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리야드에서 생긴 일 (2)
[(WST) 사우디아라비아, 변화와 개혁의 시작]
(전략)
새롭게 왕세자가 된 라시드는 바로 국가 개혁을 선포했다.
여기에는 자원의존형 경제에서 벗어나 신도시를 건설하고 첨단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이 담겨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사우디는 재정수입의 대부분을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저유가로 인해 재정적자는 매년 심각해지는 중이고, 작년 한 해에만 850억 달러의 적자가 발생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 국고가 비어있는 상황에서 경제개혁은 무리다.
이에 라시드 왕세자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바로 부유한 왕족과 기업인들의 돈을 국고로 환수하는 것이다.
라시드 왕세자는 왕족과 기업인들 약 1천여 명을 리야드의 리치칼톤 호텔로 불러 모은 다음 문을 걸어 잠갔다.
이들은 각자의 방에 갇혀 취조를 받는 신세가 됐다.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바로 왕세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는 것뿐이다.
한때 관광객들이 머물던 리야드의 리치칼톤 호텔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감옥으로 변했다.
부정 축재를 시인한 이들은 그 자리에서 외국계 은행에 전화를 걸고 이메일을 보내 돈을 이체시켰다.
‘애국 헌납금’을 충분히 납부한 이들은 그동안의 죄를 사면 받고 풀려났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지금도 호화로운 방에 갇혀서 취조를 받는 중이다.
사우디 정부는 지금 취조하고 있는 이들 외에도 체포 명단을 추가하고 일부 왕족들의 출국을 금지시켰다.
리치칼톤 호텔에 갇혀있는 몇몇은 익명으로 구금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우리는 24시간 감시를 당하고 있고, 잠도 몇 시간 자지 못한 채 취조를 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인권 유린이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우리는 재산을 강탈당할 위험에 놓여있다. 국제사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조사를 담당하고 있는 아셰르 위원장의 말은 전혀 달랐다.
“모든 조사는 정당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 인권 유린이라는 말은 돈을 내기 싫은 자들의 억지 주장일 뿐이다. 범죄로 인해 발생한 수익을 국고로 회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이다. 그 외의 재산 헌납은 모두 자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들이 헌납한 자산은 전부 국부펀드에 들어가 국가 발전을 위해 쓰이게 될 것이다. 대부분은 기꺼워하며 애국 헌납금을 납부 중이다.”
부패 척결이라는 확실한 명분이 있는 만큼 국제사회가 나서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그동안 부정부패에 지친 사우디 국민들은 왕세자의 조치에 대해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사우디 국영 언론은 칼리드 왕자의 인터뷰를 공개했다.
그는 26대 국왕의 아들로, 그동안 국영 인프라 사업권을 독점해 외국기업에 판매해 막대한 수익을 올린 것으로 유명했다.
추정 자산은 무려 200억 달러.
그는 그중 무려 90퍼센트인 180억 달러를 내고 나서야 무사히 리치칼톤 호텔을 나올 수 있었다.
취재에 응한 칼리드 왕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모은 재산을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납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마음 같아서는 동전 한 닢 남기지 않고 전부 헌납하고 싶었지만, 왕세자께서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남겨주셨다. 그분께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 * *
[(속보) 사우디, 왕세자 전격 교체]
[사우디 군부, 새로운 왕세자에게 충성 맹세]
[사촌 형을 쫓아내고 왕세자 자리에 오르다]
[라시드 왕세자, 국가 개혁조치 발표]
[왕족들 리치칼톤 호텔에 감금]
사우디에서 연일 들려오는 소식에 투자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도 그럴 것이 사우디는 세계 최대 산유국이자 OPEC의 수장. 그리고 국제 투자시장의 큰손이다.
하지만 국왕이 죽거나 쿠데타가 발생한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2인자만 바뀐 것인 만큼 별다른 혼란은 발생하지 않았다.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장도 거의 없었다. 주가와 유가 흐름 역시 그대로였다.
오히려 향후 사우디가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관련 기업들 주가가 들썩거렸다.
