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레전드게임즈 (6)
우리는 그 뒤로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
스콧 CEO는 레전드게임즈의 명확한 비전과 함께 30퍼센트 수수료에 대한 분노를 계속해서 쏟아냈다.
“30퍼센트가 말이 됩니까, 30퍼센트가? 대체 뭘 한다고 30퍼센트를 받아갑니까? 대기업이면 이래도 됩니까? 이게 다리를 중간에서 막고 통행료를 요구하는 날강도들과 뭐가 다릅니까? 대체 무슨 근거로 그들이 통행료를 요구합니까?”
“그 다리를 날강도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다리 안 쓰고 헤엄쳐서 건너겠다는데, 그건 왜 막습니까?”
“글쎄요.”
강도 자기들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엔플은 항상 자신들을 독점 기업과 싸우는 혁신가들처럼 포장해왔지만, 지금은 그들이 독점 기업이 됐습니다. 구블 역시 처음에는 ‘악해지지 말자’라는 표어를 내세웠지만, 지금은 어느 기업보다도 악해졌죠.”
하기야, 이 정도 분노는 있어야 엔플하고 맞짱을 뜰 수 있는 것이다.
난 같이 욕하며 전의를 다졌다.
“적극 공감합니다.”
스콧 CEO는 반색했다.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 겁니까?”
“그럼요!”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
그야 정상적인 투자자라면 ‘다른 사람들 다 가만히 있는데 왜 니가 나서냐’라며 뜯어 말렸을 테니까.
하지만 난 다르다.
“힘을 합쳐 날강도들과 싸웁시다.”
* * *
계약까지는 일사천리였다.
난 계약서를 들고 레전드게임즈를 나왔다.
퍼플게임즈에 이어 레전드게임즈라니!
이걸로 게임 개발부터 유통, 판매까지 모든 게 갖춰졌다. 게임 산업에 대한 완벽한 토대를 마련했다랄까?
여기서 또 스노우 크래시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실상 컨티뉴 캐피탈의 모든 투자는 스노우 크래시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클라우드는 모든 산업의 근간이니까.
그리고 스노우 크래시의 중심은 바로 시드 루카스.
애초에 얘가 없으면 아무 일도 진행이 안 된다.
난 시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형.]
“할 얘기가 있는데······.”
[무슨 얘기인지 알아요. 그것 때문에 연락한 거죠?]
“으응?”
[내일이 바로 그날이잖아요.]
“그, 그날?”
순간, 당황했다.
내일이 무슨 날이지?
내 생일은 아니고, 설마 시드 생일인가? 아니면, 스노우 크래시 창립기념일?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케이크랑 꽃다발이라도 보내야 하나?
두뇌를 풀가동하는데, 시드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좀비네이도2가 출시되는 날이잖아요!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 아니에요?]
“그, 그렇지. 역시 알고 있었구나.”
[당연하죠.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그러고 보니 출시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긴 하다.
대체 뭔 영화를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만들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프리즈너 기준에서는 이것도 나름 심혈을 기울인 거다.
그래서 좀비네이도 팬들은 더더욱 기대 중이라고 한다.
[며칠 전부터 설레서 잠도 잘 못 잤어요.]
“어, 나도.”
이게 뭐라고 잠도 못 잘 정도라니.
[그런데 형은 지금 어디예요?]
“사우스캐롤라이나.”
[거기는 무슨 일로요?]
“아! 방금 전 레전드게임즈를 인수했어.”
[그렇군요. 그보다 좀비네이도2 너무 기대되지 않아요?]
“으응.”
반응이 왜 이래?
좀비네이도2 출시에 비한다면 레전드게임즈 인수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고마워요. 전부 형 덕분이에요.]
“응? 내 덕이라니?”
[형이 투자하지 않았으면 좀비네이도2는 못 나왔을 거 아니에요?]
“······.”
아니야. 내가 투자하지 않았어도 좀비네이도2는 잘만 나왔어.
하지만 난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긴 하지.”
[형이 좀비네이도 팬이라서 다행이에요.]
“그, 그럼. 나만 한 팬도 없지.”
[그래도 좀 아쉬워요.]
“뭐가?”
[영화관 개봉을 안 한다는 게요. 큰 화면으로 보고 싶었는데.]
1편과 마찬가지로 저예산 B급 영화답게 바로 DVD와 OTT로 직행이다.
대관해서 틀어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상영하는 영화를 보러 가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 들기 마련.
영화는 다 같이 봐야 재밌는 것 아니겠나?
