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이스케이프(Escape) (6)
난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이대로 은퇴하실 생각이시라면 그곳에서 편하게 노후를 보내시면 되고, 그게 아니라면 인생 2막을 준비하셔도 되겠죠.”
“인생 2막?”
“요르단과 사우디는 붙어있죠. 아시겠지만 최근 사우디는 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 구조를 바꾸기 위해 다양한 산업을 육성 중입니다. 그중 하나가 네옴시티라는 거대한 건설 프로젝트죠.”
사우디는 돈은 많지만 능력 있는 경영자는 별로 없다. 왜냐하면 그동안 석유만 팔았기 때문이지.
사마라 회장은 만년 적자기업이던 키오노스를 흑자기업으로 만들 정도로 뛰어난 경영능력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요르단 출신이라 아랍어도 가능하다.
이대로 능력을 썩히게 놔두기는 아깝다.
“거기서 쉬시다 보면 회장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찾아올 겁니다.”
“흐음, 사우디에서 말인가?”
컨티뉴 캐피탈과 사우디의 관계, 그리고 지금 사우디의 움직임을 본다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민자 가정 출신인 그는 자수성가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그런 만큼 돈 욕심도, 명예 욕심도 크다.
이대로 도망쳐서 뒷방 늙은이로 지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을 탈출한 그가 다시 경영자로 재기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큰 복수가 되겠지.
보통 탈출까지만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 이후의 삶까지 친절하게 설계해주다니. 그야말로 고객 감동 서비스랄까?
표정을 보니 감동……까지는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것 같은 눈치다.
“나를 도우려는 이유가 뭔가?”
“아! 제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라서요.”
사마라 회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믿으라고?혹시 탈출을 도와주는 척하고 뒤통수를 칠 수도 있지 않겠나?”
“어! 설마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미안하네만, 한번 당해 보니 사람은 쉽게 믿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네.”
“하긴.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셨을 테니까요.”
사이토 마사키가 떠올랐는지 사마라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가전 사업부 소속이었던사이토 마사키는매각 당시 잘릴 운명이었다.
하지만 사마라 회장은 그를 자신의 후계자이자 최측근으로 앉혔다.
굳이 가전 사업부에 있던 사람을 빼온 이유는 일본 기업이 외국인 CEO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사이토는 기대에 걸맞게 최선을 다해 그를 보좌했다.
사마라 회장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좋은 녀석이었는데.”
설마 믿었던 후계자에게 뒤통수를 맞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마라 회장이 무조건 사이토를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름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뒀다. 다만 손 쓸 틈도 없이 당했을 뿐이지.
난 그를 도우려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유성전자와 협업을 맺고 있고, 러시 펀드를 통해 주식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사마라 회장은 바로 내 말을 이해했다.
“키오노스를 흔들어 유성전자 주가를 올려보겠다는 건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희는 키오노스 폭락에도 배팅할 생각이거든요.”
유성전자의 발표 이후, 유성전자 주가는 떨어진 반면 키오노스 주가는 30퍼센트 넘게 올랐다.
이는 향후 빅테크 기업의 수주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반영됐기 때문. 만약 그 기대감이 물거품이 된다면 주가는 오른 것 이상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는 피식 웃었다.
“컨티뉴 캐피탈은 공매도를 참 좋아하는군.”
“뭐…… 그렇긴 하죠.”
처음 이름을 알린 것도 토머스 모터스 공매도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숏충이나 풋맨으로 낙인찍혔다.
실제로 그만큼 공매도를 많이 하기도 했고.
원래 주가란 올리기는 어려워도 떨어트리기는 쉬운 법이니.
난 그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묻겠습니다. 제가 회장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사마라 회장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회장님께서 탈출하신 다음, 마음을 바꾸신다면 저희가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를 탈출 시키려는것은폭로를 하게 하기 위함.
만약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가 입을 다문다면 이 계획은 실패한다.
1회차 때 폭로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나로 인해 시기가 앞당겨진 만큼 다른 변수가 생길 수도 있다.
