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병진공업 (6)
허민웅은 언제 건방을 떨었냐는 듯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허민웅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그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예,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부사장님께서 대체 왜 여기에······?”
“하하! 제가 미루랑 친해서요. 어떤 면에서 보면 친형제보다도 가까운 사이라 할 수 있죠.”
이게 거짓말이 아니긴 하다.
나와 가까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친형제와 사이가 먼 건 확실하니까.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부사장님.”
“에이, 부사장님이라니.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냥 민웅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 예. 민웅 씨.”
차마 ‘민웅이’라고는 못하겠는지 끝에 ‘씨’를 붙였다.
아버지는 다시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니가 저분을 어떻게 알게 된 거니?”
“그냥 뭐 일하다 보니 알게 됐어요.”
사실 한 번 만나고 끝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계속 보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허민웅은 아버지에게 친하게 굴었다.
“미루가 누구를 닮아 이렇게 똘똘하나 했더니 했는데, 아버님을 많이 닮았나 보네요.”
“아, 예.”
“혹시 아버님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시나요?”
“그건 왜······?”
“아! 생신 때 선물이라도 좀 보내드리려구요.”
“······.”
아니, 왜 나도 잘 안 챙기는 우리 아버지 생신을 챙기는 건데?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내친김에 바로 박용진 전무까지 불렀다.
그는 바로 인천으로 달려왔고, 난 아버지에게 소개시켜주었다.
“화안솔루션 전무로 재직하시다가 얼마 전 퇴직하신 분입니다. 회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모셔왔습니다.”
“뭐, 뭐?”
“오늘부터 병진공업 부사장직을 맡게 되실 겁니다.”
아버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 아니. 이런 분이 대체 왜 우리 회사로······?”
박용진 전무······ 아니, 이제 병진공업 부사장이 된 그는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장님.”
“아, 예.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맡겨만 주신다면 사장님을 도와 병진공업을 풍력발전 서플라이 체인의 가장 핵심이 되는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키워보겠습니다.”
“······.”
이게 뭔 소리냐는 표정이다.
아버지는 잠시 후 신음처럼 물었다.
“예?”
* * *
설 명절이 끝난 뒤.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에 출근한 이동호는 믹스커피를 타서 홀짝거렸다.
“미루도 안 오고, 공주님도 안 오시니 조용하군.”
주총이 끝난 뒤에도 한미루는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녔고, 회사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증권사 직원으로 일할 때의 버릇대로 마감된 미국과 유럽 증시를 체크한 다음, 밤사이 올라온 리포트들을 살펴보았다.
그때와 다른 점은 이제 주식 오르내리는 걸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김범석이 출근했다.
“팀장님은 오늘 출근 안 하셔?”
한미루는 실제로는 본사의 대표지만 국내에서 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적당히 팀장이라는 직책을 달았다.
그리고 그사이 김범석은 부지사장으로 승진(?)했다.
이쯤 되면 입사 순서대로 직함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화안에너지 허민웅 부사장 만난대.”
“무슨 일로?”
“그냥 집안일이라는데.”
“······.”
대체 무슨 집안일이기에 화안그룹 회장 아들을 만나는 걸까?
김범석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맞다! 고마워.”
“뭐가?”
“나 여기 취직시켜줘서.”
“······갑자기?”
김범석은 이유를 말해주었다.
“설에 큰집에서 친척들이 다 같이 모였거든. 다들 대기업에서 일하네 연봉이 얼마네 자랑하다가 나한테 취직은 했냐고 묻더라.”
“오! 그래서?”
“사모펀드에 취직했다고 했더니, 대형 증권사도 아니고 뭐 그런 데를 들어갔냐며 잔소리하기에 컨티뉴 캐피탈이라고 했지. 그러니까 한순간에 조용해지던데.”
이동호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좀 유명해지긴 했지.”
컨티뉴 캐피탈이 대중에 이름을 알린 건 토머스 모터스 사태 당시.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모펀드가 됐다.
아무래도 재벌그룹을 적대적 M&A한 것이다 보니 부정적인 이미지가 크긴 하지만.
