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효도는 돈으로 (1)
한미루가 가고 난 뒤 유재호는 생각에 잠겼다.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얘기를 했는데, 오히려 고민거리가 늘어났다. 그동안 그의 조언을 쉽게 받아들인 것은 유성전자 입장에서 별다른 리스크가 없었기 때문.
설계 기업 한두 개가 성과를 못 내더라도 시행착오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데이터센터는 다르다.
이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만약 실패하면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모두의 비웃음을 사고 경영 실패에 대한 질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좋은 기회인 것도 사실이지.’
클라우드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산업. 한미루의 말이 아니더라도 향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그동안 이 시장은 빅테크 기업들의 영역이었다. 그들은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해내고 있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
이 시장에 한발 걸칠 수만 있다면?
데이터센터에 반도체를 납품하는 것은 일시적인 수익이다. 하지만 직접 데이터센터를 짓고 운영한다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잘만 하면 새로운 캐시카우가 되어줄 것이다.
스노우 크래시는 현재 미국 클라우드 업계 4위.
빅3와 비교하면 미미한 점유율이지만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스노우 크래시가 그들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이미 마음은 점점 그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유재호는 한미루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미래는 클라우드에 있다라······.”
* * *
성윤아가 카페로 들어서자 먼저 와있던 단발머리 여성이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아, 언니!”
그녀는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언제 왔어요?”
“나도 방금 왔어.”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민아름은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거 받아.”
“뭐예요?”
“이번에 새로 나온 향수래. 아직 정식 판매되지 않는 거야.”
“고마워요.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났어요?”
“본사에서 받아왔어.”
“아, 본사 갔었구나. 무슨 일로요?”
“명품 브랜드들 만나서 제발 입점 좀 해달라고 사정사정하고 왔지. 요즘 백화점이 다들 명품으로 먹고사는 거 아니까 콧대가 장난 아니야.”
인터넷 쇼핑몰의 발달로 오프라인 유통은 점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백화점 매출은 매년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명품 매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
명품 브랜드를 얼마나 유치하느냐는 백화점의 평판과 집객과도 관련이 있을 정도다.
“그나저나 출장 한번 다녀오니 그사이에 아주 난리가 났네. 그 사람 진짜 대단하네.”
성윤아는 누구를 말하는지 알면서도 확인차 물어보았다.
“그 사람이요?”
“미루 씨 말이야. 지금 다들 만나기만 하면 그 사람 얘기를 하고 있어.”
한미루의 이름이 재계에 최초로 알려진 것은 프리머스 사태 당시.
그때는 그저 멋모르고 사고 친(?) 신입사원 정도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10대 그룹 중 하나를 무너뜨렸으니.
대부분은 그를 컨티뉴 캐피탈 대리인 정도로 알고 있지만, 두 사람은 실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가 바로 컨티뉴 캐피탈을 만든 창업자이자 소유주라는 것.
민아름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잠깐만. 그럼 크리스마스 날 만났을 때부터 경영권을 빼앗을 준비를 하고 있었을 거 아니야?”
“그렇겠죠.”
실제 주식 매수는 그 전에 이뤄졌다.
그녀는 혀를 찼다.
“허얼. 주현진은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앞에서 신분이 어쩌니 하는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었던 거야?”
“그러게 말이에요.”
재벌가에서 태어나면 뭐 하나? 멍청하면 답이 없는 것을.
경영에서 쫓겨난 것뿐만 아니라 현재는 마약으로 구속까지 된 상태. 다시는 재계에 얼굴을 들이밀지 못할 것이다.
민아름은 빨대로 커피를 휘저으며 말했다.
“아쉽네. 그래도 우리 백화점 VIP 고객이었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전혀 아쉬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다른 그룹들 분위기는 어때요?”
“난리도 아니지.”
이번 일로 재계는 두 가지 면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첫째는 바로 금융자본의 부상.
그동안 한국은 재벌 중심의 공고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금융자본의 힘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까지 올라왔다.
실제로 국내외 사모펀드들은 무서울 만큼 빠른 속도로 자금을 모집해 인수합병을 벌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10대 그룹 지주회사를 상대로 적대적 M&A까지 성공시킨 것이다. 이는 재계나 금융계를 통틀어 최초의 일이었다.
둘째는 소액주주들의 변심.
경영자 입장에서 그동안 소액주주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존재들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주식을 사는 대부분의 개인들은 주가가 오르기만을 바라지, 의결권과 주총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상황이 좀 달라졌다.
재벌이든 뭐든 경영자가 잘못하면 갈아치울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주주들은 뭉쳐서 표를 행사하겠다고 나섰다.
그동안 소액주주들을 등한시했던 기업들은 화들짝 놀라며, 부랴부랴 주주환원 정책을 발표하고 주주 달래기에 나섰다.
어쩌면 재계에도 커다란 변화가 시작된 건지도 모른다.
성윤아는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설마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민아름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너 그 사람 또 언제 만나기로 했어?”
“글쎄요. 왜요?”
“그냥 이번 일에 대한 얘기를 좀 듣고 싶어서. 궁금하잖아.”
“······.”
왠지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 * *
큰일 하나를 끝냈기 때문인지 왠지 탈력감이 들었다.
주현진의 체포 소식은 뉴스에서도 짤막하게 다뤄졌다.
이미 갑질 사건 때 이미지를 다 말아먹었기 때문인지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비록 집안은 망했지만 변호사 살 돈은 있을 테니 잘하면 집행유예로 빠져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뭐, 아니면 말고.
