펀드 이름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컨티뉴 캐피탈은 이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금융계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사고에 컨티뉴 캐피탈과 관련이 있었으니까.

오죽하면 월가에서 ‘무슨 사건이 생겼을 때 누가 했는지 모른다면, 제일 먼저 컨티뉴 캐피탈을 의심해보라’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박승훈이 물었다.

“컨티뉴 캐피탈에는 어떻게 들어간 거야?”

“나 졸업한 뒤 영국계 헤지펀드에서 잠깐 일했잖아. 그때 오퍼가 들어왔어. 당시만 해도 컨티뉴 캐피탈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을 때였는데, 록허트 대표의 비전을 보고 함께하기로 했지.”

“우와! 그럼 데이비드 록허트도 만나본 거야?”

“당연하지. 우리 회사 대표님인데.”

“혹시 명함 있어?”

“나도 한 장만.”

홍경석은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명함을 나눠주었다.

어쩌다 보니 나도 받았다.

고급스런 재질의 명함에는 ‘Continue Capital’이라는 회사명이 영어로 크게 박혀 있었다. 이름도 영어다.

윌리엄 홍(William Hong).

직함은 무려 VP(Vice President).

해석하면 부사장이지만, 사모펀드나 투자은행에서 VP는 과장이나 팀장급 정도로 보면 된다.

관리하는 고객들 중 높으신 분들이 많다 보니 급을 맞추기 위해 직함이라도 좋게 만드는 것이다.

규모가 큰 글로벌 투자은행에 가보면 VP만 수천 명씩 있기도 하다.

홍경석은 거만하게 말했다.

“지금 하는 일은 글로벌 M&A 전략팀장이야. 이번에 컨티뉴 캐피탈이 LD스튜디오 공격했던 거 알지? 그거 내가 록허트 대표님께 정보 드린 거야.”

“뭐? 진짜?”

“그럼. 미국 사모펀드가 한국 게임사가 확률 조작한다는 걸 어떻게 파악했겠어? 다 내가 올린 사내 리포트 보고 확인한 거지.”

“니가 리포트를 썼다고?”

“나 원래 예전부터 브라더후드 했었잖아. 랜덤박스 뽑는데 확률이 좀 이상하더라고. 그때 딱 조작이라는 느낌이 와서 바로 리포트 써서 회사에 올렸지. 이거 조작인 것 같으니 한번 알아보자고.”

“허억! 대박.”

그것뿐 아니라 이미 언론에 알려진 사건들에 자신의 활약을 적절하게 끼워 넣었다.

홍경석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한정그룹 사태 때도 현장에 있었고, 블랙우드 사태 때도 현장에 있었다.

“그때는 정말 심각했지. 그 난리를 쳐놨는데 해결 못 했으면 SEC 조사받고 주가조작으로 잡혀갔어도 할 말 없었을걸. 다들 대표님이 미친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딱 해결하는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어졌지. 그때 록허트 대표님 표정을 니들이 봤었어야 했는데.”

“오오!”

애들은 궁금하다는 듯 이것저것 물었고, 홍경석은 정말로 본인이 그 일들을 겪었던 것처럼 술술 대답했다.

혁수 선배가 물었다.

“이번에 사마라 회장을 일본에서 탈출시킨 게 컨티뉴 캐피탈이라는 얘기가 있던데, 진짜야?”

홍경석은 손을 내저었다.

“에이, 그거 다 언론이 만들어낸 루머죠.”

“루머긴. 컨티뉴 캐피탈은 유성전자와 손잡고 있고, 키오노스 공매도도 했다며?”

“아니라니까요.”

정말로 부인한다기보다는 ‘알고는 있지만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다’라는 뉘앙스다. 그런 행동은 오히려 아는 척하는 것보다 더 큰 신뢰감을 심어주었다.

동호 선배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와! 진짜 컨티뉴 캐피탈 다니는 줄. 쟤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겠는데.”

“으음…….”

저런 인재가 여기 있었을 줄이야.

홍경석은 내가 한 일들을 마치 자신이 한 일처럼 열심히 떠들었다. 마치 한 편의 금융 활극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내가 했던 일들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으니 좀 색다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저게 다 뻥이라는 거.

동호 선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주 그냥 입만 열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쏟아져 나오네.”

그렇다면 쟤는 왜 컨티뉴 캐피탈에 다닌다는 뻥을 치는 걸까?