어쨌거나 악명도 명성도 아니겠나?
“진짜 아직도 주총 때 생각하면 심장이 떨려. 이길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나도 그랬어.”
표가 발표된 순간 이미 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위임장 하나로 그걸 뒤집었다.
의장이 한정물산 대표이사인 만큼 다시 위임장을 확인하며 시간을 끌 거라 예상했는데 바로 가결시켜 버렸다.
이후 한정물산 측에서 이의를 제기하긴 했으나, 위임장에 문제가 없었던 만큼 주총 결과는 뒤집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후 사정을 들어서 알고 있으나, 언론에서는 아직도 어째서 의장이 바로 결정을 내렸는지, 어째서 주현진이 위임장을 써줬는지 추측만 할 뿐이었다.
뭐든 결과만 놓고 보면 쉬워 보인다.
하지만 그 결과를 만들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존재한다. 한미루는 그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해놓았다.
이 시점에서 한정그룹이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동호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아직도 온몸이 짜릿했다. 엄청난 돈이 걸린 도박이나 큰 대회에서 이겼을 때의 기분이 이런 걸까?
투자란 단지 돈을 버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자신이 이겼고, 성공했고, 옳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행위다.
만약 DA증권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했다면, 그저 기사나 보고 리포트를 쓰는데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 일을 벌였다.
변화되는 세상을 가만히 지켜보는 게 아니라, 직접 변화를 일으킨다.
‘이 맛에 투자하는 건가?
이번 투자로 컨티뉴 캐피탈이 올린 수익은 2조 원이 넘는다.
그야말로 사모펀드계의 역사를 새로 쓴 셈이다.
“투자의 신도 아니고, 어떻게 저런 실력을 갖고 있는 거지?”
“흠, 역시 내가 잘 가르쳤기 때문인가?”
김범석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친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동호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진짜야. 쟤 주식하는 거랑 종목 분석하는 거 다 내가 가르쳤어.”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는 선배였고, 직장에서는 사수였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 실력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바뀐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다.
“왜 날 지사장으로 앉힌 거지?”
“그러게. 친하다고 한자리 줄 성격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역시 나도 모르는 나의 투자실력 때문에?”
“헛소리하지 말고.”
“······.”
스스로 말하고도 헛소리 같았다.
이동호는 한참을 생각해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이유가 없었다.
“혹시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나라를 구하진 않았지만, 누군가를 구하긴 했다.
* * *
집안일을 마무리한 다음 난 카페에서 사라를 만났다.
카페 안의 사람들은 남녀 할 것 없이 그녀를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걸 보면 어디를 가나 시선을 받는 게 익숙한 모양이다.
우리는 주문한 커피를 들고 마주 앉았다.
“지금 일할 시간 아니에요?”
내 물음에 사라는 웃음을 지었다.
“에이오일은 그만두기로 했어요.”
“그럼요?”
“PIF로 자리를 옮길 거예요.”
“그렇군요.”
예상했던 일인 만큼 별로 놀랍진 않다.
PIF란 사우디 국부펀드.
어차피 에이오일 재무이사는 경험을 쌓는 자리였고, 그녀는 국부펀드에서 제 실력을 발휘한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이직 시기가 훨씬 빨라진 듯하다.
“지난번 말씀하신 제안은 검토해봤어요.”
“어떻게 됐나요?”
“에이오일이 HJ퓨어셀 인수 검토에 들어갔어요.”
“그렇군요.”
사실 이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HJ퓨어셀이 인수된다고 해서 나한테 돈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넥스트로젠 지분 인수는요?”
“국부펀드에서 투자할 예정이에요.”
“오! 잘됐네요.”
80억 달러가 들어오면 알렉스 프레스턴에게 지불해야 하는 돈 문제가 한 방에 해결된다.
이걸로 한숨 돌릴 수 있겠네.
“단 조건이 하나 있어요.”
“뭔가요?”
“PIF의 투자자문을 맡아줬으면 해요.”
“음.”
이건 예상치 못한 제안인데.
“투자자문이면 어떤 걸 말하는 건가요?”
