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이스케이프(Escape) (3)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반도체 공장 하나 짓는데 조 단위가 들어간다.
향후 운영비까지 생각하면 수조 원이 들어가는 만큼 입지선정이 매우 중요하다.
텍사스가 당장은 별문제 없어 보이지만, 몇 년 후에는 폭설과 저온으로 인해 전력수요가 폭증한다.
때문에 블랙아웃을 피하기 위해 겨울만 되면 반도체 공장을 멈춰 세우는 일이 벌어졌고, 그때마다 유성전자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러니 텍사스는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조지아를 추천했는지 궁금하겠지만······ 그냥 말해주면 재미없겠지?
이 정도는 혼자서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뭐······ 아니면 말고.
이야기는 다시 데이터센터 산업으로 돌아왔다.
유재호 회장이 말했다.
“데이터센터 진출을 발표하면 유성전자 주가가 크게 떨어질 겁니다.”
“어느 정도로 예상하시나요?”
“적으면 15퍼센트, 많으면 30퍼센트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유성전자 정도 되는 거대 기업이 30퍼센트가 떨어지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주가가 떨어질수록 주주들의 반대 여론은 더욱 거세질 테고.
“그때가 유성전자가 가장 싼 시점일 겁니다. 이번 기회에 사재를 털어 직접 매수하시는 건 어떤가요?”
경영자만큼 회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다. CEO가 자기 돈으로 주식을 사들인다면 시장은 호재로 인식할 것이다.
“제 사재라고 해봐야 현금은 얼마 안 됩니다.”
비자금을 제외하면 얼마 안 되긴 하겠지.
“대출을 받아서라도 매수하세요. 저희도 지원하겠습니다. 러시 펀드를 통해 최소 2퍼센트는 매수하겠습니다. PIF까지 따로 매수하면 5퍼센트 이상도 가능할 겁니다.”
5퍼센트면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이것만 해도 30조 원 규모다.
유성전자가 워낙 커야 말이지.
“회장님께서 최선을 다해 유성전자의 주가를 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결국 모든 주주들은 회장님을 지지할 겁니다.”
유재호 회장은 웃음을 지었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로군요.”
* * *
유재호 회장이 돌아간 뒤.
난 데이비드와 따로 얘기했다.
“사마라 회장 체포 사건에 대해 아시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꽤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까요.”
사마라 회장은 SPME와 키오노스 합병을 추진하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고,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긴급 체포됐다.
데이비드는 설명을 해주었다.
“프랑스 정부와 SPME조차 체포 사실을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을 정도였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건 내부고발자들과의 사법거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쿄지검은 약 1년 전부터 사이토 전무의 도움을 얻어 비위 사실을 수집했고, 구속영장을 신청해 전격적인 체포 작전을 벌였다.
“체포된 직후 인터뷰에서 사마라 회장은 자신의 무죄를 강하게 주장했지만 소용없었죠.”
그리고 석 달이 지난 후.
여러 차례 보석 신청 끝에 사마라 회장은 10억 엔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가택 연금, 감시카메라 설치, 접견 제한, 해외 도피 금지 등이 조건이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됐나요?”
사마라 회장은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갔을까? 아니면 풀려났을까?
놀랍게도 둘 다 아니다.
“현재까지도 재판은 열리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검찰은 ‘추가 혐의가 드러났다’, ‘보강 수사가 필요하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그저 계속 붙잡아놓고 있을 뿐이죠.”
“어째서요?”
“일단 프랑스 정부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겠죠. 게다가 재판을 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키오노스를 조사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해야 하는데, 잘못했다가는 기업이 휘청거리고 여론이 악화될 우려가 있습니다.”
사이토는 사마라 회장의 최측근.
비위에 가담을 했든 보고도 모른 척했든 비난을 피하기는 힘들다.
“가장 큰 문제는 일본 검찰이 주장하는 범죄 혐의가 전부 맞는다고 해도 이게 과연 긴급 체포를 하고 구속까지 할 만한 사안이냐는 겁니다. 예를 들어 횡령만 놓고 보면, 일본 검찰이 주장하는 액수를 다 더해봐야 9억 엔에 불과합니다.”
