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랜섬웨어 (4)
술잔을 든 여성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뭐야? 왜 여기 있어?”
“아까부터 앉아서 핸드폰만 하고 있네.”
해리 프랭크는 고개를 들었다. 매력적인 여성들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평소 파티에서 자주 만나는 이들이었다.
“아! 잠깐 급한 일 때문에.”
“왜? 회사에 무슨 일 생겼어?”
“그런 건 아니고.”
범죄로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봐야 쓰지 못하면 소용없다.
소득은 없는데 돈을 펑펑 쓰고 다닌다면 누가 봐도 이상하기 마련. 그러나 암호화폐는 그러한 부분까지 쉽게 해결해주었다.
복잡한 돈세탁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거래소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는 것만으로도 마치 암호화폐 투자를 통해 번 것으로 위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예 암호화폐 전문 투자회사를 차렸다.
암호화폐로 큰돈을 번 부호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탄생했다. 덕분에 지금처럼 호화스럽게 살아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여성이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일 그만하고 우리랑 놀자. 이건 압수.”
아직 메시지앱이 켜져 있는 상태였다.
깜짝 놀란 해리 프랭크는 벌떡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다시 빼앗았다.
“뭐 하는 짓이야? 왜 남의 핸드폰을 멋대로 만져?”
버럭 화를 내자 여자는 당황했다.
“아! 미, 미안. 장난이었어.”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해리 프랭크는 자신이 과민반응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웃으며 말했다.
“미안. 급한 얘기 중이었어. 술 마실래?”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복잡한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파티를 즐기기로 했다.
한창 술을 마시며 춤을 추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정장을 입은 3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서서 물었다.
“해리 프랭크 씨 되십니까?”
그는 여성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오! 멋진데.’
이제까지 만난 여자들과는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맞습니다. 무슨 일이죠?”
그에게 말을 거는 여자들은 많았다. 왜냐하면 그는 잘나가는 투자회사 CEO니까.
여성은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FBI에서 나왔습니다.”
“뭐?”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술기운 때문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여기서 FBI가 왜 나와?’
그동안 영화에서 봤던 FBI는 건장한 남자들이 총부터 들이밀며 소리쳤던 것 같은데.
잠시 당황하던 그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아! 혹시 스트리퍼? 경찰이 아니라 FBI 컨셉인가? 누가 불러서 왔어요?”
그녀는 대답 대신 허리춤에서 수갑을 꺼내들었다.
“해리 프랭크 씨. 당신을 테러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그의 손에 차가운 수갑이 채워졌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다 같이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를 질렀다.
“와우!”
“소리 질러!”
해리 프랭크는 그녀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그럼 이제부터 섹시한 FBI 누님한테 혼나는 건가요?”
여성은 웃으며 말했다.
“예. 많이 혼나게 될 겁니다, 미스터 넷워커.”
그 말에 술이 확 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그게 무슨······?”
어느새 정장을 입은 남자 셋이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다들 건장한 남성이었다. 이번에는 영화에서 봤던 FBI의 외모와 비슷했다.
온몸의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수갑을 빼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호우!”
“벗어라! 벗어라!”
사람들은 여전히 이게 쇼인 줄 알고 신나서 소리쳤다.
프랭크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해왔다. 그가 넷워커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추적당할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범죄에도 거침이 없었다. 실제로 수사기관들이 1년 넘게 수사하는 동안 그의 흔적조차 잡지 못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 순간, 아까 이번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설마 시드 루카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넷워커를 추적했다고 해도 나인 걸 알아낼 방법은 없을 텐데.’
FBI 수사관들은 그의 양쪽 팔을 붙들었다.
“가시죠.”
이것 역시 쇼의 일부라고 생각했는지 주변의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퍼뜩 정신을 차린 해리 프랭크는 끌려 나가며 소리쳤다.
“자, 잠깐! 사람을 이런 식으로 멋대로 체포해도 되는 거야?”
“테러 현행범은 상관없습니다.”
테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새삼 상황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테러범? 내가 왜 테러범이야?”
“사이버테러를 저질렀으니까요.”
“뭐? 사이버테러? 난 그저······.”
‘악성코드로 서버를 망가뜨리고 돈을 뜯어냈을 뿐인데.’
그는 뒷말을 삼켰다.
“변호사! 변호사를 불러줘.”
소리치는 그에게 FBI 수사관 타냐 우드필은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좋은 변호사 고용해야 할 겁니다. 앞으로 남은 평생을 교도소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 * *
FBI와 NSA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바로 맥스코인 거래소에 영장을 보내 연결된 계좌를 확보했고, 다시 해당 금융사에 연락해 이를 추적했다.
만약 돈을 해외계좌로 보내는 등 몇 차례 돈세탁을 거쳤다면 추적이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미국 내 법인계좌였다.
굳이 복잡한 돈세탁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유는 전자지갑이 털릴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소를 알아낸 FBI는 바로 해당 장소로 쳐들어갔다.
넷워커를 붙잡고 나자 나머지 일은 쉽게 풀렸다. 그레이트넷 조직원들은 넷워커의 정체를 모르지만, 넷워커는 조직원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FBI는 일제히 검거작전을 펼쳤다.
* * *
난 수사가 진행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모나앱에서 주고받은 메시지를 바탕으로 당사자들을 특정했고, 그레이트넷 조직원들은 줄줄이 잡히는 신세가 됐다.
조사관들이 시드를 보는 시선은 거의 존경에 가까웠다.
“혹시 어떤 방식으로 해킹을 푼 겁니까?”
“제발 알려주시면 안 되나요?”
“궁금해서 죽을 것 같은데, 힌트라도 좀······.”
