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일상 (2)
성수동의 한 주점.
일본풍으로 꾸며진 이자카야로 실내는 전부 룸식으로 되어 있었다.
예약자 이름을 말하자 점원이 안내해주었다. 룸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자리에 앉아있던 남성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헤이, 브로!”
“일찍 왔네요.”
“이게 대체 얼마만이야?”
“좀 되긴 했네요.”
오랜만에 보니 반갑긴 하다.
아버지 일 때문에 본 뒤로는 처음이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술을 산다는 거야?”
“병진공업 도와준 걸로 술 한잔 사겠다고 했잖아요.”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제가 약속은 잘 지키는 편이라서요. 주문부터 해요.”
난 메뉴판을 살펴보았다.
일반 술집에 비해 가격이 좀 비싸긴 해도 터무니없거나 하지는 않았다. 인테리어와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적당히 합리적이다.
“소주로 할까, 맥주로 할까?”
“웬 서민 코스프레예요?”
“에이, 동생한테 얻어먹는 건데 비싼 거 먹어야 쓰나? 형이 그렇게 개념 없는 사람이 아니야.”
“됐으니까 비싼 걸로 시켜요.”
“뭐, 그렇다면야.”
허민웅은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미국은 잘 다녀왔고?”
“일만 하다 왔죠.”
“그 사이 뭐 엄청났더만. 블랙우드 호텔도 고객사로 삼고, 뭔 햄버거 가게도 하고, LD스튜디오도 박살내고……. 아! 이번에 사마라 회장 탈출시킨 게 컨티뉴 캐피탈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야?”
“대체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었어요?”
“금융계에 파다하던데.”
“설마 믿는 분위기예요?”
“그럼. 다들 컨티뉴 캐피탈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걸.”
“…….”
대체 우리 회사는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거지?
잠시 후, 술과 안주가 나왔다.
우리는 술잔을 부딪치며 얘기를 나눴다.
“이번에 사우디 왕세자 바뀐 거 보고 아버지도 깜짝 놀라더라.”
전제군주국에서 왕세자가 바뀐다는 건 보통 큰일이 아니다.
옛날이었다면 목 날아갈 사람들이 여럿이다. 비유가 아닌 글자 그대로.
별다른 혼란이 없다는 건 라시드 왕자가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하고 움직였기 때문.
“너 혹시 알고 있었어? 사우디 국부펀드랑 같이 투자하니까 정보를 좀 들었다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어요.”
“어떻게?”
“전에 방한했을 때 만나보고 왠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내 말에 허민웅은 깜짝 놀랐다.
“뭐? 그때 만났다고? 어떻게?”
“유재호 회장님 소개로요.”
“무슨 일로?”
“투자 좀 받아보려구요.”
“오! 그때부터 인연이 있었구나. 그래서 사우디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
“열심히 경제 개발하고 투자하겠죠. 그래서 지금 자금 마련하는 중이잖아요.”
경제 개발이라는 게 지도자의 의지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돈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통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 애쓰는 거고.
하지만 사우디는 그럴 걱정이 없다.
“일단 왕족과 기업가들에게 3천억 달러 뜯어내고, 그다음 아람코 지분 일부 상장시켜서 3천억 달러 마련하겠죠.”
허민웅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야! 그 둘만 합쳐도 한국 1년 국가 예산을 가볍게 넘네.”
이게 오일머니 클래스다.
다들 그 자금이 어디에 투자될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이다.
“화안그룹에는 잘된 일이잖아요. 요즘 주가도 엄청 올랐던데.”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수소 에너지에 대한 전망이 오락가락했다.
수소 에너지 시대가 온다는 건 대충 알겠는데 대체 언제 오냐는 것이다. 투자자들 다 죽고 기업들 다 망한 뒤 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원래는 토머스 모터스 덕분에 ‘수소 시대가 정말로 오는 건가’라고 기대했는데, 사실상 사기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기대감이 싹 사라졌다.