어쨌거나 이걸로 치킨 가게의 원한은 갚은 셈인가?
과거의 악연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역시 사람이 은원관계는 분명하게 해야지.
흔히 복수의 끝은 허무하다고들 하는데, 막상 복수를 하고 나니 목구멍에 걸린 고구마가 쑥 내려간 것 같은 상쾌한 느낌이다.
자축할 겸 거실에서 혼자 치킨에 맥주를 먹고 있는데 선우가 집에 들어왔다.
“청승맞게 웬 혼술이야?”
“그냥 마시고 싶어서.”
“치킨은 어디서 시켰어?”
“한정치킨.”
“어! 거기 치킨 끊었다며?”
“다시 먹기로 했어.”
애초에 치킨이 무슨 죄가 있겠나? 그저 사람이 죄지.
회귀한 뒤로 한정치킨은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이제는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다.
이게 K치킨이다!
선우는 맞은편에 앉더니 닭다리부터 들었다.
“요즘 계속 일찍 퇴근하네.”
내 말에 선우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우리 팀 조만간 해체될 것 같아.”
이유는 당연히 판타지아 테일즈가 망해가고 있기 때문. 이미 공지한 업데이트까지는 개발이 이어지겠지만 그 뒤로는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그럼 어떡해?”
“팀 전체가 쪼개져서 다른 팀에 배속되겠지. 그러려면 또 사내면접을 거쳐야 하고.”
LB스튜디오는 부서를 옮기려면 사내에서 면접을 다시 보는 특이한 제도가 있다.
“면접에서 떨어지면?”
“보통은 무급휴가 주다가 자진퇴사를 유도하지. 그렇게 해서 안 나가면 근무태도 등 온갖 트집을 잡아서 내보내고.”
1회차 때도 판타지아 테일즈가 망한 뒤, 선우가 있던 개발3팀은 해체됐다. 그리고 새롭게 배속받은 곳은 브라더후드M 개발팀.
브라더후드M은 과금이 심한 한국 게임 중에서도 그야말로 과금 끝판왕으로 불리는 게임. 1, 2억 원 지르는 정도로는 소액과금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다.
그 덕분인지 출시된 지 몇 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모바일게임 매출 1위를 기록 중이다.
“위에서 슬쩍 브라더후드M 개발팀으로 옮기라는 식으로 말하던데.”
역시나.
“생각 없어?”
“거기 개발팀은 게임 개발과는 거리가 좀 있어.”
“개발팀이 개발 안 하면 뭐 하는데?”
“가챠 확률 계산. 어떻게 하면 유저들에게 최대한 많은 돈을 기분 나쁘지 않게 뜯어낼지 연구하지. 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과금.”
“······.”
공리주의가 아니라, 과금주의인가?
이게 농담이 아니라는 게 신기하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그거 확률 조작이라는 얘기가 있던데.”
“나도 몰라. 경영진들이나 알겠지.”
세계 게임 시장의 판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LB스튜디오 직원 숫자만 4000명이 넘는 대형 게임사.
그런데 좋은 게임을 만들어 세계로 나갈 생각은 안 하고, 한국 내에서 돈 뽑아먹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돈만 잘 벌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런 식의 사업모델이 영원히 지속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뒤에 내놓는 신작들 전부 브라더후드M 짝퉁이라 불릴 정도로 과금 요소를 복붙해서 내놓았고, 나중에는 월 수억씩 지르던 핵과금러들마저 욕하며 떠났다.
여기에 확률조작 문제까지 터지며 결국 LB스튜디오는 망해 중국 게임사에 인수된다. 그리고 선우는 나와 함께 지금 먹고 있는 치킨을 튀기게 된다.
난 선우에게 물었다.
“너 내일 집에 가지?”
내일이면 설 연휴 시작이다.
“하는 일도 없는데 가야지.”
난 차 키를 하나 던져주었다.
선우는 그것을 받더니 나에게 물었다.
“뭐야? 또 차 샀어?”
“응.”
“아니, 집에 포르쉐가 두 대인데 뭔 차를 또 사?”
“너만 좋은 차 타지 말고 집에도 한 대 드려.”
“응?”
난 치킨을 뜯어 먹으며 말했다.
“설을 맞아 효도 좀 하라고.”
“그래서 이 차를 드리라고?”
“그럼 말로만 효도하려고 했어?”
진정한 효도는 말로 하는 게 아니다.
돈으로 하는 게 진정한 효도다.
* * *
난 민족 명절 설날을 맞아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설에는 가족들만 모이고, 추석 때 친척과 다 함께 모인다.
한창 운전하며 가는 도중 여동생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집에 언제 와?]
“지금 가는 중이야.”
[그냥 안 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저번에 왔을 때 아빠한테 1억 5천 빌려 갔다며?]
“응.”
[그거 엄마한테 딱 걸렸어.]
“······.”
우리 집에 1억 5천만 원이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주택담보대출 받아서 해준 거다.
예전에 빚 독촉을 크게 당한 일이 있다 보니, 어머니는 지금도 빚이라면 펄쩍 뛴다. 특히 무슨 일이 있어도 집만큼은 건드리지 말라고 못을 박으셨다.
그런데 걸렸으니, 대충 집안 분위기가 어떨지 짐작이 된다.
지금쯤이면 아버지는 어머니 눈치 보느라 숨도 못 쉬고 계시지 않을까?
고개 숙인 가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 안 돼.”
[뭐가 안 돼?]
빨리 아버지를 구해드려야 한다.
난 힘껏 엑셀을 밟았다.
지금, 효도하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