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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병진공업 (3) (156/529)

 161화. 병진공업 (3)

 허민웅은 바로 박용진 전무에게 연락해서 물어봐주었다.

 다행히 만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난 먼저 호텔 커피숍에서 허민웅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내 얘기를 들은 허민웅이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병진공업을 대기업으로 만드려고?”

 “그건 힘들겠죠. 그래도 누구한테 좆소 소리는 안 듣도록 1차 벤더까지는 키울 생각이에요.”

 허민웅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럼 그냥 적당한 1차 벤더 하나 인수해버리면 되지 않아? 너 돈 많잖아.”

 “그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죠.”

 “그런데?”

 “제가 하기보다는 병진공업을 키워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일단 1차 벤더를 인수하려면 만만치 않은 금액이 들어간다. 그리고 게임도 처음부터 만렙 캐릭터로 시작하면 하는 재미가 없기 마련.

 아버지 힘으로 직접 회사를 키워나가야 더 큰 성취감도 느끼실 수 있겠지.

 허민웅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업종으로는 경쟁력이 별로 없지 않아? 내세울 거라고는 괜찮은 품질과 저렴한 납품가뿐인데, 이게 얼마나 가겠어? 알겠지만 요즘 기업들이 중국도 비싸다고 동남아나 인도로 빠지는 추세야.”

 “그러니까 기술 경쟁력을 키워야죠.”

 사회가 빠르게 디지털 전환이 되고 있지만, 제조업은 여전히 중요한 산업이다. 기술력만 잘 키운다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어떻게 하게?”

 “풍력발전 분야 부품회사로 성장시킬 생각이에요.”

 친환경은 세계적인 흐름이다. 앞으로는 이쪽에 기업들의 투자가 이뤄질 테고, 정부의 지원도 집중될 것이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태양광과는 달리 풍력은 이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화안그룹은 HJW에너지 인수를 진행 중.

 화안에너지, 화안솔루션, HJW에너지를 하나로 묶어 향후 수소 시대를 대비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다.

 이제까지 없던 산업을 새로 키우기 위해서는 관련 회사들도 함께 키워야 한다.

 화안그룹이 HJW에너지 인수를 끝나면 대규모 설비투자가 이뤄질 테고, 하청업체들도 그 수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미리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허민웅은 씨익 웃었다.

 “호오, 어쨌거나 우리 그룹과 거래를 트고 싶다는 거네. 너희 아버지 회사에 일감 몰아드리면 되나?”

 난 고개를 저었다.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니에요. 그저 공정하게만 대해주면 돼요.”

 허민웅은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남들 다 불공정하게 대하는데 너네 회사만 공정하게 대하면, 그 이상의 특혜가 어디 있어?”

 “······.”

 그건 그렇지.

 작은 납품 계약 하나 따내는 데도 혈연, 지연, 학연이 총동원되고, 접대와 로비가 오가기 마련.

 내가 회장 아들과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 자체가 특혜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다른 곳에서 봤을 때 특혜 소리 안 나오게 사업 규모도 키우고 기술 개발도 해야죠. 그래서 능력과 인맥이 있는 경영자가 필요한 거고.”

 “그럼 더더욱 박용진 전무가 딱인데.”

 난 그에 대한 자료를 받아보았다.

 일전에 말한 대로 화안중공업 평사원으로 입사해 밑바닥부터 일을 시작했다.

 그가 맡은 일은 공급망 관리.

 대기업의 경우 하청업체에서 수천, 수만 개의 부품을 납품받는다. 그중 하나만 문제가 생겨도 완성품의 인도가 늦어진다.

 때문에 이러한 공급망에 구멍이 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박용진은 혹여 납품기일이 늦어지기라도 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장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먹고 자고 하며 직접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덕분에 화안솔루션 전무로까지 올라섰다.

 서류만 봐도 마음에 든다.

 “그런 사람이 전무된 지 2년도 안 돼 너 때문에 잘렸지.”

 “그게 왜 저 때문이에요?”

