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블랙우드 인터내셔널 (4)
블랙우드 본사에 도착하니, 로비에서부터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곳곳에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난 안내데스크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방문객을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다.
“피터 테일러 회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내 말에 직원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가뜩이나 정신없는데 회장을 왜 찾나 싶겠지.
“미리 약속하셨습니까?”
“아니요. 약속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직원은 바로 거절했다.
“그럼 약속을 하시고 나중에 다시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꼭 만나야 합니다.”
“연락처 남기고 가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일단 돌아가 주십시오.”
“이번 랜섬웨어 사태의 해결 방법에 대해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예?”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회장님을 뵈어야 합니다.”
놀란 직원이 손짓하자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리를 포위하듯 다가왔다.
한 남자가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누구세요?”
내 물음에 남자는 말 없이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오! FBI.
그러고는 나에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굽니까?”
랜섬웨어를 당한 회사에 찾아와 해결해주겠다고 하니 수상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하겠지.
난 명함을 내밀었다.
“컨티뉴 캐피탈에서 나왔습니다.”
* * *
우리는 신원 확인을 거친 다음 미팅룸으로 안내되었다.
기다리는 동안 심심한지 시드는 노트북을 열고 영상을 켰다. 뭔가 해서 보니까 좀비가 나오는 드라마다.
“······.”
얘는 왜 이렇게 좀비를 좋아하는 걸까?
1회차 때도 시드의 좀비 사랑은 유명했다. 오죽하면 좀비네이도 제작을 위해 VR과 CG제작 프로그램까지 만들어줬겠는가?
난 슬쩍 물어보았다.
“좀비가 왜 좋아?”
시드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형은 좀비 안 좋아해요?”
“아! 물론 좋아하지.”
사실은 안 좋아한다. 아니, 싫어한다.
대체 시체가 걸어 다니는 걸 왜 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시드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음, 좀비들은 생각을 안 하잖아요.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
“······.”
천재의 취향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시드는 헤드폰을 쓰고 드라마를 봤다.
난 데이비드가 보내준 블랙우드 인터내셔널 CEO에 대한 자료를 다시 훑어보았다.
21세기에 들어서며 블랙우드 인터내셔널은 여러 문제에 부딪혔다.
기존에 지어놓은 호텔들은 노후화됐고, 서비스의 질은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금융위기가 터지며 고급 호텔을 찾는 수요는 대폭 줄어들었다.
어려움을 겪던 블랙우드 가문은 전문경영인을 영입했다.
바로 피터 테일러다.
새로 등장한 전문경영인은 시스템 개혁을 시작했다. 먼저 다른 호텔들이 긴축할 때 오히려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고객이 줄어든 지금이야말로 노후화된 호텔들을 리모델링 할 적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리치칼톤의 지분을 인수해 자회사로 편입하며 회사 덩치를 더욱 키웠다.
예상대로 금융위기가 끝나고 나자 세계 경제는 빠른 회복세에 접어들었고, 여행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고급화와 함께 컨벤션 유치도 신경 쓴 덕분에, 블랙우드 호텔은 각종 국제 행사와 함께 정상회담 등의 장소로 활용되며 더욱 유명세를 떨쳤다.
그는 발 빠르게 디지털 전환까지 성공하며, 작년에는 포브스가 뽑은 열 명의 CEO 중 한 명으로 뽑히기도 했다.
훌륭한 경영 덕분에 주가는 두 배 이상 오르며 주주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번 일로 인해 다시 원래 주가로 돌아가긴 했지만.
잠시 후, 60대 중반의 백인 노인이 등장했다.
노인이라고는 해도 키가 190센티가 넘는 거구다.
난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컨티뉴 캐피탈의 대표 한미루라고 합니다.”
테일러 회장은 나를 보며 말했다.
“대표는 데이비드 록허트로 알고 있는데.”
“공동대표입니다.”
그는 내 옆을 슬쩍 보았다. 시드는 사람이 온 걸 모르는지 헤드폰을 낀 채 계속 좀비 드라마 감상 중이었다.
