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일상 (3)
난 오랜만에 한국지사로 출근했다.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는 현재 개점 휴업 상태였다. 김범석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음악 활동을 위해 잠시 휴가를 떠났다.
동호 선배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말했다.
“돌아오니 조용하네. 월스트리트에서 버거 형들과 일할 땐 시끌벅적했는데.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
“벌써 보고 싶어요?”
“그 사람들이 벌써 날 보고 싶을까봐 걱정이지.”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시네요.”
“버거 형들 생각하니 오코너 버거 먹고 싶다. 요즘 실리콘밸리에서 그렇게 핫하다던데.”
너무 심심한 나머지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오코너 버거는 나도 먹고 싶다.
“아! 너 청첩장 받았지? 하경태랑 최한별 결혼한다고 연락 왔던데.”
“받았어요.”
난 일전에 모임에서 만났던 동기 커플을 떠올렸다.
“걔들 원래 사이 안 좋지 않았어? 자주 싸웠던 것 같은데.”
“싸우다가 정들었나 보죠.”
1회차 때도 대충 이때쯤 결혼했던 것 같다.
“근데 뭐 이렇게 빨리 결혼해?”
“뻔하잖아요.”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이유?”
“그 이유가 맞을걸요.”
동호 선배는 나를 보며 물었다.
“너 결혼식 갈 거지?”
“동기 결혼식이니 가야죠.”
“그럼 같이 가면 되겠네.”
“그래요.”
동호 선배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랜만에 학과 선후배들 한자리에 다 모이겠네. 이런 자리에 가면 반드시 두 종류의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지.”
“뭔데요?”
내 물음에 동호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펼쳐들었다.
“하나는 보험 파는 애.”
그럴듯하다.
“다른 하나는요?”
“사기 치는 애.”
“에이, 설마요.”
“진짜야. 내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동창회라는 동창회는 다 가보고 내린 결론이야.”
“그걸 왜 다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경험자의 말이라고 하니 왠지 신뢰가 가네요.”
동호 선배는 자신 있게 말했다.
“너 봐라. 내 말 맞다는 거 알게 될 테니까.”
* * *
추운 겨울이 가고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계절.
하경태와 최한별의 결혼식이 열렸다.
난 동호 선배와 함께 예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축의금은 얼마나 해야 하지?”
“적당히 해요.”
“누구 앞으로 해야 하는 거지?”
신랑신부랑 다 친하면 이게 문제다.
“반씩 나눠서 양쪽으로 하죠.”
졸업한 지 몇 년 안 된 과동기들끼리 결혼하는 것인 만큼 결혼식장은 반쯤 동창회 분위기였다.
동기와 선후배들이 왔고, 교수님들도 오셨다.
아는 얼굴이 한둘이 아니다.
“야! 이동호. 미루랑 같이 왔네. 니들은 학교에서도 그렇게 붙어 다니더니, 요즘도 붙어 다니냐?”
“어이! 혁수혁수 김혁수!”
난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선배.”
“어, 미루야. 그동안 잘 지냈어?”
혁수 선배는 내가 처음 입학했을 당시 과대였다. 후배들한테 밥도 잘 사줬다. 그래서인지 선후배들과 두루 친했다.
동호 선배는 동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러 갔고, 난 방금 도착한 박승훈을 만났다.
“둘이 처음 사귄다고 들었을 때는 얼마 못 가 헤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결혼까지 할 줄이야. 이래서 사람 일은 모르는 건가?”
“그동안 싸울 만큼 싸웠으니 앞으로는 잘 살겠지.”
한쪽에는 여자 동기들끼리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심에는 진세연이 있었다.
“너 TV에 나오는 거 봤어.”
“처음에 세연이 너인지 모르고 그냥 닮은 여자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너라는 거 알고나서 깜짝 놀랐잖아.”
“내 친구가 아나운서라니.”
“연예인들 주식하는 예능에서 패널로도 나오던데. 거기 나오는 연예인들과 막 연락도 하고 그래?”
“같이 사진 한 장만 찍자. 자랑 좀 하게.”
그녀는 현재 SBC 아나운서.
공중파는 아니지만 SBC 관련 케이블 채널에서 활발하게 활약 중이다.
직업이 사람을 만든다고 해야 하나?
이전에는 좀 말괄량이 같은 분위기였는데, 아나운서가 된 지금은 한층 차분하고 단아해진 것 같은 느낌이다.
진세연은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했다.
“잘 지냈어, 미루야?”
“뭐, 그럭저럭.”
