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병진공업 (5)
모두가 쳐다보자 허민웅은 입을 가리며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좀 웃겨서. 하던 거 계속하세요.”
하지만 한번 터진 웃음을 참기가 힘든지 계속 킥킥댔다.
육호경 회장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너 왜 웃어?”
“웃겨서.”
“뭐가 웃긴데?”
“그럼 이게 안 웃겨?”
정말로 웃겨 죽겠다는 표정이다.
겨우 공장 하나짜리 회사를 빼앗기 위해 이러고 있으니, 재벌 입장에서는 초등학생이 유치원생 요구르트 뜯어내는 걸로 보이려나?
육호경 회장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고, 이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만 웃어!”
“크큭.”
허민웅은 해도 되냐는 표정으로 날 보았고, 난 마음껏 해도 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참.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아주 가관이네.”
표정에는 비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 다리를 꼬고 등을 기댄 채 앉았다. 처음 만났을 때 봤던 그 건방진 모습이다.
그때와 다른 건 지금은 내 편이라는 것.
“······.”
뭐지? 이 든든함은?
허민웅은 육호경 회장을 보며 말했다.
“어이, 당신.”
“뭐!? 당신? 어디서 새파랗게 어린놈이······.”
“지금 어디서 갑질이야? 요즘 대기업도 잘 안 하는 짓을 뭔 쥐구멍만 한 하청업체가 하고 있어? 그리고 뭐? 말 한마디면 거래 다 끊게 할 수 있다고? 어디 나도 한번 똑같이 해줘 볼까? 당신 회사, 내가 문 닫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이 새꺄!?”
육호경 회장이 소리쳤지만 허민웅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이번에는 김철우를 보았다.
“그리고 너.”
“나, 나?”
“그래 너. 넌 회삿돈 횡령한 주제에 대체 무슨 낯짝으로 매형까지 데려와서 큰소리치는 거야? 누구는 가족 없어서 안 데려오는 줄 알아? 나도 어디 한번 우리 아버지 데려와 봐?”
“······.”
정말로 아버지 데려오면 볼만하겠는데.
육호경 회장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너 대체 뭐 하는 새끼야!?”
허민웅은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런 당신은 뭐 하는 새낀데?”
“뭐? 새끼? 이 새끼가 진짜! 너 죽고 싶어!?”
육호경 회장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은 기세다.
허민웅은 그 모습을 보고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다시 앉아. 평생 후회할 짓 하지 말고.”
“······.”
말투와 표정만 봐도 그냥 허세 부리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을 것이다.
기세에 눌렸는지 육호경 회장은 잠깐 움찔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는지 이내 소리쳤다.
“이 새끼가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있어? 죽고 싶어? 확 그냥 눈깔을 파버릴까!”
“내가 누군지 알면 그런 말 못 할 텐데.”
“그러니까 니가 누군데!?”
허민웅은 안주머니에서 명함 지갑을 꺼내 날리듯 명함을 던졌다.
육호경 회장은 그 명함을 집어 들었다.
“어디서 건방진 새끼가······.”
하지만 이내 입을 닫고 눈을 부릅떴다.
그는 잠시 명함과 허민웅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김철우는 육호경 회장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매형? 저놈이 대체 누군데요?”
육호경 회장은 말없이 들고 있던 명함을 건네주었고, 그걸 본 김철우는 입을 쩍 벌렸다.
“서, 설마······ 화안그룹 망나니!”
허민웅의 얼굴과 이름은 대중들에게 제법 잘 알려져 있다.
과거 여러 차례 사고를 친 데다가, 토머스 모터스 사태 때는 뛰어난 위기회피 능력(?)으로 뉴스에 보도됐기 때문이다.
허민웅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응. 그게 바로 나야.”
“······.”
둘 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곳에서 화안그룹 회장 아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죽고 싶냐고? 눈깔을 파버린다고 했나? 어! 뭐야? 나 지금 살해 협박당한 거야? 오우! 소오름! 이거 그룹 법무팀에 알려서 당장 조치를 취해야겠는데. 거기 회사 이름이 뭐라고 했죠?”