“그냥 투자 대상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하고 자문만 해주면 되는 거예요. 좋은 투자처가 있으면 추천도 해주고요.”
“조건은요?”
“제가 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연봉은 최소 1000만 달러에 성과급은 따로 지급할 거예요.”
보고서 보고 말 몇 마디 해주는 것만으로 1000만 달러를 받을 수 있다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두 손 들고 환호했을 것이다.
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제법 머리를 쓰는데.
향후 어떤 산업이 뜰지만 알아도 돈 버는 건 쉬운 일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내 말 한마디는 1000만 달러가 아니라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
겨우 그 정도 헐값(?)에 내 능력을 팔 생각은 없다.
“거절해도 되나요?”
“어째서요?”
사라는 내 표정을 슬쩍 살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속이 타고 있을 것이다.
이미 내 실력을 확인한 뒤다. 국부펀드 투자에 반드시 끌어들이고 싶겠지.
“단순히 자문만 하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요.”
“그럼요?”
“수익이 나는 만큼 제 몫을 챙겨가야죠.”
“수익의 일정액을 받고 싶다는 건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엑시트를 할 때잖아요.”
“그렇죠.”
엑시트를 하지 않으면 수익이 확정되지 않고, 미실현이익에 대해 수익을 분배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반적인 사모펀드는 기업을 산 다음 매각해서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분배한다. 따라서 언젠가는 엑시트를 하기 마련.
그러나 국부펀드는 투자자들의 돈이 아닌 나랏돈으로 운영하는 만큼 그럴 필요가 없다. 때문에 좋은 기업은 계속 보유해서 가져가는 일도 많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요?”
“어떻게요?”
“국부펀드와 컨티뉴 캐피탈이 공동으로 투자해서 펀드를 만드는 겁니다.”
이는 여러 투자사가 공동으로 투자할 때 흔히 쓰이는 방식이다. 돈 낸 만큼 펀드 지분을 나눠 가지면 수익 배분 문제도 쉽게 해결된다.
“비율은요?”
“5대5요.”
사라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펀드 자금의 50퍼센트를 컨티뉴 캐피탈이 내겠다구요? 그만한 자금 여력이 있나요?”
당연히 없다.
나한테 그 돈이 있었으면 진작 기업쇼핑하러 다녔지.
“저희가 사정이 좀 빠듯해서요. PIF에서 빌려주는 건 어떤가요?”
“빌려달라구요?”
“예. PIF가 펀드 투자금을 빌려주면 그 돈을 고스란히 펀드에 넣겠습니다.”
“······.”
사라는 할 말을 잃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돈 한 푼 넣지 않고 펀드 지분의 50퍼센트를 가져가겠다는 얘기니까.
“그럼 사실상 PIF가 전액을 투자하는 셈이잖아요.”
“그에 따른 이자는 충분히 지급하겠습니다. 연 10퍼센트 어때요? 복리로요.”
선진국 10년물 국채금리가 3퍼센트가 안 된다.
절반을 10퍼센트에 빌려준다고 하면, 전체 투자금의 5퍼센트 수익을 먹고 시작하는 셈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손실이 나지 않을 경우 아닌가요? 만약 컨티뉴 캐피탈에 문제가 생겨서 지불 능력이 없어지면 결국 저희가 떠안아야 할 텐데.”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운영을 잘해야죠.”
“다른 펀드들은 운영을 대충해서 손실이 나는 건가요?”
아무리 투자를 잘해도 예상치 못한 시장 변화에 따라 손실을 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이는 현존하는 최고의 투자자이자 와킨스빌의 현자로 불리는 에런 베이커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리스크 관리가 중요한 거지.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으면 얘기가 다르다.
“전 프리머스 펀드 부실을 밝혀냈고, 동우정밀의 가치를 판단해 유성전자에 인수시켰습니다. 토머스 모터스의 부실을 폭로해 폭락시켰고, 롤프 부치의 거짓말을 알아내 스노우 크래시를 인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모두가 안 될 거라고 말했던 한정물산 경영권 분쟁에서 이기기까지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