“아! 이쪽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크흠.”
우리는 인사를 끝낸 다음 자리에 앉았다.
테일러 회장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딱히 반기는 태도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컨티뉴 캐피탈은 블랙우드가 공식 입장을 내기도 전에 랜섬웨어임을 폭로해 주가를 폭락시켰고,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무려 시총 250억 달러가 날아갔다.
아마 주주들에게 해명하느라 진땀 좀 뺐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아니었어도 랜섬웨어는 알려졌고, 주가는 폭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컨티뉴 캐피탈로 인해 더 빨리 알려졌고 더 많이 폭락한 건 사실.
CEO 입장에서는 이가 갈릴 수밖에.
“전해 들으셨겠지만, 랜섬웨어 해결을 도와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도와주러 왔다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저희를 못 믿을 이유가 있나요?”
테일러 회장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컨티뉴 캐피탈이 언론에 기사를 내고 공매도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지 않았나? 설마 부인하지는 않겠지?”
난 솔직하게 인정했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하지만 저희가 아니어도 어차피 밝혀질 일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지금 잘못이 없다는 건가?”
“저희가 밝힌 내용에 거짓이 있었나요? 저희는 진실만을 말했을 뿐입니다.”
내 말에 그는 소리치듯 말했다.
“고객정보 유출이 있었다고 헛소문을 퍼트리지 않았나?”
“블랙우드 인터내셔널 고객정보가 유출됐다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랜섬웨어 공격을 당했을 때 그런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다고 말한 것뿐이죠.”
“뭐라고?”
난 송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그 기사를 본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었겠네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테일러 회장은 기가 차는지 나를 쏘아보았다.
“하나 묻지. 대체 랜섬웨어인 걸 어떻게 알았나? 우리 회사에 스파이를 심어놓은 것은 아닐 테고.”
난 농담처럼 말했다.
“설마 저희가 해커조직과 관련이 있는지 의심하시는 건 아니시죠?”
어떤 놈들이 공격했는지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쯤이면 이름을 밝히고 돈을 요구했을 테니까.
“의심할지 말지는 대답을 들어보고 판단하겠네.”
“아시다시피 컨티뉴 캐피탈은 스노우 크래시의 최대 주주입니다. 루카스 CEO가 상황을 살펴보더니 랜섬웨어인 것 같다고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그게 끝입니다.”
내 말에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만 믿고 그런 짓을 벌였다고?”
“예.”
사실 우리가 한 일은 꽤나 리스크가 있는 일이었다. 까딱 잘못했으면 돈은 돈대로 날리고, 주가조작을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죄로 잡혀갔을 테니.
난 그에게 물었다.
“서버를 공격한 해커조직은 어디입니까?”
“말해줄 거라고 생각하나?”
“언론들은 그레이트넷을 지목하는 것 같던데요.”
“······.”
사실이 알려진 이후 여러 해커조직의 이름이 나왔다.
랜섬웨어를 하는 해커조직은 많지만, 이 정도로 큰 규모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곳은 열 곳이 안 된다.
언론들은 대부분 그레이트넷을 지목했다. 왜냐하면 여기가 요즘 가장 핫(?)한 곳이니까.
얼마 전, 통신회사 서버를 해킹해 메릴랜드 일대 통신을 마비시켰고, 그 일로 인해 국가공인 테러단체로 지정됐다.
그래서 FBI와 NSA까지 출동한 거겠지.
“저쪽에서 요구하는 금액은 얼만가요?”
“그건 왜 묻나? 대신 내줄 것도 아니면서.”
“그냥 궁금해서요.”
어차피 알려질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테일러 회장은 순순히 말해주었다.
“3억 달러네.”
“······.”
사람을 납치해도 몸값 100만 달러 받기가 힘들다. 그런데 데이터를 납치하면 이런 엄청난 금액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남는 장사가 또 있을까?