“그럼 형이 영화관에서 개봉할 수 있도록 한번 힘써볼게.”
시드는 반색했다.
[정말요?]
“응.”
어차피 내가 힘쓰지 않아도 좀비 매니아들 사이에서 컬트적 인기를 끌며 알아서 극장 개봉 하게 되어 있다.
“그보다 부탁할 게 좀 있는데······.”
[뭔데요?]
“레전드게임즈에서 운영하는 레전드스토어가 너무 엉망이라서. 니가 손을 좀 봐줘야 할 것 같아.”
가뜩이나 지금 시드 앞에 쌓여있는 일감이 어마어마하다. 여기에다가 추가로 일감을 던져준다고 하면 쌍욕 박고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시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요. 그런데 정말로 극장 개봉할 거예요?]
“그럼. 그때까지 아무 걱정 말고 열심히 일하고 있어.”
[네!]
난 전화를 끊으며 생각했다.
프리즈너에 투자 안 했으면 어쩔 뻔.
* * *
[(WST 단독) 사우디 국부펀드, 컨티뉴 캐피탈과 함께 러시 펀드 설립!]
(전략) PIF는 컨티뉴 캐피탈과 손을 잡고 500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국부펀드가 생긴 지 1년도 안 된 신생 투자사와 공동 펀드를 만드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그만큼 컨티뉴 캐피탈의 자산 운용능력을 높게 평가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국부펀드들이 높은 수익률보다 안정적인 운용을 목표로 하지만, 러시 펀드는 기술주와 스타트업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를 예고했다.
시작은 컨티뉴 캐피탈이 보유한 넥스트로젠이라는 수소차 스타트업과 블랙우드 인터내셔널의 주식 매입이다.
펀드의 정확한 투자 비율이 밝혀지지 않은 만큼, 컨티뉴 캐피탈이 투자금을 주식으로 대납했을 가능성도 예상해 볼 수 있다.
러시 펀드 핵심 관계자는 운용성과에 따라 향후 펀드 규모를 늘릴 수 있다고 밝혔다.
(후략)
* * *
난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왔다.
왠지 되게 오랜만에 온 것 같은 느낌인데.
마침 배가 고프기도 하고 인사도 할 겸 바로 오코너 펍으로 향했다.
실리콘밸리에서의 오코너 버거의 인기가 알려진 후, 뉴욕에서도 오코너 버거 열풍이 불었다.
줄이 길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줄은 없었다. 대신 가게 문도 닫혀 있었다. 문 앞에는 ‘당분간 휴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난 트리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코너 펍 닫혀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
[지금 뉴욕이에요?]
“예.”
[근처에 있으니까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그 옆의 카페에서 잠시만 기다려요.]
“알았어요.”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는데 트리시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굳이 뛰어올 것까지는 없는데.
난 미리 시켜놓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
“이거부터 마셔요.”
그녀는 몇 모금 마시고 숨을 돌린 다음 말했다.
“언제 돌아온 거예요?”
“방금요.”
“저보다 일찍 돌아올 줄 알았는데.”
“중간에 들러야 할 곳이 좀 있었어요.”
그녀는 스노우 크래시와 시드에 대한 취재를 끝마친 다음 나보다 먼저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오코너 펍은 왜 휴무예요?”
“SNS 안 봤어요? 아빠 지금 캘리포니아로 갔는데.”
“무슨 일로요?”
“오빠랑 같이 푸드트럭 타고 돌아다니는 중이에요.”
“예?”
“프랜차이즈 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한다고, 같이 다니며 모자란 부분을 확실하게 가르치고 오겠다고 하셨어요.”
난 숀이 오코너 버거를 만들던 모습을 떠올렸다.
“거기서 더 가르칠 게 있나요?”
트리시는 생긋 웃었다.
“제가 듣기에도 핑계고, 그냥 오빠랑 같이 푸드트럭 타고 여행을 다니고 싶었던 것 같아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하기야 앞으로는 미칠 듯이 바빠질 테니.
그나저나 이것도 1회차 때는 없었던 일 같은데. 혹시 내가 투자하는 바람에 뭔가 달라진 건가?
뭐, 내 덕에 부자 사이가 돈독해졌으면 그걸로 좋은 거겠지.
“덕분에 스노우 크래시 취재와 루카스 CEO 인터뷰는 잘 했어요. 지금 특집으로 내려고 정리 중이니까 기사 나가게 되면 바로 보내드릴게요.”
“아까 올라온 기사는 잘 봤어요.”