-이게 대체 뭔 일이래?
-ㅋㅋ 왕족들 가둬놓고 삥 뜯는 중. 뒤져서 나오면 100만 달러에 한 대~
-대체 누가 저런 방법을 생각해냈을까?
-액수가 상상초월임. 인당 10억 달러가 기본이네.
-돈 벌기가 세상에서 제일 쉬웠습니다.
-저만큼 뜯어낸 것보다 저만큼 해먹었다는 게 더 신기함.
-사마라 회장 탈출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요즘 왜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지?
-ㄹㅇㅋㅋ 소설도 이렇게 쓰면 개연성 없다고 욕 처먹음.
-원래 현실은 항상 모두의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지.
* * *
일본에서의 일을 끝마친 나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있었다.
현재 월가의 최대 뉴스는 역시나 사우디였다.
동호 선배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아니, 그런데 여자가 운전을 하는 게 무슨 개혁이라는 거야?”
“그전에는 여자가 운전하는 게 불법이었으니까요.”
이번 개혁조치를 보고 사람들이 가장 놀란 게 바로 이 부분이다.
그래도 사우디라고 하면 돈 많고 잘사는 나라라는 이미지. 설마 이 정도로 사회가 경직돼 있고 남녀차별이 심할 줄은 몰랐겠지.
지금 내놓은 개혁안도 다른 나라가 보기에는 그저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는 수준이다. 그러나 사우디라는 나라를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게 급진적이다.
조선시대 때 남녀평등을 외치는 느낌이랄까?
때문에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실제로 1회차 때는 이슬람 성직자들이 들고일어나 쿠데타 모의를 하는 바람에 체포해 사형을 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형제상속제와 부자상속제는 뭐가 다른 거야?”
“일가친척이 권력을 공유하고 다 함께 해먹는 게 형제상속제라면, 일가만 해먹는 게 부자상속제죠.”
다시 말해 이제는 친척들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아, 그래서 싹 다 잡아넣은 거구나.”
“그런 거죠.”
돈을 뜯어내는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그 이유는 오래전부터 왕족과 기업인들의 재산내역을 은밀히 조사해왔기 때문.
부정 축재의 증거를 들이밀며 뱉어내라고 압박하니 달라는 대로 줄 수밖에.
일설에 따르면 내부적으로 수금 목표치까지 정해놓았다고 하는데, 그 금액이 무려 3000억 달러다.
사우디의 1년 GDP가 8천억 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무려 국가 GDP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다.
대한민국 재벌들 다 털어도 이 정도는 안 나오지 않을까?
라시드 왕세자는 내친 김에 아예 반부패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앞으로도 부패 척결이라는 명분으로 정적들을 감시하고 숙청하겠다는 것이다.
왕권도 강화하고, 돈도 벌고, 민심도 얻을 수 있다.
그야말로 일타삼피랄까?
데이비드는 나를 보며 물었다.
“라시드 왕세자를 만났을 때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예상했습니까?”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것도 원래대로라면 올해 말에나 벌어지는 일이다.
나로 인해 더 빨라진 건가?
그 얘기에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라시드 왕세자를 만났다구요?”
“그게 정말입니까?”
“예. 방한했을 때 잠깐요.”
동호 선배는 옆에서 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때 그림을 팔았지. 중동 사람이라기에 부천 중동에 사는 사람인 줄. 아무튼 그때 친분도 꽤 쌓지 않았나?”
“으음…….”
나름 깊은 얘기도 나누고 그림도 하나 팔았다. 이 정도면 꽤 친분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않나?
“친하면요?”
“뭐, 나중에 다 같이 왕궁에 국빈 초청받는다든지.”
“…….”
꿈도 크셔라.
한창 회의를 하는 사이 난 사라의 전화를 받았다.
“그쪽 분위기는 어때요?”
[바빠서 죽을 것 같아요.]
그녀는 지금 왕궁에서 머물며 일을 처리 중이다.
환수한 돈들은 대부분 국부펀드로 들어갔다. 현재까지 뜯은 액수만 해도 1천억 달러.