“하긴. 한국의 LK그룹 회장님께서 1조 원을 넘게 해드신 것에 비하면 우습지도 않은 액수네요.”
쪼잔한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대범해서 그 정도 금액은 횡령으로 치지도 않는다.
“이에 대해 국제적으로도 비판이 큽니다.”
21세기에 선진국이 재판도 하지 않고 구금만 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 싶지만······일본이라면 가능하다.
“일본 검찰의 행태는 유명하죠. 오죽하면 엔자이라는 용어까지 있겠어요?”
어쨌거나 여기까지는 모두가 아는 내용.
중요한 건 이다음에 벌어지는 일이다.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1년 6개월쯤 뒤.
사라마 회장은 요르단에서 기자회견을 열었고, 그 모습을 본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일본에 잡혀있는 줄로만 알았던 사마라 회장이 요르단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마치 특수작전이라도 벌이듯 일본을 탈출한 다음 제3국을 경유해 요르단으로 입국한 것이다.
요르단을 택한 이유는 그가 프랑스와 요르단 이중국적자이기 때문.
워낙 초유의 사건이었던 만큼 대대적인 언론 보도가 이뤄졌고, 향후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쿠데타가 성공하긴 했어도 아직 사이토 마사키가 사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다.
내부를 안정시키고 일본 정부의 투자를 이끌어내려면 앞으로 적어도 1년의 시간은 필요하다.
실제로 사마라 회장은 탈출 뒤 반격을 시도했지만, 사이토 회장 체제를 흔드는 것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지금 사마라 회장이 반격에 나서면 어떻게 될까요?”
“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큰 분란이 생길 겁니다.”
데이비드는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사마라 회장은 존재 자체가 폭탄이나 다름없습니다. 체포 배경에는 SPME와 키오노스라는 거대 반도체 기업 얼라이언스가 자리 잡고 있고, 그 뒤에는 각각 프랑스 정부와 일본 정부의 이권이 얽혀있으니까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본 정부가 사실상 불법에 가까운 형태로 구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상황.
“자칫 잘못했다가는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겠네요.”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요?”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일본 정부가 절대 풀어주지 않을 테니까요.”
난 슬쩍 말을 꺼냈다.
“만약 사마라 회장이 일본을 탈출한다면요?”
“그게 무슨······ 예?”
말을 하던 데이비드는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아니. 대체 뭘 하시려는 겁니까?”
* * *
사이토 마사키.
그는 재무대신을 역임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도쿄대를 졸업한 그는 버블 경제 시절 키오노스에 입사했다. 당시 일본은 모든 것이 최고였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통째로 살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고, 전 세계 시가총액 상위 자리를 일본 기업들이 차지했다.
그 선두에 일본 최대이자 세계 최대 종합전자기업 키오노스가 있었다.
가전사업부에 배속된 그는 집안의 후광과 본인의 능력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하지만······.
버블이 꺼지고 나자 민낯이 드러났다.
일본 기업들이 땅과 건물로 돈을 벌고 있는 사이, 한국과 중국 등 신흥국 기업들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어느 날, 해외출장으로 유성전자 공장을 둘러본 그는 깜짝 놀랐다. 유성전자는 수익을 전부 새로운 제품 개발과 생산 라인에 투자하고 있었다.
그는 본사로 돌아가 말했다.
“디스플레이의 흐름은 LCD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유성전자는 LCD 라인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키오노스 TV가 유성전자 TV에 밀릴지도 모릅니다.우리도 서둘러야 합니다.”
그의 말에 임원들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LCD는 생산비가 비싸고 화질과 밝기가 브라운관에 미치지 못한다. 키오노스는 이미 세계 최고 품질의 브라운관 TV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LCD에 투자하라는 건가?”
사이토는 기가 막혔다.
원래 신기술은 기존 기술보다 가격은 비싸고 성능은 떨어지기 마련. 자동차도 초창기에는 마차보다 비싸고 느렸다.
“LCD는 브라운관에 비해 얇고 가벼워 사용성이 뛰어납니다. 또한 브라운관은 크기를 키우는데 한계가 있지만 LCD는 얼마든지 크기를 키울 수 있습니다. 화질과 밝기는 시간이 지나면 개선될 겁니다.”