안전장치를둬서 나쁠 건 없겠지?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가?”
“처음에 말씀드렸잖아요. 좋은 투자 상품 소개해드리러 왔다고. 회장님께서도 키오노스 하락에 배팅하시죠.”
“응?”
“직접 하셨다가는 주가조작으로 문제가 될 테니, 페이퍼컴퍼니 펀드를 만들겠습니다.여기에 투자하시는 방식은 어떻습니까?”
사마라 회장은 기가 막히는지 입을 벌렸다.
“뭐라고?”
“이익은 확실하게 보장해드리겠습니다. 퇴직금과 스톡옵션도 못 받으셨잖아요. 이제 와서SPME나 키오노스가 챙겨주지는 않을 테니, 본인 몫은 본인이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사마라 회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세상에 돈보다 더 확실한 보장이 있겠나?
잠시 후, 사마라 회장이 입을 열었다.
“계획은 어떻게 되나?”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난 준비해놓은 탈출 계획을 말해주었다.
내 얘기를 다 들은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다인가?”
“예.”
“너무 허술한 것 같은데.”
저기요. 1회차 때 이 허술한 방법으로 탈출에 성공하셨어요.
어째 이 계획을 듣는 사람들마다 똑같은 반응이다.
“설마 미션 임파서블이나 007 같은 걸 기대하셨나요? 총격전을 벌이거나 줄 하나에 의지해 헬기에 매달리는 걸 원하신다면 그쪽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괜찮네.”
이 나이에 그러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난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이미 두 차례 예행연습을 진행했고, 문제없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연습까지 했다고 하니, 그제야 좀 믿는 것 같은 눈치다.
“그런데 이 계획을 진행하려면 집에서 파티를 열어야 하는데, 무슨 파티를 열라는 건가?”
원래 그가 탈출하는 시기는 내년 크리스마스 직후.
“혹시 가까운 기념일 없나요?”
“없네. 내 생일은 8월이고, 결혼기념일은…… 언제였더라? 가을쯤이었던 것 같은데.”
“…….”
말년에 황혼이혼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외워두는 게 좋을 텐데.
어쨌거나 문제는 이거다.
파티를 열어야 하는데 근 몇 달 내에 기념일이 없다. 만약 아무 이유 없이 파티를 연다면 수상하게 생각할 테고.
감시가 어느 정도 느슨해지는 내년과는 달리, 지금은 꽤나 삼엄한 편이다.
다행히 내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생각해 놨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 *
얘기가 끝난 후.
난 사마라 회장의 자택을 나와 JR블랙우드 호텔로 돌아왔다.
계획은 이미 준비됐으니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 별문제 없이 진행만 된다면, 이번 달 안에 사마라 회장은 일본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우리의 투자 방향.
역시나 가진 자산 전부를 키오노스 공매도에 쏟아부을 생각이다. 눈치채지 못하게 움직이려면 옵션 쪽은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낫겠지.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투자 계획을 짜고 있는데, 누군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영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들어 보니,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일본인이다.
정장에 버버리코트를 입고 금테 안경을 썼다. 평범한 체격에 평범한 얼굴이지만, 왠지 모르게 권위의식 같은 것이 엿보였다.
난 그에게 물었다.
“누구시죠?”
“아! 전 이런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영어는 없고 한자가 가득 적혀 있었다. 이름은 몰라도, 직장 이름은 읽을 수 있었다.
“오호! 도쿄지검에서 일하시네요.”
그는 자기소개를 했다.
“요시네 켄타로 검사입니다.”
아는 이름이다.
왜냐하면 사마라 회장을 집어넣은 장본인이니까.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일본 역시 대기업 회장 수사라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게다가 사마라 회장의 경우 프랑스 정부와의 관계까지 고려해야 했으니.
도쿄지검은 약 1년 가까이 사마라 회장에 대한 내사를 벌였고, 엘리트 검사들이 잔뜩 투입됐다.
그 총지휘자가 바로 요시네 켄타로.