그런데 이번에 사우디가 움직이며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에이오일은 HJ퓨어셀을 인수해 에이퓨어셀로 이름을 바꿨고, 러시 펀드는 수소트럭 플랫폼 기업 넥스트로젠을 인수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라시드 왕세자가 발표한 경제 개발 계획 중에 수소 에너지가 포함돼 있었다.
오일의 뒤를 잇는 차세대 에너지로 수소 에너지를 육성하고, 네옴시티는 수소를 중심으로 한 100퍼센트 친환경 에너지를 사용하는 도시가 될 거라고 선언했다.
이 발언이 나가고 나자 관련 기업들 주가가 들썩거렸다.
기술과 자본은 선순환 구조다.
좋은 기술이 있어야 자본이 투자되고, 자본이 투자되면 기술이 발전한다.
사우디가 국가 차원에서 육성에 나선 만큼 시장 전체가 빠르게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 가장 크게 수혜를 받을 것으로 기대되는 기업이 바로 화안에너지.
당장 매출과 수익에 영향이 있는 건 아니지만 향후 기대감만으로도 주가가 배로 뛰었다.
“안 그래도 회장님께서 지금 기대가 커.”
화안그룹은 10대 그룹 중에서 재생에너지와 수소 산업 비중이 가장 크다.
화안솔루션은 태양광 분야의 선두주자고, 화안에너지는 한정물산이 가지고 있던 HJW에너지 지분을 통째로 인수해 사명을 화안WE로 바꿨다.
이 문제는 나와도 좀 관련이 있다.
일단 한정그룹을 해체한 게 바로 나니까. 그리고 최근 화안WE의 벤더로 포함된 중소기업이 바로 병진공업.
“요즘 병진공업은 어때요?”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중이지. 박용진 부사장이 아주 잘하고 있는 모양이야.”
사실 기업이 투자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기껏 공장을 다 지어놨더니 주문이 안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병진공업은 화안WE를 고객으로 삼고 있는 만큼 그럴 걱정이 없다.
뭐, 대기업 믿고 투자했다가 뒤통수 맞은 중소기업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내 뒤통수를 치지는 않겠지.
“아, 맞다. 아버지가 선물 감사하대요.”
“정말? 하하! 별것도 아닌데 감사까지야.”
“그런데 마시지도 못할 술을 뭘 그렇게 보냈어요?”
“어째서? 아버님 양주 좋아하신다며?”
“양주도 적당한 걸 보내야 따서 마시지. 발렌타인 30년도 몇 년째 못 따고 있는 양반이 맥켈란을 딸 수 있을 것 같아요?”
허민웅은 손을 내저었다.
“에이, 그건 걱정할 것 없어. 지금 병진공업 성장하는 거 보면 몇 년 안에 그 정도는 소주처럼 마시게 되실 테니.”
“흐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사업이 잘되고 수입이 늘어나면 아버지도 용기를 내서 양주 뚜껑을 따실 수 있겠지.
한창 술을 마시던 도중 허민웅이 말했다.
“니 생각에는 말이야…… 아니다.”
사람이 말할 때 하지 말아야 할 짓이 두 가지 있다. 그중 첫째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둘째는…….
“뭔데요? 평생 말하지 않을 거면 지금 말하지 말고, 나중에라도 말할 것 같으면 지금 말해요.”
처음부터 말할 생각이었는지, 바로 입을 열었다.
“니 생각에는 내가 화안그룹을 물려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많은 의미가 담긴 질문이다.
“왜요? 사우디 왕세자 바뀌는 거 보니, ‘혹시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도전의식이 들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룹에는 별 욕심이 없지 않았어요?”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1회차 때는 그냥 적당한 계열사 하나 받고 떨어져나갔기 때문이지.
허민웅은 피식 웃었다.
“야, 재벌집에 태어나서 그런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다만 능력이 안 되고 기회가 없으니 수그리고 사는 거지.”
한정그룹 건을 보면 알 수 있듯 재벌가 사람들이 경영권과 지분을 놓고 다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형제자매끼리는 물론이고, 때로는 부모자식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일반인들이 볼 때 돈도 많은 사람들이 서로 왜 그렇게 싸우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가져보지 못한 사람은 욕심이 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가져본 사람은 더 많은 걸 가지고 싶어 하기 마련.
