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출장 (1)
갑작스러운 자기 자랑에 놀랐는지 사라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랑하시는 건가요?”
이 정도면 자랑할 만하지 않나?
하지만 시장에서 이 정도 성공을 거둔 사람은 많다. 나 같은 건 아직 애송이에 불과하겠지.
“수익률도 수익률이지만, 중요한 사실은 제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 아닐까요?”
사라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제까지 실패하지 않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실패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죠.”
“그야 그렇죠.”
귀납법의 맹점이지.
이제까지 본 백조(Swan)가 전부 하얗다고 해서, 검은 백조(Black Swan)가 없다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애초에 저한테 투자자문을 제안한 건 제 실력을 믿기 때문 아닌가요?”
“······.”
사라는 내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난 자신 있다는 미소를 지었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국부펀드가 그런 식으로 투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왕실까지 비난을 받게 될 거예요.”
“첫째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으면 되고, 둘째로 그 이상의 수익을 내면 되죠.”
문제가 생기는 건 어디까지 일이 잘못됐을 때다. 잘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돈 벌었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장담컨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수익을 낼 겁니다.”
“금액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나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적어도 100억 달러는 됐으면 하네요.”
“그중 50억 달러를 빌리겠다는 거군요.”
“예.”
사실 다른 나라 국부펀드라면 이런 조건의 투자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PIF 역시 운용 원칙상 불가능하겠지만, 그런 거야 라시드 왕자가 얼마든지 손 쓸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결정하시기 쉽도록 재밌는 얘기를 하나 해드리죠.”
“뭔가요?”
난 머릿속을 뒤져보았다.
이 시기쯤 일어나는 사건이 뭐가 있었더라?
그렇다고 천재지변 같은 걸 얘기할 수는 없다. 마치 분석을 통해서 알아낸 것처럼 해야 하니까.
마침 생각나는 이벤트가 하나 있다.
“조만간 미국이 터키 경제제재에 들어갈 거예요.”
사라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무슨 말이죠?”
“아시다시피 현재 이란 핵 협상이 파기되며 미국은 이란을 제재 중입니다. 여기에는 세컨더리 보이콧도 포함되어 있죠.”
그녀는 내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터키가 이란과 거래를 계속할 거라는 건가요?”
“예.”
터키는 유럽에도 한 발 걸쳐있는 만큼 대체로 친미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라크전 때는 영공 통과 등에 협조하기도 했고.
하지만 사힌 대통령의 집권 이후 터키는 미국, EU랑 여러 차례 대립각을 세웠다.
얼마 전, 러시아산 지대공 미사일을 구입한 게 대표적이다.
미국은 터키가 보유하고 있는 미국 전투기의 비밀이 누출될 것을 우려해 만류했고, NATO 역시 핵심 군사정보가 러시아에 유출될 것을 우려했으나, 사힌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기계약을 맺어놨다는 핑계로 이란과의 거래를 계속 유지할 테고, 이는 제재의 빌미가 될 겁니다.”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 마련. 그러나 독재자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터키는 유로화 부채가 높아요. 미국의 경제제재를 버티기 힘들 텐데요.”
“예. 얼마 못 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거예요.”
사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인가요?”
터키나 이란 모두 이슬람 국가인 만큼, 사우디 입장에서는 이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수니파인 사우디와 시아파인 이란은 앙숙.
“제 분석에 따르면 그래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난 피식 웃었다.
“저야 제 분석을 확신하지만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죠.”
분석이야 개나 소나 할 수 있다. 그게 맞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지.
“어쨌거나 제재가 시작되면 리라화 가치는 20퍼센트 이상 폭락할 테니, 관련 자산 있으면 미리 정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 말만 듣고 싹 다 정리하지는 못할 것이다. 국부펀드가 투자한 거라면 국가적인 관계도 고려해야 할 테니.
그래도 미리 리스크헤지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사라는 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믿게 되어 있다.
“돈만 있으면 돈을 버는 건 쉬워요. 장담컨대 저와 손잡으면 PIF는 상상도 못 할 수익을 얻게 될 겁니다.”
* * *
치킨가게 복수(?)도 끝났겠다, 이제는 다음 일을 할 차례다.