금액을 듣고 나니 요즘 랜섬웨어가 왜 이렇게 판을 치는지 이해가 된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괴롭고 자괴감이 들어 당장 해적질 때려치우고 컴퓨터 학원에 등록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어쨌거나 3억 달러가 엄청난 금액이긴 해도 데이터를 날리느니 돈을 내는 게 낫다.
실제로 대부분의 랜섬웨어 사건은 몸값을 지불하고 끝난다.
그럼 적당히 깎아서 바로 지불해 해결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그레이트넷이 테러단체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 돈을 건네준다는 건 테러행위를 지원하는 셈이나 다름없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지만 기업 이미지에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둘째는 제대로 복호화를 시켜줄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번 사건만 해도 그레이트넷은 랜섬웨어를 풀어주며 케이블 터널 지도를 빼갔다. 만약 랜섬웨어를 해결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고객정보가 빠져나가면 끝장이다.
셋째는 어차피 키를 넘겨받더라도 서버 정상화에는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지난번의 경우 두 차례에 걸쳐 절반씩 복호화를 진행했고, 기간은 총 일주일이 걸렸다.
“지불은 당연히 암호화폐로 이뤄지겠네요. 그런데 돈을 준다고 랜섬웨어를 풀어준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만약 돈만 받고 키를 주지 않거나, 돈을 추가로 요구하면 그땐 어떻게 하실 겁니까?”
테일러 회장은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가?”
난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무슨 뜻인가?”
“사흘만 주십시오.”
테일러 회장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무슨 말이지?”
“사흘 안에 저희가 이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난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저희한테는 루카스 CEO라는 세계 최고의 프로그래머와 미미르라는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있습니다.”
디지털 전환과 클라우드에 관심이 많은 만큼 시드 루카스의 명성에 대해서는 들어봤을 것이다.
역시나 테일러 회장은 관심을 나타냈다.
“루카스 CEO를 데려오겠다는 건가?”
“이 자리에 같이 와있습니다.”
“뭐라고?”
난 옆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는 시드를 가리켰다.
“자, 잠깐. 이 청년이 시드 루카스라고?”
“그렇습니다.”
더더욱 믿음이 안 간다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외모만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청년이니까.
“온갖 전문가들이 달려들어도 안 되는 일을 한 명이 더 나선다고 해결되겠나?”
뭐,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사흘 안에 반드시 블랙우드 인터내셔널 서버를 정상으로 돌려놓겠습니다.”
“실패한다면?”
“그럼 저희가 3억 달러를 대신 지불하겠습니다.”
“······뭐?”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블랙우드 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니까.
비즈니스에 있어서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가 그런 조건을 제시한다면 진의를 의심해봐야 한다.
그럼에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좋은 제안이기 때문.
3억 달러를 아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테러단체에 자금을 준다는 오명도 피할 수 있다.
이번 일에 대해 테일러 회장 개인의 책임론과 비판이 쏟아지는 중이다. 디지털 전환을 하면서 왜 보안을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아 회사를 위험에 처하게 했냐는 것이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속으로는 울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돕겠다는 사람을 내쫓을 수 있을 리 없겠지.
테일러 회장은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
“크흠!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군.”
“꿍꿍이 같은 건 없습니다. 오직 이번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죠.”
“이해가 안 되는군. 공매도를 해놓고 도와주겠다니. 주가가 떨어질수록 이익을 보고, 주가가 오르면 손해를 볼 텐데.”
“맞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는 법이죠.”
난 그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걸 보면 제 말을 믿으실 수 있을 겁니다.”
“뭔가?”
테일러 회장은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다름 아닌 거래내역서다.
그걸 본 테일러 회장은 눈을 크게 떴다.
“보시다시피 컨티뉴 캐피탈은 숏포지션을 전부 청산하고 블랙우드 인터내셔널 주식과 콜옵션을 매수했습니다.”
랜섬웨어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면 주가는 폭등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폭락이다.
난 테일러 회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랜섬웨어를 해결할 수 있다에 전 재산을 걸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믿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
테일러 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