그때 모임 이후로는 처음이다.
1회차 때 그녀는 프리머스 사태에 엮이며 방송계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전부 내 덕이랄까?
“나 TV에 나오는 거 봤어?”
“응. 살짝.”
사실은 못 봤다.
바빠 죽겠는데 TV 볼 시간이 어디 있겠나?
“그럼 그동안 왜 연락 안 했어?”
“……응?”
내가 연락을 왜 해?
헤어진 옛 여친에게 연락할 이유가 있나?
“이따 끝나고…….”
“야, 한미루. 너도 왔냐?”
고개를 돌려 보니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있었다.
큰 키에 말끔한 외모를 지녔다. 각진 턱에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다.
이 녀석의 이름은 홍경석.
동기지만 나랑은 사이가 별로 안 좋은 편이다.
예전에 조별과제 할 때 하도 사람 빡치게 해서 거의 멱살 잡고 싸울 뻔하기도 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진세연을 좋아했는데 나랑 사귀는 바람에 그런 거라고 하는데…… 그건 뭐 내가 알 바 아니고.
홍경석은 이죽거리며 말했다.
“너 오늘 안 올 줄 알았는데.”
“왜?”
녀석은 피식 웃었다.
“너 DA증권 그만뒀다며. 재취업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이런 데 올 정신이 있어?”
굳이 내 걱정을?
“넌 취업했던가?”
“그럼. 지금 외국계 사모펀드에서 일하는 중이야. 들으면 깜짝 놀랄걸.”
“그래?”
얘가 사모펀드에서 일했었나?
1회차 때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홍경석은 이미 진세연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어! 세연아.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
* * *
결혼식은 식순에 따라 진행됐다.
주례는 학과장이 맡았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한다는 것은 앞으로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서로 베푸는 마음으로 결혼 생활을 하면 어떠한 위기가 닥쳐도 한마음 한뜻으로…….”
대충 좋은 얘기 같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긴 주례사가 끝난 뒤, 축가 타임이 돌아왔다.
진행자가 말했다.
“오늘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한 분이 와 계십니다. 요즘 길거리마다 이분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죠. 지유 씨를 소개합니다!”
소개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20대 초반의 여성.
160센티 정도의 키에 둥근 얼굴. 쌍꺼풀 없는 커다란 눈에 오뚝한 코, 붉은 입술. 왼쪽 눈가의 눈물점.
연예인 메이크업을 한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지유입니다. 선배님들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쟤 지유잖아.”
“대박! 어떻게 섭외했지?”
최근 발표한 신곡이 각종 음원차트 1위에 공중파 음악 프로그램에서도 1등을 하며 잘나가는 중이다.
정신없이 바쁠 텐데 아는 사이라고 축가 부르러 오다니. 제법 의리가 있다.
신랑신부는 감동했고, 하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결혼식은 인기가수의 화려한 공연 속에 막을 내렸다.
* * *
결혼식이 끝난 뒤.
밥 먹고 갈 사람들은 가고, 뒤풀이 갈 사람들은 남았다.
우리는 다 같이 신랑신부가 미리 예약해 놓은 술집으로 이동했다. 과모임을 자주 하던 주점을 통째로 빌렸다.
“되게 오랜만이다.”
“여기는 그대로네.”
“졸업한 뒤로는 처음인데.”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오늘 결혼식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신랑신부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진짜. 둘이 그렇게 싸우더니 이제 보니 완전 천생연분이었음.”
“축가로 지유를 섭외할 줄이야.”
“아까 찍은 거 페이스노트에 올려야지.”
동호 선배와 술을 마시는데, 혁수 선배가 우리 자리로 다가왔다.
“한 잔 하자.”
그러더니 슬쩍 얘기를 꺼냈다.
“너희 혹시 상해보험 안 필요해?”
“응? 갑자기 웬 보험?”
혁수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에서 상품설명서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이번에 우리 늘푸른생명에서 새로 나온 상품인데…….”
동호 선배는 당황하며 말했다.
“야, 잠깐. 너 사무직이잖아. 니가 왜 보험을 팔아?”
“아, 얼마 전부터 시작했어.”
난 1회차 때 대충 들어서 사정을 알고 있다.
원래 혁수 선배는 늘푸른생명에 입사해 꽤 괜찮은 연봉을 받았다.
신입사원들이 다 그렇듯 얼른 승진해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게 목표였는데, 어느 날 사장보다도 더 많은 연봉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바로 보험을 판매하는 보험설계사다.