아예 경영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다면 모를까, 기왕 경영을 하는 거라면 계열사 하나보다는 그룹 전체를 가져가고 싶겠지.
난 1회차 때를 떠올렸다.
내가 건드리지 않았어도 토머스 모터스 사태는 터질 일이었다. 어차피 사기였으니까.
그 책임을 허민웅이 뒤집어썼고, 그는 그룹 내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그리고 형인 허민홍이 화안그룹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달라졌다.
토머스 모터스 사태는 1회차 때보다 훨씬 일찍 터졌고, 허민웅은 내 덕에 그 위험을 피해 간 반면 허민홍은 옴팡 뒤집어썼다.
화안솔루션 주가는 폭락한 반면, 화안에너지 주가는 크게 오르기도 했고.
만약 그룹의 주력 산업이 수소로 바뀌기라도 하면, 화안에너지가 가장 핵심적인 계열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한번 해볼 만할 것 같다?”
“아니 뭐…… 욕심도 욕심인데, 한번 생각해봐. 만약 형이 그룹 물려받으면 내가 어떻게 될 것 같아?”
난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좋은 꼴 보기는 힘들겠죠.”
원래 형제 사이가 친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토머스 모터스 사태 때 둘 사이는 완전히 갈라졌다.
정확히는 허민홍이 동생에게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만약 허민웅이 재빨리 말을 해줬다면 화안솔루션 역시 손실을 피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의 입장에서는 동생이 선빵쳤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거봐. 니 생각도 그렇잖아. 말년에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내가 회장이 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지 않을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네요. 노후 준비는 중요하죠.”
“그치?”
“그래도 장남이라는 메리트는 무시 못 하게 클 텐데.”
화안그룹 망나니로 불릴 정도로 사고를 치고 다닌 허민웅과는 다르게 허민홍은 일찍 결혼해 경영에만 전념했고, 주변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토머스 모터스 사태로 인해 화안솔루션 주가가 박살났는데.
주주들은 착하고 성실하지만 주가 말아먹는 경영자보다는, 사고 치는 망나니라도 주가 올려주는 경영자를 선호하기 마련.
허민웅은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혼자 힘으로는 힘들겠지만…… 니 말 잘 듣고 움직이면 될 것 같기도 하고.”
내 입장에서도 얼굴도 모르는 허민홍보다는 그래도 친분이 있는 허민웅이 낫다. 게다가 허민홍은 나한테도 이를 갈고 있지 않을까?
토머스 모터스 사태를 일으킨 데다가 처가(한정그룹)까지 날려버렸으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여자한테 한눈팔지 말고 한번 열심히 해봐요.”
“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런데 넌 여자 안 만나?”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돈 벌기도 바쁜데.”
“뭐 남들은 한가해서 연애하나?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새마을운동 시절에도 다들 연애하고 애 네다섯씩 낳아서 잘 키웠다던데.”
“…….”
듣고 보니 그렇다.
지금은 애 하나 키우기도 버겁다고 출산율이 1명 이하로 떨어지는 판에, 주 52시간이라는 개념도 없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시절에 출산율이 그렇게 높았다는 게 신기하다.
“너 혹시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니야?”
“제가요?”
딱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데.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는 사람들 중 미녀가 많긴 하다.
“연예인이라도 소개해줄까?”
“아는 연예인 있어요?”
허민웅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많지.”
하기야 재벌 후계자와 여자 연예인이 결혼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지. 그 역시 유명 모델과 열애설이 나기도 했고.
“전 됐어요.”
“왜?”
“여자 만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돈 벌어야지.”
허민웅은 혀를 찼다.
“이야! 있는 놈이 더하다더니. 그렇게 벌었는데도 부족해?”
“예. 한참 부족해요.”
“얼마나 더 벌려고?”
“글쎄요. 한번 시작한 이상,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부를 쌓아올려봐야 하지 않겠어요?”
허민웅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헛소리 같아요?”
내 물음에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라면 진짜 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