 “그럼 누구 때문인데?”

 “따지고 보면 허민웅 씨 때문 아니에요?”

 “내가 왜?”

 “조금만 일찍 화안솔루션에 사실을 알려줬다면 안 잘렸을 거 아니에요?”

 “······.”

 어쨌거나 토머스 모터스 사태로 인해 화안솔루션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손실도 손실이지만 향후 성장 전망마저 불투명해지며 주가는 폭락했고, 주주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이 정도 사건이 터졌으면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고 허민홍이 사임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임원 몇 명이 옷을 벗었다.

 그중 한 명이 박용진 전무였던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인생 2막을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갑자기 고꾸라진 셈이다. 본인 잘못도 아닌 일을 떠안았으니 아마 속으로 울분을 터트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랑 잘 알아요?”

 “회사가 다르다 보니 잘 알진 못하고, 그냥 오가며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였지. 그래도 주위 사람들에게 평판은 좋은 모양이야.”

 둘이 얘기를 하는 사이 50대 초반 정도의 남성이 자리로 다가왔다. 적당한 키에 마른 몸, 그리고 뿔테안경을 썼다.

 체구는 왜소하지만 제법 성격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하기야 평사원으로 입사해 대기업 전무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그동안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었겠지.

 허민웅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박 전무님.”

 그러자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젠 전무도 아닌데요.”

 “그동안 별일 없으셨죠?”

 “별일이라 할 만한 게 있겠습니까?”

 “아! 여기는 아는 동생이에요.”

 난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예.”

 그냥 친하게 지내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는지 굳이 이름을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인사가 끝나자 박용진은 자리에 앉았다.

 “요즘 집에서 쉬고 계시죠?”

 “그렇습니다.”

 표정과 말투를 보니 그리 달가워하는 것 같지 않다. 회장 아들이라고 해서 비위를 맞춰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더더욱 마음에 든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보자고 한 겁니까?”

 허민웅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아는 사람이 회사 경영을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해서요. 딱 전무님이 생각나지 뭡니까?”

 “어떤 회사입니까?”

 대체 뭐 하는 곳이기에 회장 아들이 직접 소개해주나 싶겠지.

 “이런 회사예요.”

 허민웅은 미리 가져온 자료를 내밀었다.

 잠시 그 자료를 훑어보던 그는 이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이 회사를 권하는 이유는 뭡니까?”

 허민웅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 친구 아버지가 하는 회사라서요.”

 박용진은 나를 보았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버지께서 일하는 걸 좋아하시긴 하는데, 사업에는 별로 소질이 없으셔서요.”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저보고 지금 부사장님 지인 회사에 가서 일하라는 겁니까?”

 “그런 셈이죠.”

 “됐습니다. 전 뭐 자존심도 없는 줄 압니까? 그냥 집에서 계속 쉬겠습니다.”

 어차피 벌어놓은 돈도 있겠다, 퇴직금도 두둑이 받았겠다, 그 돈으로 당분간 놀고먹으면 그만이다.

 굳이 직원 20명짜리 중소기업에 들어가 고생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일은 하고 싶지 않으세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

 회장 아들이고 부사장이고 회사 그만두면 어차피 남이다. 그런데도 부르자마자 나왔다는 건 다시 일할 욕심이 있다는 거겠지.

 사람은 각자 원하는 게 다르다.

 누구는 돈 벌어서 빨리 은퇴하고 싶어 하지만, 누구는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계속 일하고 싶어 한다.

 그는 흙수저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타입이다. 일로 한번 성공을 맛본 사람이라면, 그 맛을 쉽게 잊지 못하기 마련이지.

 아마 일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릴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 전무까지 했는데 허접한 회사로 들어가기는 성이 차지 않고, 창업하자니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허민웅은 웃으며 말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봐요. 사이즈가 작긴 해도 이 회사가 나름 비전이 있어요.”

 “어떤 비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물음에 허민웅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얘가 비전이죠.”

 “예?”