육호경 회장은 화들짝 놀랐다.
“죄, 죄송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에 깁스라도 한 것처럼 빳빳하게 서 있던 머리는 어느새 바닥을 향해 있었다.
허리는 90도를 넘어서 거의 폴더처럼 접혔다.
유연성이 제법인데.
김철우는 그 모습을 보며 당황했다.
“매, 매형.”
“뭐해, 임마? 너도 어서 숙여!”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김철우와는 다르게 육호경 회장은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나름 대기업 벤더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만큼, 한국에서 재벌이 끼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게 대한민국에서 재벌이 갖는 위상인가?
“아니, 왜들 이래? 누가 보면 내가 갑질이라도 하는 줄 알겠는데. 당한 건 난데.”
“부, 부사장님······.”
“부사장님? 아까는 이 새끼 저 새끼라고 잘만 부르더만.”
“아, 아닙니다!”
“일단 서 있지 말고 자리에 앉아요. 올려다보기 목 아프니까.”
“예, 예.”
육호경 회장은 마치 순한 양처럼 다소곳하게 앉았다. 덩치도 큰 사람이 잔뜩 움츠려 앉아 있으니 왠지 안쓰럽다.
한순간에 상황이 역전됐다.
허민웅은 괜히 나를 한 번 쳐다보았고, 난 잘하고 있다는 의미로 엄지손가락을 슬쩍 치켜세웠다,
이게 대한민국 재벌이다!
“부사장님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왜요? 제가 뭐 못 올 데라도 왔나요?”
“아, 아닙니다.”
허민웅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얘랑 친해서 병진공업을 한번 키워보려고 와봤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칼을 들이밀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어떻게? 회장님께서 가져가실래요?”
육호경 회장은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괜찮긴. 회사 날로 먹으려고 공장 앞에 펜스까지 치려 했던 분이.”
“노, 농담이었습니다.”
“그래요? 재밌어 보여서 저도 한번 해보려고 했는데. 회장님 공장 앞에 땅 사다가 개미 한 마리 못 지나다니게 펜스 치면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그런 거 좋아하시잖아요.”
“아, 아닙니다. 안 좋아합니다.”
그는 화안그룹 망나니.
한다면 하는 남자.
사실 내가 쉽게 대해서 그렇지, 화안그룹 회장 아들이면 말 한마디로 중소기업 하나 정도 날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그 경우 ‘재벌가의 갑질’이라는 욕을 먹게 되겠지만, 허민웅은 화안그룹 망나니로 불릴 정도로 성격이 더럽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유명하다.
이미 이미지가 바닥인 만큼 별로 떨어질 이미지가 없기도 하고.
이럴 땐 악명도 도움이 되는 법이지.
다시는 대한민국 재벌을 무시하지 마라!
난 아버지에게 말했다.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하셔도 돼요.”
“어. 그, 그래.”
아버지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채 김철우에게 물었다.
“대체 왜 그랬냐?”
김철우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억울해서 그랬습니다.”
“억울?”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회사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그런데 쫓아내겠다고 하니······.”
참다못한 아버지는 버럭 소리쳤다.
“처음부터 회삿돈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지!”
그는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그동안 그렇게 고생했는데 그 정도 가져간 게 뭐 그리 큰 잘못입니까?”
“······.”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는 것.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그럴듯한 논리일지 몰라도 남들이 듣기에는 개소리다.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야 그렇다 쳐도 직원들은 무슨 잘못이냐? 거래처 끊겨서 회사 망하면 직원들 다 실업자 될 텐데. 그러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냐?”
“······.”
김철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이제 와서 훈계 몇 마디 듣는다고 사람이 바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빨리 정리하는 게 좋겠지.
난 그의 앞에 계약서를 내밀었다.
“어떻게 하실래요? 조용히 지분 뱉어내고 나가실래요? 아니면, 법대로 하실래요?”
