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저랑 손잡으시죠 (3)
“우려의 시각도 있던데요. 너무 비싸게 샀다고.”
“내부 분위기는 전혀 다릅니다. 권혁준 부회장은 저한테 미루 씨를 소개시켜달라고 난리입니다. 메모리 반도체에 대해 심도 깊은 얘기를 나누고 싶다면서요.”
“······사양하겠습니다.”
권혁준 부회장은 한국 반도체 업계 최고의 권위자다. 그런 사람 앞에서 뭔 말을 하겠는가?
유재호 회장은 차를 마시며 말했다.
“재계는 물론이고 정치권에서도 미루 씨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유명인이 된 모양이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싫어해야 하나?
“좋은 쪽은 아니겠네요.”
유재호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재벌이 경영권을 쥐고 있는 걸 선호합니다. 국내 투자와 고용에 대해 직접적으로 압박을 넣을 수도 있고, 가끔 불러다가 호통치기도 좋으니까요. 게다가 한정그룹은 현 정부와 여당과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지금쯤이면 청와대는 이를 갈고 있을 겁니다.”
“그래요?”
“아시다시피 청와대는 이번 합병에서 철저하게 한정그룹 편을 들었습니다. 이를 위해 국민연금공단부터 산업은행까지 움직였죠.”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나왔으니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는 건가요?”
유재호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뇌물 문제까지 건드리지 않았습니까? 오영환 대통령에게는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는 일이죠.”
차명재단으로 받은 뇌물 의혹은 언론에서 잠깐 보도하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얘기가 쏙 들어갔고, 아무런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냥 루머로 취급하고 넘어가는 분위기다. 하지만 의혹이 불거졌다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사실이니까.
“국정원과 검찰 등 사정기관들이 미루 씨에 대해 조사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털어봐야 나올 것도 없을 텐데요.”
다행히 내가 살아온 삶이라고 해봐야 보잘것없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초중고에 대학까지 나왔고, 성실하게 군대도 다녀왔다.
“누구든지 털면 뭐라도 나오게 되어 있죠.”
“그래도 안 나오면요?”
“그럼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거나 가족까지 털 겁니다. 굳이 사정기관이 아니더라도, 언론만 나서도 사람 하나 매장시키는 건 쉬운 일이죠.”
난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가족은 건드리는 거 아닌데.”
유재호 회장은 피식 웃었다.
“세상에는 그런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정그룹 경영권 분쟁과 관련해 언론에 그렇게 많은 기사가 나왔는데 내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그건 주총 이후에도 마찬가지.
“혹시 유성그룹에서 힘을 써주신 건가요?”
유재호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홍보팀에서 언질 정도는 한 모양입니다.”
“그랬군요.”
유성그룹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언론사 최대 광고주이기도 한 만큼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겠지.
미리 친분을 맺어놔서 다행이다.
“어쨌거나 정권과 맞서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깝게 지낼 필요도 없지만요.”
가뜩이나 바쁜데 정치권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경제와 정치는 애초에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공장 하나만 짓더라도 온갖 인허가를 받아야 하며, 신산업에 진출하고 투자하기 위해서는 각종 규제를 풀고 지원을 해줘야 한다.
만약 정부가 이런 일을 제대로 못 한다면?
그때는 개별 기업이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한계가 분명하다.
10년 후 한국이 첨단산업에서 밀려나고 어려움을 겪게 되는 데에는 정치권의 잘못이 크다.
사실 지금 대통령은 별문제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다음 대통령부터 시작된다.
다행히 아직 대비할 시간이 있으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번 상의를 해봐야겠다.
유재호 회장은 다른 주제를 꺼냈다.
“화안그룹은 재생 에너지 사업에 올인하려는 모양이더군요. HJW에너지를 인수해 태양광, 풍력을 수소와 결합시키려는 것 같던데.”
역시 정보가 빠르다.
그는 나를 보며 물었다.
“혹시 미루 씨가 조언을 한 건가요?”
난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예. 빠른 시일 안에 수소가 차세대 에너지가 될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화안건설이 나선 거군요.”
살짝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유성그룹은 에너지 회사가 없기 때문. 세대교체 과정에서 화안그룹에 종합화학 분야를 매각했다.
주력 사업에 더 집중하기 위함이다.
“수소차가 빠르게 대중화되면 배터리 산업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유성ES는 한국 3대 배터리 회사 중 하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친환경차 시장은 계속 커질 테고, 한동안은 전기차와 수소차가 공존하게 될 테니까요.”
아직까지 연료전지는 배터리에 비해 부피가 크고 가격이 비싸다.
따라서 트럭, 버스 등 상용차는 수소차, 자가용은 전기차가 알맞다. 그리고 수소차에도 배터리는 들어간다.
유재호 회장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10년 전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이 무너진다. 유성도 어찌 될지 모른다. 10년 안에 유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이 사라질 것이다.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라고.”
실제로 그 뒤 유성그룹은 조직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신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때 발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향후 투자에 대해 고민이 많습니다.”
장담컨대 앞으로 10년은 그때보다 더 중요하면 중요했지 덜 중요하진 않다. 이건 국가, 기업, 개인 모두 다르지 않다.
유성전자의 보유 현금은 약 70조 원.
게다가 분기별로 7~8조 원의 영업이익이 발생한다. 1년에 최소 30조 원 이상을 벌어들이는 셈이다.
세상에 이런 기업이 몇 개나 되겠는가?