몇몇은 귀찮게 달라붙으며 어떻게 해킹한 건지 끈질기게 물어봤다. 그 모습이 마치 마술사에게 마술트릭 알려달라고 조르는 어린애 같다.
그러나 시드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나 역시 궁금해서 둘만 있는 자리에서 시드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해킹한 거야? 모나앱은 절대 해킹이 불가능한 거 아니었어?”
시드가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말해 정말로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실로 엄청난 일이다.
모나앱의 모든 메시지는 암호화돼서 전송되고 한번 지워지면 복원도 불가능하다.
현존하는 모든 메시지앱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보안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온갖 범죄자들과 난다 긴다 하는 해커들도 믿고 사용한 거고.
그간 수사기관의 온갖 전문가들이 달려들어 뚫어보려 노력했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그런데 그걸 시드 혼자서 해낸 것이다.
아무리 천재여도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신기하다.
시드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음, 비밀인데.”
“그래?”
하기야 자신만의 특별한 노하우 같은 게 있다면 말해주고 싶지 않겠지. 사실 설명해준다고 해도 알아들을 자신도 없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아마 FBI와 NSA에서 앞으로도 수사에 쓰고 싶다고 해킹툴을 달라고 요구할 거야.”
이건 굳이 1회차 때 본 게 아니더라도 누구나 쉽게 예상 가능한 일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좋은 걸 한번 쓰고 버릴 리 없겠지.
해킹툴은 일종의 만능키.
이걸 남한테 넘긴다고 하면 거부감이 들 것이다.
그런데 시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저한테 와서 비슷한 얘기를 하던데요.”
“그래?”
이놈들이 벌써 접근해왔단 말이지?
“니 생각은 어떤데?”
“그냥 줘요.”
“진짜?”
“예. 상관없어요. 좋은 일에 쓰는 건데요.”
1회차 때도 모나앱 해킹툴을 수사기관에 제공해줬던 만큼 승낙할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쉬운데.
롤프 부치는 자기 명성을 위해 그냥 넘겨줬던 것 같지만 나는 다르다.
“그럼 내가 협상해도 될까?”
시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예. 그럼 형한테 맡길게요.”
* * *
넷워커를 체포하자, 블랙우드 서버의 복호화키가 넘어왔다.
“와우!”
“좋았어!”
다들 환호를 했지만 아직 일이 끝난 건 아니다.
테일러 회장이 물었다.
“서버 정상화에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더든 CIO가 말했다.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드의 말은 달랐다.
“하루면 충분해요.”
테일러 회장은 반색했다.
“정말인가?”
시드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테일러 회장은 다른 직원들을 보며 호통을 치듯 말했다.
“다들 뭐 하고 있나? 어서 루카스 CEO를 도와서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고?”
* * *
서버 복호화를 진행하는 사이.
난 FBI와 NSA 조사관들을 따로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처음과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 같은 모습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사기꾼 취급하는 느낌이었는데 말이지.
리드 조사관이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약간은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윌튼 조사관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 안에 해결한다는 말도 믿지 않았구요.”
만약 내가 다른 마음을 품은 거라면 옆에서 지켜보는 게 가장 확실하기 때문에 의심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받아들인 거겠지.
“뭘요. 이제라도 의심이 풀렸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실력으로 서버를 풀었다고 해도 자작극에 대한 의심은 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은 그레이트넷 일당들을 전부 체포하며 깔끔하게 해소됐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지만, 두 사람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축하드립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돌아가시면 승진하실 거 아닙니까?”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동안 랜섬웨어 사건에 대해 공동수사를 벌여왔지만. 실제 범죄자를 붙잡은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무리 추적이 힘들다고 항변해 봐야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결과다.
세금 받고 하는 일이 뭐냐며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졌다.
그동안 줄기차게 허탕만 쳤는데, 이번에는 주범과 조직원 일망타진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것이다!
“아, 네.”
“뭐, 그거야 위에서 결정할 일이죠. 하하.”
본부에서는 지금 신나게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있을 테니, 진급과 표창은 따놓은 당상이다.
그래서 이렇게 표정이 좋은 거겠지.
난 그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또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역시나 할 말이 있어서 자리를 갖자고 한 거였는지, 리드 조사관과 윌튼 조사관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교환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리드 조사관.
“당분간 모나앱을 해킹한 사실을 비밀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말인가요?”
“아시겠지만 모나앱은 범죄조직들의 필수 앱입니다.”
윌튼 조사관이 말을 이었다.
“그중에는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테러범이나, 마약 카르텔도 있습니다. 모나앱을 해킹할 수 있으면 그들을 수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난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러니까 해킹 사실을 숨긴 채 지속적으로 모나앱 사용자들의 정보를 빼내 수사에 활용하고 싶다는 거군요.”
내 말에 그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난 감탄했다.
“와! 역시 전문가들이라서 다르시네요. 하긴, 해킹에 성공한 게 알려지면 다들 모나를 안 쓰고 다른 메시지앱으로 갈아탈 테니까요.”
모나앱 해킹은 누구도 상상도 못했던 일.
해킹 사실을 아직 언론도 모르고, 범죄조직들도 모른다. 이대로 한번 써먹고 끝내기에는 아깝겠지.
“좋습니다. 수사에 필요한 일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두 사람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인가요?”
“예. 해킹 사실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난 그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야 해킹에 성공했지만, FBI와 NSA는 쉽지 않을 텐데. 루카스 CEO가 해킹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해킹하지 못했잖아요. 그래도 한번 열심히 해보세요. 응원하겠습니다.
내 말에 두 사람은 당황했다.
“예?”
“그게 무슨······.”
난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어디서 남이 만든 해킹툴을 공짜로 먹으려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