난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장과 부지사장에게 말했다.
“모레 미국으로 출발할 겁니다.”
동호 선배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미국은 무슨 일로?”
“출장이죠. 본사로 갈 거예요.”
“일정은?”
“최소 한 달. 상황 봐서 그 이상 될 수도 있어요.”
“흠, 한 달이나 자리를 비운다고? 그동안 우리는 뭐 하지?”
“뭐 하긴요? 다 같이 갈 거니까 준비해요.”
“진짜?”
“예.”
동호 선배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오예!”
그러면서 뭐 하냐는 눈빛으로 옆에 있는 친구를 보았다.
그러자 김범석도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예에!”
* * *
우리는 인천공항에서 뉴욕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즈니스하러 가는 길인 만큼 비즈니스석에 탔다.
그저 좌석이 크고 앞자리와의 간격이 넓을 뿐이지만, 이코노미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안락했다.
돈이 있으면 몸이 편해지는 법이지.
미국에서 할 일에 대해 정리하는 사이, 비행기는 14시간 정도를 날아 뉴욕 JFK공항에 도착했다.
시차로 인해 낮에 출발했는데 여전히 낮이다.
공항을 나온 우리는 먼저 센트럴 파크로 향했다.
동호 선배는 두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오! 뉴욕!”
아주 신났다.
일전에 왔을 때는 관광도 제대로 못 했던 터라 우리는 천천히 뉴욕을 둘러보았다. 센트럴파크와 타임스퀘어를 둘러본 다음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도 올라갔다.
그리고 월스트리트에 도착했다.
월스트리트는 모두가 인정하는 세계 금융의 중심지.
이름 들으면 알 만한 IB와 사모펀드, 헤지펀드, 연기금 운용사 등이 몰려있다. 그리고 증시 뉴스에 항상 배경으로 나오는 뉴욕증권거래소(NYSE)도 여기에 있다.
동호 선배는 또다시 두 팔을 벌렸다.
“오! 월스트리트!”
여기서 끝이 아니라 황소 동상 앞에서 투우사 같은 포즈를 취하며 겉옷을 벗어들고 흔들었다.
“올레!”
그 모습을 보며 지나가는 관광객들은 키득거렸고, 정장을 입은 백인들은 ‘저 동양인은 뭐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선배다.
“나 사진 좀 찍어줘.”
“······.”
아, 모른 척하고 싶다.
고개를 돌려보니 김범석은 이미 일행이 아닌 척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월스트리트가 유명하긴 하지만 막상 와보면 볼 건 별로 없다. 여기는 관광지가 아닌 오피스 타운이니까.
동호 선배가 말했다.
“아! 배고프다. 밥부터 먹으러 가자. 내가 맛집 찾아놨어.”
“뭐 먹게요?”
“스테이크 어때? 근처에 세계 3대 스테이크집이 있대.”
난 고개를 저었다.
“햄버거나 먹으러 가죠.”
“아니, 무슨 여기까지 와서 햄버거야? 혹시 스테이크는 비싸서 그래? 내가 살게.”
“잔말 말고 따라와요.”
난 두 사람을 데리고 월스트리트 뒷골목으로 향했다.
몇 번 와봤더니 굳이 지도 앱을 켜지 않고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1층에 있는 허름한 펍은 개점 준비가 한창이었다.
안에는 중년 남자가 마른 수건으로 잔을 닦고 있었다.
2미터는 되는 키에 얼굴 전체를 덮은 붉은색 수염. 드러난 팔과 목에는 타투가 가득했다.바로 이 가게의 사장이다.
오코너 사장은 나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어쩐 일인가?”
“오늘 뉴욕에 왔습니다.”
“하하! 다시 보니 반갑군. 잘 왔네.”
“지금 주문되나요?”
“물론이지. 뭘 먹겠나?”
“오코너 버거 세 개 부탁드릴게요. 감자튀김도요.”
“잠시만 기다리게.”
그는 주방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동호 선배는 나에게 물었다.
“여긴 술집 아니야?”
“햄버거도 팔아요.”