좋은 회사 다닌다고 동기랑 선후배들 앞에서 잘난 척하고 싶어서?

그게 아니라면…….

“혹시 컨티뉴 캐피탈은 투자 안 받아?”

“펀드 모집하면 난리날 텐데.”

“외부 투자는 안 받는다고 하던데, 투자할 방법 없어?”

시원하게 맥주를 마신 홍경석은 슬쩍 말을 꺼냈다.

“사실 지금 VIP들 대상으로 블라인드 펀드를 모집 중이에요.”

“블라인드 펀드? 어디에 투자하는데?”

“그걸 말해주면 블라인드 펀드가 아니죠.”

일반적인 펀드는 투자 대상과 모집 금액을 정해놓고 투자 자금을 모은다.

채권, 주식, 부동산 중 어디에 투자하는지, 주식이라면 어느 증시, 어느 종목에 투자하는지 등등.

하지만 블라인드 펀드는 먼저 투자 자금부터 모은 다음 이후 투자 대상을 정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보통 두 가지.

첫째는 일단 돈부터 준비해놓고 좋은 매물이 나오면 바로 사기 위함이고, 둘째는 투자 전략을 숨기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적대적 M&A를 목표로 하는데 ‘A기업 주식을 사기 위해 펀드를 만들었습니다’라고 공표한다면, 시장 참여자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게 된다. 사기도 전에 주가가 폭등하면 전략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부터 모으는 것이다.

오로지 운영사의 실력만 믿고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웬만큼 명성이 있는 곳이 아니고서는 블라인드 펀드를 출시하지 못한다.

“그래도 아는 내용이 있을 거 아니야?”

“좀 말해줘.”

“아시다시피 이번에 사우디 왕세자가 바뀌면서 수소 에너지가 각광받고 있잖아요. 화안그룹과 손잡고 한국에 투자하려고 한다는 것 정도만 말씀드릴게요. 그 이상은 알려드릴 수 없어요.”

“오! 수소…….”

“요즘 그쪽 엄청 뜨고 있잖아.”

이쯤 되면 사기를 치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정작 홍경석은 아직까지 투자하라는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먼저 몸이 달아 얘기를 꺼냈다.

“블라인드 펀드에 혹시 돈 넣을 수 있어?”

“소액투자도 가능할까?”

홍경석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 구좌가 100만 달러부터 시작이에요. 그 이하는 아예 받지도 않습니다.”

“아…….”

취업한 지 몇 년 안 된 직장인들이 그 정도 금액이 있을 리 없다.

다들 실망하는 표정을 짓는 가운데 홍경석이 한마디 덧붙였다.

“뭐,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뭔데?”

“기존 구좌에 금액을 합치는 거죠. 그 정도는 제 선에서 할 수 있으니까.”

한마디로 100만 달러가 들어있는 구좌에 1만 달러나 10만 달러를 더하겠다는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다.

“그래도 3천 이하는 안 돼요. 그보다 소액은 관리하기가 힘드니까.”

3천 정도라면 웬만한 직장인들은 대출로 마련이 가능한 금액이다. 하한선을 정해 아무에게나 투자받지 않는다고 하자 신뢰도는 더욱 올라갔다.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퉈서 말했다.

“나 3천 정도는 있는데.”

“대출 받으면 5천은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나도.”

다들 투자 못 해서 안달난 모습이다.

하기야 무려 컨티뉴 캐피탈이다.

당장 나만 해도 ‘좀 투자해야 하는 거 아닐까?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동호 선배는 혀를 내둘렀다.

“머리 잘 썼는데.”

“그러게요.”

처음부터 개인 계좌로 돈을 입금받겠다고 했으면 다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그럴듯한 이유를 깔아놓으면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내 말 맞지? 이런 자리 오면 보험설계사와 사기꾼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이 선배도 회귀했나?

동호 선배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나타나 있었다.

“말했잖아. 내가 동창회 프로필참러라고.”

“…….”

반복된 경험으로 인한 지식의 습득이라는 건가?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는데 왜 난 기억이 안 나는 거지?

생각해 보니 결혼식만 참석하고, 그 뒤에 뒤풀이 자리는 빠졌던 것 같다. 아마 그날 뭔 약속이 있거나 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 나라에는 사기꾼들이 왜 이렇게 많냐?”

이제 기억났다.

홍경석.

한국대가 낳은 최악의 사기꾼.

