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이스케이프(Escape) (5)
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나리타 공항에 내린 다음 택시를 타고 롯폰기에 있는 블랙우드 호텔에 짐을 풀었다.
일본은 오랜만이다.
1회차 때 직장 다니던 시절의 여자친구와 왔던 게 마지막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난 한참을 떠올려 보려고 하다가 포기했다.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정작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사건들은 대충 다 기억하고 있는데, 몇 년을 사귀었던 애인 얼굴은 잊었다니.
뭐, 상관없겠지.
이번 생에는 만날 일도 없을 테니.
* * *
다음 날.
푹 자고 일어나 공짜 조식까지 먹은 다음, 인터폰으로 로비에 연락했다.
“차량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역시 JR블랙우드 카드가 있으니 편하다. 숙소는 물론이고 VIP를 위한 차를 개인 차량처럼 사용할 수도 있으니.
마치 전세계에 거점을 둔 느낌이다.
도착한 곳은 정원이 딸린 3층짜리 저택이다.
도쿄 중심에 이 정도 크기면 집값이 만만치 않을 거다. 원래는 사택이라 비용으로 처리했으나, 현재는 본인이 임대료를 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자택 앞은 경찰관들이 지키고 있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일본어로 물었지만, 난 영어로 대답했다.
“컨티뉴 캐피탈에서 왔습니다.”
난 여권을 내밀었다.
오기 전 미리 접견 신청을 해놓았다. 목적은 자산 관리.
신분 확인이 끝난 다음에야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문 입구에는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거실 소파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게.”
“처음 뵙겠습니다, 회장님. 컨티뉴 캐피탈의 한미루라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티에리 사마라.
나이는 60대 초반.
나이보다 정정해 보이는 모습이다. 키는 170센티 정도.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머리는 하얗다.
그는 요르단계 프랑스인으로, 태어나고 자란 곳은 요르단이다.
“컨티뉴 캐피탈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네만,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건가?”
“좋은 투자 상품이 있어서 소개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증권사 직원이었던 때가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얼마 안 됐다.
“컨티뉴 캐피탈은 외부 투자를 받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죠.”
“어떤 상품인지 듣고 싶군.”
“워낙 중요한 상품인지라 조용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집에는 그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이 상주해있다.
내 말에 사마라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럼 서재로 가지.”
* * *
서재라고는 해도 책은 별로 없다.
여기는 일본에서 지낼 때만 쓰는 거처니, 짐을 많이 가져다 놓을 필요도 없겠지.
난 슬쩍 내부를 둘러보았다. 당연하게도 실내에는 감시 카메라가 없었다. 아마 도청 장치도 없을 것이다.
그런 짓을 했다가 걸리면 진짜 국제 망신이니.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았다.
“한미루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서 좀 알아봤네. 알아보니 일개 직원은 아니던데. 블랙우드 사태를 직접 해결했다고 들었네만. 그것 말고도 엄청난 일들을 벌였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
노련한 경영자답게 갇혀 지내고 있는데도 정보가 빠르다.
“소문이야 항상 과장되기 마련이죠.”
사마라 회장은 작게 웃었다.
“그건 직접 얘기해보면 알겠지. 그나저나 서류로만 보내도 될 걸 대체 무슨 투자 건이기에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건가?”
표정에는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만나자고 하니 바로 만난 것도 그렇고 꽤 돈 욕심이 큰 모양이다. 하기야 애초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상품 설명을 드리기에 앞서 회장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난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하루빨리 일본을 탈출하셔야 합니다.”
사마라 회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탈출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 나보고 해외 도피라도 하라는 건가?”
반응을 보니 확실히 알 수 있다.
역시 이 시점에서는 탈출에 대해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구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내가 죄지은 것도 없는데 왜 도망을 치라는 건가? 어차피 몇 달 못 가 풀려나게 될 텐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죄가 있다는 건가?”
“아니요. 죄가 있든 없는 일본은 절대 회장님을 풀어주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어째서?”
“회장님께서 복수할까 봐요.”
사마라 회장은 코웃음을 쳤다.
“복수라고? 나한테 무슨 힘이 있어서 복수를 할 수 있겠나?”
“아는 게 곧 힘이죠.”
그는 5년 넘는 기간 동안 키오노스 회장직에 있었고, SPME와 키오노스의 합병을 주도했다.
그리고 현재 회장인 사이토 마사키는 그가 키운 거나 다름없다. 그런 만큼 키오노스의 내부사정과 신임 회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일전에 기자회견을 열려고 했던 것도 폭로하려고 그랬던 거 아닌가요?”
보석으로 풀려난 뒤.
그는 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워낙 큰 사건이었던 만큼 내외신 기자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기자회견을 하기 직전, 일본 검찰은 추가 배임 혐의가 발견됐다며 또다시 그를 체포했다.
보석으로 풀어준 피의자를 사흘 만에 다시 체포한 것이다!
결국 기자회견은 무산됐고, 그는 보름가량 구치소에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 여론이 조용해질 때쯤 10억 엔의 보석금을 추가로 내고 풀려났다. 그 뒤로는 기자회견 같은 것은 하지 않고 집 안에서 조용히 지내는 중이다.
“체포는 일종의 경고였겠죠. 허튼소리를 하면 다시 구속시키겠다는. 그만큼 회장님께서 가진 정보가 위험하다고 검찰이 판단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놈들이 과민반응한 거지. 내가 뭐 대단한 정보라도 알고 있을 것 같나?”
아닌 척하기는.
난 탈출 이후 그가 어떤 자료를 공개했는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회장님을 풀어준다면 SPME와 키오노스의 합병안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위험이 있습니다.”