“맞은편에 식스가이즈 버거도 있던데, 굳이 여기서?”
별로 기대가 안 되는 모양이다.
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여기가 뉴욕 최고의 햄버거 맛집이에요.”
동호 선배는 이의를 제기했다.
“인터넷 맛집 지도에도 안 나와 있던데.”
그야 여기는 술집으로 구분되어 있을 테니까.
잠시 후, 흑맥주와 함께 햄버거가 나왔다.
“아니, 햄버거에 뭔 계란이 들어가 있어?”
“나중에 또 사달라고나 하지 마요.”
동호 선배는 전혀 기대감이 없다는 표정으로 햄버거를 한입 베어 물었다. 하지만 이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이거 뭐야?”
놀라기는 김범석 역시 마찬가지.
“엄청 맛있는데.”
“흑맥주랑 같이 먹으면 더 맛있을 거예요.”
두 사람이 허겁지겁 먹는 사이 난 오코너 사장과 얘기를 나눴다.
“잘나가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네. 딸이 자네 얘기를 많이 하더군.”
“그래요?”
내가 특종을 좀 많이 주긴 했지.
“거의 매일같이 얘기하더군. 이번에 한국에서 엄청난 일을 성공시켰다며?”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고작(?) 10대 그룹 하나를 박살 냈을 뿐.
“아! 그때 같이 왔던 남자는 자주 와서 햄버거를 사갔네. 가끔은 직원들도 데리고 오더군.”
한번 맛보더니 나 없는 동안에도 열심히 다녀갔던 모양이다.
나도 회사 근처에 있었다면 자주 왔을 텐데.
“혹시 체인점 같은 걸 낼 생각은 없나요? 잘될 것 같은데.”
세상에 맛있는 음식은 많다. 하지만 그걸 프랜차이즈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업가의 노력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상징인 맥도날드만 해도 맥도날드 형제는 프랜차이즈에 별 관심이 없었다.
만약 한 남자가 없었다면 그냥 동네에서 잘나가던 햄버거 가게로 끝났을 것이다.
그 남자는 바로 레이 크록.
믹서기를 판매하던 그는 나중에 맥도날드 형제로부터 맥도날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사들이고 거대한 프랜차이즈 왕국을 세웠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프랜차이즈화해서 다 잘된다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이 햄버거가 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힘을 지녔다는 거겠지.
오코너 사장은 피식 웃었다.
“체인점 같은 건 별로 관심 없네.”
“어째서요?”
“사실 예전에 프랜차이즈를 하고 싶다며 찾아온 사람이 있었네. 그는 오코너 버거를 세계적인 프랜차이즈로 만들어주겠다고 공언했지.”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레시피 특허를 등록하고, 각국에 상표권을 받으려면 10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하더군. 사기꾼이었지.”
“아······.”
이런 종류의 사기꾼은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다.
“하마터면 당할 뻔했는데 다행히 직전에 눈치챘네. 흠씬 두들겨 팬 다음 쫓아냈지.”
난 슬쩍 오코너 사장의 팔과 주먹을 보았다.
그 사기꾼, 살아서 돌아갔으려나?
“그 뒤로는 프랜차이즈나 체인점을 제안한 놈들은 전부 엉덩이를 걷어차서 쫓아냈네. 그놈들에게는 햄버거도 팔지 않았지.”
“······잘하셨습니다.”
제안 안 해서 다행이다.
오코너 사장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오코너 버거는 내 자부심이나 다름없네. 애초에 돈만 밝히는 사업가 놈들을 어떻게 믿고 맡길 수 있겠나?”
하지만 아들에게는 믿고 맡길 수 있지 않을까?
빠른 한국 진출을 위해서라도 지금 숀 오코너가 하는 사업이 얼른 망해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군가 헐레벌떡 가게로 들어왔다.
곱실거리는 붉은색 머리카락은 대충 묶고, 얼굴에는 커다란 안경을 꼈다. 입고 있는 옷은 청바지에 셔츠. 그리고 구겨진 재킷.
어깨에는 가방을 메고 손에는 카메라를 들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반갑게 말했다.
“하이! 늦어서 미안해요. 취재가 좀 늦게 끝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