 “얘 이름을 들으면 생각이 확 달라질 겁니다.”

 그 말에 박용진은 날 쳐다보았다.

 난 그제야 이름을 밝혔다.

 “한미루라고 합니다.”

 “한미루면······.”

 그는 흠칫 놀랐다.

 “설마 컨티뉴 캐피탈?”

 “맞습니다.”

 “하······.”

 듣자마자 아는 걸 보면 내 이름이 제법 유명해진 모양이다.

 “주총에서 한정그룹 경영권을 빼앗은 장본인이군요.”

 “그건 어디까지나 주주들의 결정이었죠.”

 그는 나와 허민웅을 번갈아 보았다.

 “토머스 모터스 사태 전부터 친분이 있었나 보군요. 그래서 손발을 맞춰서 움직였던 거고.”

 사실은 그때 알게 된 거지만, 어차피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허민웅 부사장님께 전무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실무도 빠삭하시고, 인맥도 넓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꼭 병진공업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지금이야 대기업 벤더 안에 포함도 안 되는 딸랑 공장 하나짜리 작은 하청업체. 하지만 그 뒤에 컨티뉴 캐피탈과 화안에너지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박용진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생각을 좀 해봐도 되겠습니까?”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어느 정도 마음이 기울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바로 거절했겠지.

 난 시간을 주는 대신 바로 밀어붙였다.

 “아니요. 이 자리에서 결정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장 말입니까?”

 “설마 박 전무님께만 이런 제안을 드린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

 하청업체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두 가지.

 첫째는 투자금을 마련하는 거고, 둘째는 거래처를 확보하는 거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문제가 다 해결됐다.

 망할 걱정은 없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이 정도 조건이면 하겠다는 사람은 많을 겁니다. 그럼에도 전무님께 가장 먼저 제안을 드린 이유는 허민웅 부사장님께서 강력하게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크흠.”

 어색한지 그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전 반드시 병진공업을 대기업과도 당당하게 거래할 수 있는 일류기업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따라서 능력만큼이나 의욕도 중요합니다. 그러니 고민이 된다면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박용진 전무는 나를 보며 물었다.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아무래도 중소기업이다 보니 화안솔루션에 계실 때처럼 연봉을 많이 드리지는 못합니다.대신 병진공업 지분 30퍼센트를 드리겠습니다. 나중에는 상장까지 할 생각이니, 회사가 성장하는 만큼 이익을 얻게 되실 겁니다.”

 허민웅도 한마디 덧붙였다.

 “하신다고 하시면 저도 최선을 다해 밀어드리겠습니다.”

 한국에서 재벌의 힘은 막강하다.

 허민웅이 말 한마디만 해도 관련 회사들이 서로 돕겠다고 발 벗고 나설 것이다.

 판은 깔려 있으니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됐는지 박용진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상 더 고민할 이유가 없군요. 기꺼이 하겠습니다.”

 난 웃음을 지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얘기가 잘 끝나서 다행이다.

 속으로 한숨을 돌리는데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미루야. 큰일 났다.]

 “왜 그러세요?”

 [지금 철우가 매형을 데려왔어. 당장 주문 넣은 거 다 취소하겠다고 소리치는데 어떡하면 좋니?]

 이미 예상했던 일인 만큼 놀랄 것도 없다.

 “상대하지 말고 계세요. 제가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갈게요.”

 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허민웅은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병진공업이요. 아버지와 동업하던 사람이 회삿돈을 빼돌리길래 쫓아냈는데, 지금 납품처 사장까지 데려와서 난리를 치고 있다고 해서요.”

 그 말에 허민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그럼 나도 같이 가야지.”

 “예? 왜요?”

 “그런 큰일이 생겼는데 당연히 내가 가서 도와야지! 우리가 남이가?”

 “······.”

 남 아니었어?

 가끔 나사 빠진 바보형처럼 굴긴 해도 그는 화안그룹 회장의 차남이자 화안에너지 부사장.

 같이 가면 도움이 될 것 같긴 하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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