사마라 회장 긴급 체포 이후 합병 추진은 중단된 상황.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SPME는 반드시 다시 합병을 추진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재판 없이 사람을 얼마나 잡아둘 수 있을 것 같나? 프랑스 정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네.”
“프랑스 정부는 절대 안 움직일 겁니다.”
“어째서?”
이런 일을 하면서 힘든 점 중 하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마치 내가 추리해낸 것처럼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난 그럴듯한 근거를 말해주었다.
“일단 데샹 대통령과 사이가 별로 안 좋으시잖아요.”
설마 귤화위지라는 말처럼, 프랑스에 있을 때 착하게 경영하던 사람이 일본으로 오자 갑자기 악마로 돌변해 직원을 잘랐겠는가?
그는 SPME에 있을 때도 정리해고와 공장폐쇄를 잘하기로 유명했다. 프랑스에서 그의 별명은 기요틴, 미국 지사에 있을 때는 불도저였다.
경영만 했다 하면 사람 목부터 자르고 공장을 밀어버렸으니…… 적절한 별명이다.
왠지 한국 노조는 강성이고 선진국 노조는 온건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프랑스 노조가 시위하는 거 보면 폭도가 따로 없는 수준이다.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발생했지만 그는 조금의 타협도 없이 밀어붙였다.
그 뒤치다꺼리를 한 사람이 당시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이었던 장 피에르 데샹.
당시 그는 사마라를 만나 호통을 치고 분노를 표했지만, 사마라는 코웃음을 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장관이 훗날 대통령이 될 줄은 몰랐겠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나를 구출하지 않을 거라고?”
“개인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니죠. 하지만 지금 회장님의 존재는 SPME와 키오노스, 더 나아가 프랑스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의 폭탄이나 다름없습니다. SPME는 심각한 경영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익의 상당 부분을 키오노스에서 들어오는 배당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만약 키오노스에 문제가 생겨 이익이 줄어들거나 적자로 돌아서면 SPME 상황은 더욱 악화될 테고, 이는 최대 주주인 프랑스 정부에게도 부담이죠.”
게다가 현재 프랑스와 일본은 안보 문제에서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일본이 프랑스 무기 도입까지 검토하고 있는 상황.
“누구도 지금 시점에서 폭탄이 터지는 걸 원치 않을 겁니다. 설사 터지더라도 최대한 늦게 터지길 바라겠죠.”
SPME와 키오노스의 합병을 막기 위해 사마라 회장을 체포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고 해도 공식화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만약 일본 정부가 키오노스를 지키기 위해 체포한 게 확실해진다면?
이때는 공식적인 외교 문제가 되고, 프랑스 정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국가 간의 분쟁으로까지 번질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 정부는 현재까지도 유감 표명만 했을 뿐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제가 폭로를 많이 해봐서 아는데, 폭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십니까?”
“뭔가?”
“타이밍입니다. 상대가 가장 취약한 시점에 가장 취약한 부분을 찔러야 효과가 크죠. 반대로 타이밍을 놓치면 아무리 강한 폭로라도 힘을 잃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회장님께서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1년만 지나도 위력은 반감될 테고, 3년쯤 지나면 아무 쓸모없어질 겁니다. 그때쯤이면 사이토 회장이 키오노스를 장악하고, 투자도 이뤄졌을 테니까요. 일본 정부는 그때까지 회장님을 이곳에 붙잡아 놓고만 있으면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똑똑한 사람인 만큼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던 것은 그래도 몇 달 안에 풀려날 거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
만약 그 희망이 사라진다면?
이때는 탈출밖에 답이 없다.
하지만 사마라 회장은 여전히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혹시 보석금이 아까우신 건 아니죠?”
“크흠.”
두 차례 보석으로 인해 낸 돈만 해도 20억 엔이다. 도망을 치게 되면 이 돈은 몰수당할 것이다.
“못 받은 퇴직금과 스톡옵션도 있네.”
그는 일본 경영자 중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것으로 유명했다.
비용 절감하겠다며 연봉 얼마 안 되는 직원들은 다 잘라놓고, 정작 본인은 수십억 엔을 가져간다며 엄청 욕먹었지.
물론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대충 60억 엔쯤 되나요?”
“그쯤 되네.”
“어차피 못 받을 돈이니 포기하세요.”
그는 탈출 이후 키오노스를 상대로 퇴직금과 스톡옵션 지급 소송을 낸다. 하지만 이 소송을 일본 정부가 받아줄 리 없다.
바로 기각시키고 한 푼도 주지 않았다.
“회장님께서 결심만 하신다면 일본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고민하는 듯하던 사마라 회장은 한참 후 입을 열었다
“일본을 탈출하면 어디로 가라는 건가? 설마 프랑스로 돌아가라는 건가?”
범죄자가 재판 도중 도망칠 경우, 해당 국가는 범죄인인도조약에 따라 송환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국가 간의 형법 체계가 어느 정도 맞아야 한다.
소매치기를 저지른 범죄자를 송환했더니 손목을 잘라버리면 안 되지 않겠나?
그런데 일본은 전세계에서 사형제를 유지하는 몇 안 되는 국가. 범죄인인도조약을 맺은 나라는 미국과 한국 단 둘뿐이다.
따라서 프랑스로 돌아간다고 해도 강제 송환 당할 일은 없겠지만…….
“프랑스는 안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프랑스 정부는 회장님의 편이 아닙니다. 송환을 당하지는 않더라도 거기서도 가택연금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요르단으로 가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친척들도 거기에 많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흐음.”
아마 내가 처음 탈출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요르단을 생각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