그는 이번 일을 처리하며 스타 검사로 올라섰다. 그 인기를 바탕으로 자민당에 입문해 정계에 진출해 나중에는 내각관방장관 자리까지 오른다.
회귀하기 직전에는 차기 총리 얘기까지 나왔던 것 같은데.
“잠깐 얘기를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될 것도 없지.
“그러시죠.”
그는 내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혹시 검찰 쪽에서 접촉을 해올지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는 보기 드물게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이번 수사를 맡게 된 것도 있겠지.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착착 밟아 와서 그런지, 영어 발음은 나보다 좋은 것 같다.
“컨티뉴 캐피탈의 한미루 씨 맞습니까?”
“맞습니다만 도쿄지검에서 무슨 일이신가요?”
“아! 별일은 아니고, 그냥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입니다.”
“뭔가요?”
“무슨 일 때문에 피의자를 만난 겁니까?”
“접견신청서를 통해 밝혔을 텐데요. 사마라 회장의 자산 관리 때문입니다.”
난 그가 손목시계를 잘 볼 수 있도록 손목을 살짝 비틀었다. 주머니에 포르쉐 키가 없는 게 아쉽다.
재무상담사의 필수품이라는 롤렉스까지 보여줬음에도 쉽게 믿지 않는 눈치였다.
“컨티뉴 캐피탈은 개인의 투자를 받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액수에 따라 다르겠죠.”
검사라서 그런지 질문을 하는 태도가 무슨 취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예전의 나였다면 긴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딱히 그런 느낌도 없다. 사람이 돈이 많아지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법이지.
“혹시 자산 관리 말고 다른 목적이 있지는 않습니까?”
순간, 뜨끔했지만 난 태연하게 물었다.
“다른 목적이라니요?”
“컨티뉴 캐피탈은 스노우 크래시를 통해 유성전자와 협력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PIF와 공동 투자한 러시펀드를 통해 유성전자 주식을 사들였죠.”
“그래서요?”
“키오노스의 내부정보를 얻으려 했다든지요.”
키오노스의 경쟁사와 손잡고 있는 사모펀드에서 보석 중인 피의자와 접촉한 게, 엄청 이상한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좀 미심쩍긴 하다.
혹시 사마라 회장이 다른 방식으로 폭로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건가?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경고조로 말했다.
“누구라도 기업의 내부정보를 유포한다면 법에 따라 처벌받게 될 겁니다.”
혹시 전해 들은 얘기를 언론에 흘리거나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인가?
난 피식 웃었다.
“법대로 하시는 걸 좋아하시나 보네요.”
“법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사마라 회장을 꽤 무리해서 잡아넣으신 것 같던데.”
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외국인이든 내국이든 죄를 지었으면 처벌을 받는 게 당연합니다.”
“딱히 편들 생각은 없지만, 큰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횡령, 배임, 공시위반 등의 일은 자주 발생하기 마련이죠. 비슷한 의혹이 있는 경영자들이 한둘이 아니던데, 어째서 사마라 회장만 체포한 건가요?”
“혐의가 드러난다면 누구든 수사할 겁니다.”
헛소리하기는.
정작 정계와 얽혀있는 자이바쯔들은 털끝하나 건들지도 못하면서.
“혐의 입증을 자신하는 것치고는 재판도 안 열리던데.”
“아직 수사가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수사가 끝나고 체포해야지, 체포부터 하고 수사를 하는 건 뭔 경우야?
외국인이라고 인종차별 하나?
“이런 걸 보통 엔자이라고 하지 않나요?”
한자로는 원죄.
풀어서 해석하자면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걸 뜻한다.
애먼 사람 잡는 거야 어느 나라 사법기관이든 마찬가지지만, 관료주의의 나라 일본에서는 유독 심각하다.
특히 일본 검찰은 실수를 인정하면 할복이라도 해야 하는지, 죽으면 죽었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차라리 후진국이면 뇌물이라도 주고 빠져나오겠지만, 선진국이다 보니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직접 빼내러 온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