그러나 임원들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얇고 더 가볍고 더 화질 좋은 브라운관 TV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내놓은 TV는 세계 시장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런데 웃긴 건 일본에서는 꽤 잘 팔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LCD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했고, 브라운관 TV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자체 기술이 없던 키오노스는 유성전자로부터 패널을 받아쓰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오히려 잘못된 결정을 내렸던 이들은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 실패하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하고 있는 일만 계속하면 책임질 일도 없다.
매출과 점유율은 나날이 하락했지만, 종신고용과 연공서열로 인해 회사가 아무리 어려워져도 잘릴 걱정이 없다 보니 누구도 절박함을 가지지 않았다.
사이토는 절망에 빠졌다.
‘이대로라면 망한다.’
위기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모든 사업부가 비대해져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도 경영진은 막연하게 일본 정부의 지원책만 바라고 있었다.
이때 사마라 회장이 등장했다.
그는 강력한 구조조정과 공장폐쇄를 실시했다. 타성에 젖어있는 일본 경영자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직원들은 그를 악마라 불렀지만, 사이토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키오노스를 살리기 위해 온 구세주였다!
사마라 회장은 능력 없는 임직원을 잘라내는 한편, 능력 있는 직원들은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
그 과정에서 사이토는 사마라 회장의 오른팔이 됐다.
그는 평생 사마라 회장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일본 기업들은 새장에 안주해 있어. 이대로는 안 돼. 세계무대에서 당당하게 경쟁해야 돼.’
그의 목표는 키오노스가 다시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 서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일시적으로 SPME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키오노스가 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홀로서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SMPE의 경영 간섭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직원들 사이에서도 여기가 프랑스 기업인지 일본 기업인지 모르겠다는 푸념이 나올 정도였다.
그는 애써 현실을 부정했다.
‘두 회사는 어디까지나 전략적 제휴 관계일 뿐이야. 결코 기술을 빼가거나 합병을 할 생각은 없을 거야.’
그러던 어느 날 도쿄지검 검사들이 그에게 접근해왔다.
“사마라 회장은 합병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일본 기업은 프랑스에 팔려나가게 될 겁니다.”
“키오노스가 넘어가면 일본 반도체 산업은 끝장입니다.”
“이 문제만 해결된다면 일본 정부가 키오노스를 적극 지원할 겁니다.”
이 말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키오노스는 일본 반도체의 유일한 희망이다.
존경하는 스승을 배신하고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했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회장의 비위 사실을 수집해서 검찰에 넘겼다.
사마라 회장이 체포된 뒤.
사실관계가 밝혀진 것도 아니고 범죄혐의가 입증된 것도 아니지만, 그는 기자회견을 열어 사마라 회장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여기에는 범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경영에 대한 비판도 포함됐다.
“사마라 회장은 잘못된 경영으로 살릴 수 있는 사업부까지 매각해 키오노스를 망가뜨렸습니다. 또한 해고된 직원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사이 매년 30억 엔의 연봉과 스톡옵션을 챙겼습니다.”
사마라 회장이 조사를 받는 사이 그는 대숙청을 단행했다.
긴급 이사회를 열어 사마라 회장을 해임하고 SPME가 파견한 외국인 임원들을 전부 잘라냈다.
불과 사흘 안에 벌어진 일이다 보니, SPME는 우왕좌왕할 뿐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회장 자리에 오른 사이토는 일부 해고된 직원들을 다시 채용하겠다고 해 노조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한편, 오자와 시모쿠 관방장관을 만나 정부 지원을 요청했고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사마라 회장이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그는 연락을 하지도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바로 일본 반도체의 부흥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 지원으로 키오노스 덩치를 키워 SMPE와의 관계를 끊어내야 했다.
마침 세계는 반도체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고, 이는 일본 반도체가 비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비록 조국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그는 자신의 행동이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10년······ 10년이면 충분해.’
모든 일을 마무리한 뒤, 그는 스스로 회장직에서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회장님을 찾아뵙고 무릎 꿇고 사죄드릴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