“나, 나는······.”
김철우가 머뭇거리자 허민웅이 한마디했다.
“설마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는 건 아니죠?”
그러자 육호경 회장이 김철우에게 호통을 쳤다.
“어허! 뭐 하고 있어? 당장 사인하지 않고!”
“매형······.”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에 그의 편은 없었다.
결국 김철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인했다. 이걸로 회사 지분 40퍼센트가 다시 아버지 손에 들어왔다.
난 서류를 챙기며 말했다.
“그럼 이제 빼간 회삿돈만 돌려놓으시면 되겠네요.”
김철우는 놀라 소리쳤다.
“자, 잠깐. 이건 약속이 다르잖아!”
“예? 뭐가요? 고발을 안 하겠다고 했지, 돈을 안 받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 훔친 돈은 걸렸으면 돌려주는 게 상식 아닌가요?”
앞으로 업종 전환하려면 돈 들어갈 일이 많다. 그러니 받을 수 있는 건 받아야지.
지분은 내놓아도, 5억이라는 돈까지는 물어낼 엄두가 안 나는지 김철우는 무릎을 꿇고 빌었다.
“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이지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과였다.
원래 5억이 걸려있으면 누구나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과를 할 수 있는 법이다.
빠른 태세 전환에 허민웅은 빈정거렸다.
“아니, 방금 전까지는 회사 넘기라고 큰소리치더니 갑자기 왜 이래?”
김철우는 머리를 바닥에 대며 울음을 터트렸다.
“흐흑! 앞으로 다시는 경마에는 손도 대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저 형님이랑 같이 정말 열심히 했잖아요.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용서를 구할 거면 처음부터 해야 했다. 지금 와서 울어봐야 악어의 눈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철우야······.”
난 직접 결정하라는 의미로 아버지를 보았다.
잠시 후, 아버지는 마음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그 돈은 내 돈이 아니라 병진공업의 돈이다.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 고발은 하지 않을 테니 돈은 회사로 돌려놔라.”
“형님! 제발······.
매달리려는 김철우에게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는 여기 찾아오지 말고, 연락도 하지 마라. 너와 나의 인연은 이걸로 끝이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니 이번 일을 겪으며 많은 걸 느끼신 모양이다. 정에 약한 사람이 한번 돌아서면 무섭다.
더 이상 애원해봐야 소용없다고 여겼는지 김철우는 고개를 떨궜다.
허민웅은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갚을 돈이 부족하면 능력 좋으신 육호경 회장님께서 빌려주시면 되겠네요. 안 그래요?”
졸지에 연대보증을 서게 된 육호경 회장은 당황했다.
“예? 저요? 제가 왜······?”
“아까 처남 일이 곧 나의 일이라면서요? 그러니 처남의 빚은 곧 회장님의 빚이죠.”
“······.”
“대답은요?”
육호경 회장은 힘겹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난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할 얘기 다 끝난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시죠.”
육호경 회장은 바닥에 있는 김철우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온몸에 힘이 빠졌는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오늘 결례가 많았습니다, 부사장님”
허민웅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쯧! 결례인 걸 알면 처음부터 하질 말았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오늘 일은 모쪼록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횡령한 돈이나 최대한 빨리 채워 넣으세요. 그러면 잊어 줄 테니. 아니면, 나한테 살해 협박한 거 거래처에 다 알리고.”
“아,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나자 시끌벅적하던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믿었던 사람의 밑바닥을 봤으니 마음이 착잡하실 거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고 나와 허민웅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다.
김철우가 매형까지 데려와서 난리를 치는데, 설마 화안그룹 회장 아들이 나타나 정리할 줄은 몰랐겠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분이 정말로 화안에너지 부사장님이시니?”
“그럴 리가요. 그냥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에요.”
그 말에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뭐!? 그럼 재벌가를 사칭한 거야? 이 사실이 화안그룹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농담입니다. 본인 맞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