그러나 시총은 현재 500조에서 제자리걸음 중.
그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모두 경쟁자들이 급부상 중이다. 이에 대한 대응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압도적인 기술력으로 경쟁자들을 따돌리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산업으로 진출하는 것.
“전문가들은 뭐라고 하나요?”
“권혁준 부회장이 그러더군요. 전문가 100명의 말을 듣는 것보다 미루 씨에게 물어보는 게 나을 거라고.”
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유재호 회장과 인연을 맺은 건 동우정밀 때문.
여기에 더해 팹리스사도 추천해주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 하지만 유명 컨설팅 업체에 10억 달러를 내도 받지 못할 솔루션을 공짜로 해준 셈이다.
설마 내가 자선사업이나 애국하는 마음으로 그랬겠나?
투자란 한정된 파이를 나눠 먹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오히려 관련 업종에 함께 투자하면 파이를 더욱 키울 수 있다.
컨티뉴 캐피탈의 주력은 스노우 크래시를 중심으로 한 소프트웨어 회사.
유성전자는 반도체와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하는 하드웨어 회사.
사업영역이 겹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수십조 원의 현금을 쥐고 있는 건 덤이고.
이런 기업이 파트너가 되면 든든하다.
동우정밀을 비롯해 일련의 일들을 거치며, 내가 하는 말을 흘려들으면 안 되는 것 정도는 깨달았을 것이다.
미래에 어떤 산업이 잘 될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지.
“데이터센터 분야에 진출하는 건 어떤가요?”
예상치 못한 얘기였는지, 유재호 회장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데이터센터요?”
“예.”
스마트폰 등장 이후 PC 판매량은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실제로 집에 PC가 없는 집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덕분에 AMR과 쿨컴 등 스마트폰 AP 관련 반도체 회사들은 폭풍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안텔과 ADM은 망했을까?
천만에.
여전히 잘나가는 중이다.
왜냐하면 서버 수요가 폭발했기 때문.
스마트폰이 보급되며 데이터 통신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렇다면 그 많은 데이터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바로 서버다.
그 서버를 모아놓은 게 데이터센터고.
데이터양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만큼, 지금도 전 세계에서는 끝없이 새로운 데이터센터가 지어지고 있다.
유성전자 역시 그 수혜를 받은 기업 중 하나.
덕분에 300조에 머물던 주가가 500조까지 뛰었다.
사실 유성전자가 데이터센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내용, 그리고 유성전자 IT기기 백업용으로만 쓰일 뿐이다.
“데이터센터라는 게 건물을 짓고 반도체만 넣는다고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시스템 관리, 정보 처리, 보안 등 운영을 위한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한다. 만약 데이터센터가 다운되거나 해킹을 당하기라도 하면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빅테크 기업들은 수십 년에 걸쳐 이 분야에서 노하우를 쌓았다. 이제 와서 유성전자가 이를 따라잡기는 무리다.
하지만······.
“그건 문제없습니다. 저희한테 스노우 크래시가 있으니까요.”
“컨티뉴 캐피탈이 인수한 클라우드 회사 말이군요. 그런데 스노우 크래시도 직접 데이터센터를 운영한 경험은 없지 않습니까?”
“그건 시드가······ 아니, 루카스 CEO가 알아서 잘할 겁니다. 안 그래도 스노우 크래시는 지금 빅3와 결별하고 독자 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유성그룹이 직접 데이터센터를 구축한다면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잠시 생각하던 유재호 회장은 입을 열었다.
“데이터센터가 유망 산업이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시장의 경쟁자들 아니겠습니까?”
이 분야의 최강자는 모두가 알다시피 NS와 AMZ. 그리고 그다음이 구블.
클라우드 빅3는 지금도 경쟁적으로 데이터센터를 건설 중이다.
그 뒤를 잇는 건 지니바바와 위챈트.
이 둘은 중국 중심으로 사업을 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내수시장만으로도 4위, 5위를 차지한다.
이 다섯 기업 모두 유성전자보다 시총이 높은 그야말로 세계관 최강자들이다.
데이터센터 사업에 진출하면 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유성전자가 데이터센터를 만들면 스노우 크래시가 전부 임대해 운영하고 수익을 나누겠습니다. 시장 진입을 빠르게 하려면 관련 기업을 인수하는 걸 추천드립니다.”
건물과 설비 등 하드웨어 쪽 운영은 유성전자가 맡고, 소프트웨어 쪽은 스노우 크래시가 맡아서 하면 된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로군요. 유성전자가 직접 데이터센터 분야에 진출하면 다른 기업들의 견제를 받게 될 겁니다.”
D램과 낸드 플래시를 생산하는 유성전자는 데이터센터의 가장 중요한 부품 공급사. 이런 회사가 직접 데이터센터 분야에 진출하면 관련 업계에는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한마디로 고객과 경쟁하게 되는 셈.
“유성전자는 이미 여러 분야에서 고객과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경쟁이 심해지면 심해졌지, 약화되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기업들 눈치만 보다가는 투자 타이밍을 놓치게 될 겁니다.”
유재호 회장은 갈등하는 표정이었다.
난 쐐기를 박듯 말했다.
“통신은 점점 빨라지고 데이터센터의 수요는 무한하게 늘어날 겁니다. 미래는 클라우드에 있습니다. 이 시장을 놓친다면 유성전자는 그저 부품사 중 하나로 남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