1회차 때는 뭔 회사를 차려서 다단계를 했었다. 당시 사기 친 금액만 해도 30억 원이 넘어 뉴스에 날 정도였다.

내가 이걸 바로 떠올리지 못한 이유는 프리머스 사태로 인해 이 사건이 적당히 묻혔기 때문.

당시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동기 중 한 명이 사기 친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다.

맞아. 그게 바로 홍경석 이놈이었다.

설마 이번에는 컨티뉴 캐피탈을 팔아 사기를 칠 줄이야.

얘기를 들어보니 친분이 있던 사람들은 이미 거액을 투자한 듯하다.

심지어는 그중에는 학생들뿐 교수도 몇 명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대는 한국 최고의 명문대.

이곳의 재학생들과 교수들이 저런 거에 속는 게 말이 되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똑똑한 사람들이 금융사기를 당하는 일은 의외로 빈번하게 일어난다.

역사상 최대 폰지 사기라는 버나드 메이도프 사건만 해도 글로벌 금융사들과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할리우드의 유명인사들이 피해를 입었다.

테라피스에 투자했던 사람 중에는 미 행정부 국무장관을 지닌 크리스 에드워드도 포함돼 있고, 토머스 모터스에 투자했던 사람 중에는 하버드대, 칼텍 출신 엔지니어들도 많았다.

한국만 해도 프리머스 펀드에 투자했던 지식인들이 어디 한둘인가?

여하튼 동기들 상대로 컨티뉴 캐피탈 이름 팔아 사기치고 있는 걸 가만히 놔둘 수는 없는 노릇.

저 새끼를 어떻게 조지는 게 좋을까?

머릿속으로 잠시 궁리하는데 누군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다름 아닌 진세연이다.

그녀는 내 맞은편에 앉더니 말했다.

“너 DA증권에서 잘렸다며?”

“정확히는 잘린 건 아니고 그만둔 거지.”

진세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혹시 나 때문에 그런 거야?”

“뭐가?”

“프리머스 사태 터트린 거 말이야.”

“……응?”

이건 또 뭔 소리야?

“아니, 너랑은 전혀 상관없었어.”

내 말에 진세연은 피식 웃었다.

“아니긴. 다 알아, 미루야.”

“…….”

알긴 뭘 알아?

대체 얘는 뭔 오해를 하고 있는 거야?

술을 몇 잔 했는지 진세연은 혼자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팔로 턱을 괸 채 고개를 45도쯤으로 꺾어 새하얀 목덜미를 드러냈다.

분위기가 묘하다는 걸 느꼈는지 옆에 있던 동호 선배는 슬쩍 일어났다.

“내 라이프플래너 혁수야. 아까 상해보험 보장 범위가 어디까지라고 했지? 나 죽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0억 주는 거 맞지? 내 라이프플래너였던 니가 우리 가족의 라이프플래너가 되어준다고 약속할 수 있지?”

“…….”

다칠 일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라이프플래너를 애타게 찾아?

방해꾼(?)이 사라지고 나자 진세연은 내 쪽으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 오니까 예전 생각나네.”

“무슨 생각?”

“여기서 신입생 환영회 했었잖아.”

“음, 그랬었지.”

원래 얘랑 나는 중학교 동창이다. 그러다가 대학에 와서 재회한 거고.

“미루 너한테 할 말 있는데.”

“무슨 말?”

“나 말이야…….”

그 순간, 또 다른 방해꾼이 나타났다.

홍경석은 동호 선배가 앉았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둘이 무슨 얘기하고 있어?”

그러자 진세연은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지 홍경석은 치근덕거리듯 말했다.

“세연이 넌 투자에 관심 없어?”

“응. 이제 그런 건 별로.”

프리머스 펀드에 한번 델 뻔해서 그런가?

관심을 보이는 다른 애들과는 달리 진세연은 정말로 관심 없어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홍경석은 계속 치근덕거렸다.

“알다시피 우리 컨티뉴 캐피탈이 원래 외부 투자 잘 안 받아. 이번 아니면 다시는 투자 기회가 없을걸.”

이게 무슨 매진까지 1분 남은 홈쇼핑 특가상품도 아니고, 기회가 없긴 뭐가 없어?

난 홍경석을 보며 물었다.

“니가 컨티뉴 캐피탈에 다닌다고?”

내 물음에 녀석은 당당하게 말했다.

“왜? 너도 관심 있어?”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주 관심 많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