“안 그래도 러시 펀드 발표 때문에 월스트리트가 시끌시끌해요. 다들 컨티뉴 캐피탈이 무슨 수로 사우디 국부펀드 자금을 유치한 건지 궁금해하던데요.”
트리시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혹시 사라 씨랑은 무슨 사이에요?”
“일 때문에 만난 사이죠.”
“그게 다예요?”
“예. 그런데 그건 왜······?”
혹시 기사 쓸 때 필요한가?
내 말에 트리시는 웃으며 얼버무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배고프죠? 밥 먹으러 가요. 제가 살게요.”
* * *
트리시와 밥을 먹고 헤어진 다음 걸어서 컨티뉴 캐피탈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나를 향해 반갑게 소리쳤다.
“미루야!”
마치 납치돼 염전에서 강제 노역하다가 구출하러 온 사람을 본 것 같은 표정이다. 옆에는 김범석도 함께였다.
“어! 선배 여기 있었네요.”
그러자 동호 선배는 당황하며 말했다.
“무, 무슨 소리야? 너 설마 우리를 까먹고 있었던 건 아니지?”
“······.”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다.
난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항상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그렇지? 혹시 여기 버리고 갈 생각은 아니었지?”
“······그럼요.”
하마터면 버리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갈 뻔.
“일은 잘 배웠어요?”
“그보다는 영어부터 배웠어. 그동안 내가 쓴 영어는 쓰레기라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어.”
김범석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잘했어요.”
영어 잘하면 좋은 거지.
그렇다고 일을 아예 안 배운 건 아니다. 두 사람 다 투자는 물론이고 조직 관리에 대해 철저하게 교육받았으니까.
나 없어도 한국 지사가 잘 돌아가게 만들어 놔야지.
동호 선배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 온 거야? 평생 여기 갇혀서 버거형들이랑 일해야 하는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
“고생했어요.”
하기야 말도 잘 안 통하는 사람들하고 일하느라 고생이 많았겠지.
“니가 밖에서 일 하나 터트릴 때마다 여기 사람들이 얼마나 갈려나갔는지 알아?”
“다 알아요.”
“알긴 뭘 알아? 나 너무 힘들어.”
“그래서 제가 이렇게 왔잖아요.”
울먹거리는 동호 선배를 달래주는데, 데이비드가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다이어트 했어요? 그사이 살이 좀 빠진 것 같네요.”
데이비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이 좀 많았어야 말이죠. 블랙우드 주가가 움직일 때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다른 직원들 역시 잔뜩 지친 모습이었다.
하기야 미래를 알고 있는 나와는 달리 다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각종 계약을 처리해야 했다. 다른 투자사가 1년 동안 할 일을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몰아서 한 셈이니.
우리는 미팅실에 앉아 그동안의 얘기를 나눴다.
“공동 펀드 설립은 끝냈고, 미리 얘기했던 대로 넥스트로젠 지분과 블랙우드 인터내셔널 지분을 매각했습니다.”
장내매도가 아닌 블록딜이라고 해도 매도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제까지 컨티뉴 캐피탈의 투자가 성공했던 만큼 매도는 악재로 받아들일 위험이 크다. 하지만 사람들은 펀드 투자금을 주식으로 대납한 걸로 인식했고, 덕분에 주가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반응은 어때요?”
“월스트리트 전체가 충격받았습니다. PIF의 위탁을 받기 위해 수주전을 벌이고 있었던 곳들은 망연자실하고 있구요.”
국부펀드나 연기금의 경우 많게는 1조 달러가 넘는 자금을 운용한다.
이 금액을 부동산과 주식, 채권, 원자재 등에 고루 나눠서 투자하는데, 일부만 직접 운용하고 나머지는 IB와 PE에 위탁을 맡긴다.
금융계 최고의 전문가들은 다들 그쪽에 있기 마련이니.
워낙 자금 규모가 크다 보니 투자사들 사이에서는 일감을 따내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다.
그런데 사우디 국부펀드가 직접 투자를 위해 컨티뉴 캐피탈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이는 그만큼 다른 투자사들의 일감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알렉스 프레스턴에게 1차 잔금 80억 달러 지불을 끝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별 말 없던데요.”
요즘 스노우 크래시가 잘나가는 걸 보면 속으로는 배가 좀 아프지 않을까?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팔기 싫었는데 강탈을 당한 셈이었다.
데이비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처음 스노우 크래시를 인수했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그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무사히 잔금까지 치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난 피식 웃었다.
“아직 한 차례 더 남았잖아요.”
6개월 후에는 또 80억 달러를 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다시 열심히 벌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