작년 재정적자를 한방에 메우고도 남을 금액이다.
이런 걸 보면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놈이 많을 뿐이다’라는 그분(?)의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잠깐 오빠 바꿔줄게요.]
“예?”
어! 오빠면 설마…….
[오랜만이군요.]
라시드 왕세자의 목소리다.
다행히 아직 날 잊지 않은 모양이다.
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왕세자가 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왕세자님이라면 잘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다구요.”
[왕족과 기업인들을 체포해 부정축재한 돈을 환수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그날 듣지 못했다면 차마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예?”
아, 아니, 그거 원래 당신이 했던 일이잖아.
왜 자꾸 내 핑계를 대는 거야?
* * *
사마라 회장이 일본을 탈출하고, 사우디의 왕세자가 바뀌고 개혁 드라이브를 거는 사이.
다른 기업들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블랙우드 호텔은 홈페이지를 개편하고 숙박 공유 앱을 출시했다.
그때 말했던 대로 초호화 주택과 유럽의 고성들을 선보였고, 기존 블랙우드 호텔 멥버십의 등급에 따라 예약할 수 있는 주택에 차등을 뒀다.
앱 출시 이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돈만 내면 평생 꿈꾸던 집이나 성에서 살아볼 수 있는 것이다. 회원 가입이 몰리며 덩달아 호텔 이용률까지도 올라갔다.
덕분에 주가도 상승 중이다.
그리고 레전드게임즈의 탐 스콧 CEO는 나이트라이트의 아일랜드 모드를 출시했다.
유저들은 각자의 섬에 자신만의 공간을 꾸밀 수 있고, 친구를 초청하는 것이 가능했다.
굳이 캠페인을 하지 않아도 캐릭터들끼리 모여 음성채팅을 하며 노는 것이 가능해지자 스킨 판매는 증가했고, 유저들이 게임에 머무는 시간 역시 크게 늘어났다.
나이트라이트가 흥행하며 레전드스토어 접속 인원도 크게 늘었다.
사람들은 바뀐 스토어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우와! 이제 음성채팅과 스트리밍도 가능하네.
-평점이랑 커뮤니티 기능도 추가했고.
-장바구니 기능도 없던 스토어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이게 그 거지 같던 레전드스토어 맞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진작 이렇게 할 것이지. 그동안 왜 안 한 거야?
-스노우 크래시가 나서서 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거기는 뭐 못하는 게 없네.
기능상으로만 보면 이제 스트림에 비해 부족할 게 없고, 스트리밍과 채팅 등 커뮤니티 부분은 훨씬 강화됐다.
이용자들은 큰 만족감을 나타냈다.
유저 계정이 늘어나자 게임사들은 하나둘씩 레전드스토어 기간독점으로 게임을 출시하겠다고 나섰고, 덕분에 레전드스토어는 명실상부한 PC ESD 시장의 2인자로 올라섰다.
이에 위협을 느꼈는지 밸뷰는 스트림의 판매 수수료를 기존 30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무려 3분의 1이나 인하하겠다고 밝혔고, 낮아진 수수료에 제작사들은 환호했다.
컨티뉴 캐피탈은 120억 달러의 잔금을 치르고 레전드게임즈 인수 사실을 공표했다.
난 시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생 많았어.”
[뭘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요.]
블랙우드 호텔 앱을 만들고, 레전드스토어를 개편한 것은 전부 스노우 크래시가 맡아서 했다.
“내일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미국에는 또 언제 와요?]
“금방 올 거야. 그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
[형도 잘 지내요.]
생각해보면 미국에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스노우 크래시는 블랙우드 호텔과 FBI, NSA를 고객으로 삼았고, 오코너 버거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고, 컨티뉴 캐피탈은 레전드게임즈 인수를 마무리했다.
마치 그동안 뿌려놓은 씨앗들이 하나씩 싹을 틔우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미래로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거지.
난 데이비드와 악수를 나눴다.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그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미국에서의 일정을 끝마친 나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동호 선배와 김범석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