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한정물산 주주총회 (2)
안건에 찬성한다는 한미루의 발언에 여기저기서 고성이 터져 나왔고, 일부 사람들은 손에 든 자료를 집어던졌다.
주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김성권 대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뭐 하고 있습니까? 어서 표결 결과 발표하세요!”
그 말에 주철진 부회장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멈춰! 당장 주총 중단해!”
일단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다음 주현진을 여기로 끌고 오든 어쨌든 해서 다시 표를 뒤집으면 된다.
자신에게 불리해졌다고 주총을 중단한다면 이는 한정물산이 주식회사가 아니라 총수일가의 사기업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회사를 빼앗기는 것보다는 나았다.
한정물산 측 인사들도 일제히 일어나 소리쳤다.
“중단해!”
“발표하지 마!”
“주총 멈춰!”
“멈춰!”
윤한빈 이사는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초유의 사태였다. 이대로 계속 진행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중단하고 위임장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 걸까?
그걸 결정하는 것은 의장의 권한이었다.
그 순간, 윤한빈 이사는 한미루와 눈이 마주쳤다. 한미루는 입 모양으로 뭔가를 말했다. 떨어져 있지만 마치 귓가에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약속을 지키세요.’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어째서 그날 자신을 찾아왔는지, 그때 한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설마······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의 손에 놀아난 거나 다름없었다.
놀라움을 넘어 경외감마저 느껴졌다.
이 주총은 총수일가의 완벽한 패배였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한정물산 관계자들은 아예 의사봉을 빼앗을 기세로 단상으로 뛰어들었다.
윤한빈 이사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의사봉을 두드렸다.
“해당 안건은 가결되었습니다.”
그 말에 소란을 피우던 모두가 한순간 입을 다물었다. 마치 주총장 안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리고······.
멈췄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는 순간.
환호와 탄식, 함성과 고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한정그룹 사람들은 망연자실했고, KSGI와 엘리언트 관계자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축하했다.
“와아아!”
“이겼다아!”
“당장 때려치워!”
“이 주총은 무효야!”
“경찰 불러!”
주철진은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 그는 제국의 후계자였다. 한정물산을 포함해 한정그룹이라는 거대한 그룹이 자신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는 평민으로 전락했다.
지금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어째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친동생의 배신으로 인해!
주총에서 표결로 결정 난 걸 이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는 한정물산 부회장직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 자리는 다른 누군가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절망하고 있는 그에게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다가왔다.
한미루는 그에게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제가 말했잖아요. 가족은 건드리는 거 아니라고.”
그러게 동생을 왜 때렸어?
* * *
[(속보) 한정물산 주총, 총수일가의 완패!]
[주철진 부회장, 대표이사직 상실!]
[한정그룹, 헤지펀드에게 경영권 넘어가나?]
[재계, 경영권 방어에 비상!]
[전경련 성명 발표,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
[다른 대기업들도 언제든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어······]
주총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가 쏟아졌다.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주총 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언론사들이 한정그룹의 승리를 예측했다.
그런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주총 지렸다. 진짜 개꿀잼이네.
-미쳤다. 마지막에 반전 ㄷㄷㄷ
-동생이 형 뒤통수를 칠 줄이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ㅋㅋ 동생이 찬성할 거라 생각하고 멋대로 위임장 썼는데, 저쪽에서 진짜 위임장을 들고 나옴.
-그러니까 대체 왜?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집안 꼴 잘 돌아간다~
-뭐 이런 콩가루 집안이 다 있냐?
-ㄷㄷㄷ 저게 말이 되나? 믿을 수가 없음.
-재벌가가 다 그렇지 뭐. 오히려 형제끼리 사이좋은 재벌가가 더 드물지 않나?
-그런데 주현진은 왜 갑자기 변심한 거지?
-컨티뉴 캐피탈이나 KSGI에 뒷돈 받았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계좌 까봐라! 분명 나온다.
-아니, 주주가 자기 표 행사한 건데 뒷돈을 받았든 안 받았든 뭔 상관?
주총장을 걸어 나오는 김성권 대표를 향해 기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번 주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과를 예상하고 계셨습니까?”
“승리한 소감이 어떠십니까?”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그는 십여 개의 마이크에 대고 담담하게 말했다.
“범죄를 저지른 경영자를 경영에서 배제하는 것은 글로벌 스탠다드입니다. 횡령과 배임 행위로 주주들의 재산에 피해를 끼친 경영자에게 더 이상 경영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 주총 결과는 윤리경영을 요구하는 주주들의 의사가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KSGI는 그동안 여러 차례 밝힌 대로 주주 권익 강화를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주총이 끝난 뒤.
난 조용히 주총장을 빠져나왔다.
건물 주변에는 기자들과 지지자들로 인해 난리도 아니었지만, 조금만 벗어나니 금방 조용해졌다.
난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를 한 캔 사서 테라스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따서 바로 마셨다.
“하아.”
내내 목이 탔는데 이제 좀 살 것 같다.
한숨 돌리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난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아, 윤아 씨.”
[기사 보고 있어요. 정말로 이겼네요.]
“윤아 씨가 도와준 덕분이에요.”
[뭘요. 그런데 아슬아슬했네요. 만약 저쪽이 1퍼센트만 더 매수했다면 어쩔 뻔했어요?]