그래서 바로 ‘나는 보험왕이 될 거야’라고 소리치며 정규직을 때려치우고, 위대한 항로를 개척하는 마음으로 보험설계사의 길을 걷기로 했다.
보험설계사는 아무래도 허들이 낮은 편이다 보니 경쟁이 치열한 편이다.
한국대까지 나와서 뭔 보험설계사를 하냐는 우려가 많았지만, 의외로 잘하는 중이다.
다른 보험설계사들이 무작정 가입을 종용하는 반면, 혁수 선배는 사무직으로 일했던 경험이 있는 만큼 자사의 보험상품 종류와 장단점을 꿰고 있었다.
혁수 선배는 고객의 상황에 맞춰서 보험컨설팅을 해줬고, 이는 고객 만족으로 이어졌다.
같은 보험설계사라도 한국대 경영학과 나온 사람이 설명해주면 좀 더 믿음이 가기 마련.
지금도 사무직으로 일할 때보다 훨씬 잘 버는 중이고, 나중에 보험킹까지는 아니어도 보험프린스 정도는 됐던 것 같다.
혁수 선배는 동호 선배를 붙잡고 계속 말했다.
“예기치 못한 위험이 생겼을 때 보험이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는 거야. 너 우리 회사 광고 봤지?”
“그 남편이 죽자 ‘10억을 받았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광고?”
“그래. 바로 그거. 남편이 죽었는데 10억도 못 받았으면 가족들이 어떻게 됐겠어?”
동호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광고 유명하지.”
잘생긴 보험사 직원과 젊은 미망인 사이의 묘한 눈빛과 교감이 이뤄지며 ‘남편의 라이프플래너였던 이 사람. 이젠 우리 가족의 라이프 플래너입니다’라는 나레이션으로 불륜 조장 광고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광고 자체는 먹혔는지, 그 뒤로 남편 사망보험에 가입하겠다는 전화가 그렇게 빗발쳤다고 한다.
……10억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혁수 선배는 동호 선배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 상품설명서 여기저기에 밑줄을 쳤다.
“봐봐. 보장내역 나쁘지 않다니까. 각종 상해 사고에 이 정도로 보장해주는 상품이 없어요. 이건 회사에 남는 것도 얼마 없어서 광고도 안 해.”
동호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전 다칠 일이 없어서 보험이 필요가 없어요.”
“그러지 말고 한번 생각해봐.”
“뭘 생각해?”
“너 사람 일 어찌 될지 모른다. 세상에 다치고 싶어서 다치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아?”
“왜 없어? 자해공갈단과 보험사기꾼들 있잖아. 에이튜브 함철문TV 보니까 달리는 차 앞으로 용기 있게 뛰어드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더만.”
예상치 못한 반론에 혁수 선배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반격에 나섰다.
“걔들은 사람이 아니야.”
“그럼 뭔데?”
“사람 탈을 쓴 고라니일 뿐.”
“흐음, 일리 있어.”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상해보험 하나 가입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내가 공장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회사에 틀어박혀서 일하는데 다칠 일이 있겠어?”
“건물에 있다고 안심할 게 아니야. 일하고 있는데 아래층에서 불나면 어쩔래? 너 홍천 화재 사건 봤지? 불 한번 나면 위층까지 올라오는 거 순식간이야.”
“그게 말이 되냐?”
“…….”
놀랍게도 말이 된다.
DA증권에서 불나서 둘 다 죽을 뻔했었다.
그 일로 동호 선배는 기관지를 크게 다쳤지만, 따로 보험을 들어놓지는 않아서 보상은 거의 받지 못했다.
결국 요양을 위해 공기 좋고 물 좋은 제주도로 내려갔다. 나중에는 거기도 관광객이 몰리는 바람에 매연이 풀풀 날린다며 투덜거렸지만.
난 동호 선배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하나 가입해요.”
“아니, 왜?”
이번 생에도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보험사에 대해 여러 안 좋은 이미지가 있긴 해도 어쨌거나 보험사는 팔릴 만한 괜찮은 상품을 만들기 마련.
하나 든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않을까?
일단 ‘보험 파는 애’는 나왔고, 그다음은 뭐였더라?
그렇게 생각하는데 홍경석 주변으로 애들이 몰려있는 것이 보였다.
“뭐? 너 컨티뉴 캐피탈에서 일한다고?”
“와! 진짜야?”
“거기 요즘 엄청 유명하잖아.”
“월가 최고의 사모펀드 아니야?”
“…….”
응?
이게 대체 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