“그럼 어쩔 수 없었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적대적 M&A에서 상대의 정보를 파악하는 건 필수다.
이런 정보전은 아무래도 경영권을 쥐고 있는 쪽이 유리하다. 아마 우리 쪽 지분율에 대해 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주총 이후에는 주가는 폭락하게 되어있다.
매수하면 할수록 손실이 누적되는 만큼, 이긴다는 확신만 서면 그 이상은 매수할 이유가 없다.
그래도 정말 아슬아슬했다.
[축하드려요. 또 해냈네요.]
“고마워요.”
난 전화를 끊고, 남은 맥주를 다 마셨다.
술기운과 함께 흥분이 올라왔다.
이제야 이겼다는 실감이 났다.
“하하하!”
* * *
난 KSGI 본사에서 김성권 대표를 만났다.
주총이 끝난 뒤 각종 인터뷰에 시달린 그는 온몸에 힘이 다 빠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100퍼센트 기적이 일어나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게 이런 거였군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직도 잘 믿기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아마 모든 게 의문이겠지.
난 그에게 주총 며칠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며칠 전에 제주도를 다녀왔어요.”
* * *
한정그룹이 궁지에 몰릴수록 주현진의 책임론은 점점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운전기사에 대한 폭언, 소액주주 비하, 부정청탁 의혹 등은 전부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언론에서는 여전히 녹취에 대한 내용이 거론됐고, 한정그룹은 여론을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백약이 무효했다.
가족들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점점 차가워졌고, 주현진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하지만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여론은 가라앉을 것이다.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나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어느 날, 주철진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동생에게 비행기 티켓을 한 장 내밀었다.
“잠깐 제주도에 내려가 있어.”
“예?”
놀라는 주현진을 향해 주철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알다시피 주총이 얼마 안 남았잖아. 괜히 밖에 돌아다니다가 기자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곤란해지지 않겠어?”
“그건······.”
“휴가라고 생각하고 당분간 거기서 푹 쉬고 있어. 심심하면 여자도 몇 명 데려가고. 상황 다 정리되면 부를 테니까.”
“······.”
말이 좋아 휴가지 사실상 유배였다.
게다가 ‘주총이 끝난 뒤’가 아니라 ‘상황이 다 정리된 뒤’다. 그게 과연 언제일까?
뭐라 말을 하려던 주현진은 형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건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거절할 권한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날로 주현진은 짐을 싸서 제주도로 내려왔다.
제주도 서귀포시의 한 별장.
시내와는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내부에 모든 게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지내는데 딱히 불편한 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이곳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기에 있는 동안에 회사 내에서 그의 존재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경영권 분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주총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누구도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한정그룹과 관련해서는 뉴스로 겨우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매일 술 없이는 자기 힘들 지경이었다.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분노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재벌가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했고, 갖고 싶은 건 얼마든 가졌다.
하지만 이제는······.
‘이놈이고 저놈이고 모두 날 바보 취급해?’
살면서 이런 대접을 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원인은 단 하나였다.
“한미루······.”
빠드득!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미루는 운전기사의 폭로를 도왔고, 자신과 있었던 일을 주철진에게 고자질했다. 그놈만 아니었어도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그놈만 아니었어도······.’
만약 그날 백화점에서 그놈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까?
왠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상대는 집요하다고 할 정도로 자신을 노렸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뭔가 꺼림직했다. 마치 시꺼먼 악의와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짓밟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서, 설마 우연을 가장해 일부러 나한테 접근한 건가?’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날 만나기 전까지는 이름조차 몰랐었는데.
‘이번 일에 날 이용해 먹기 위해서?’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주현진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 새끼 죽인다!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그는 몇 번이고 한미루를 조각조각 찢어 죽이는 상상을 하며 술을 마셨다.
대낮부터 그렇게 취하고 있는데, 방에서 속옷 차림의 여성이 걸어 나왔다.
“또 술이야?”
“여기서 할 게 뭐 있어? 너도 마셔.”
세아는 슬쩍 말했다.
“오빠, 나 서울 좀 다녀오면 안 돼?”
“서울은 왜?”
“친구들 좀 만나게. 쇼핑도 좀 하고.”
“친구 만나고 싶으면 여기로 불러. 쇼핑도 여기서 하고. 카드 줄 테니까 나가서 사고 싶은 거 다 사.”
“칫! 여기서는 할 거 별로 없는데.”
처음에는 같이 제주도 가자는 말에 좋다고 따라왔다.
용돈이라는 명목으로 돈도 받았기에 수입도 가게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처음 며칠은 좋았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자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클럽과 파티를 전전하던 날들이 그리웠다.
친구들이 SNS에 올린 사진들을 볼 때마다 당장이라도 서울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주현진은 그녀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마저 떠나고 혼자 남으면 정말로 심심해서 미칠지도 모르니까.
“나 좀 더 잘게.”
세아는 방으로 들어갔고, 병이 빈 걸 확인한 주현진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냉장고에 있는 술을 꺼냈다.
그 순간,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누가 날 찾아온 거지?’
혹시 집이나 회사에서 사람이 왔나?
주현진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주현진 씨.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
문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할 말을 잃었다. 한순간에 술이 확 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죽이고 싶은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너, 너 이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