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한정물산 주주총회 (1)
주주총회는 누가 참석할까?
당연히 주주가 참석한다. 단 한 주만 가지고도 참석할 수 있다 보니 주총장에는 온갖 사람들이 몰려왔다.
대중의 관심뿐 아니라 정치권의 관심까지 집중된 사안인 만큼 국회의원까지 등장했다.
우리국민당 정한수 국회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번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경영진들은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주주와 직원을 위한 회사로 거듭나야 합니다. 기업은 단지 돈을 버는 곳이 아닌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곳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윤리적 경영을 해야 합니다. 저는 이를 위한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째, 경영진의 도덕 교육 의무화입니다. 경영진을 뽑을 때 경영능력뿐 아니라 봉사활동과 기부활동의 점수를 반영하여······.”
거의 초등학교 아침 조회 시간 교장선생님 훈화만큼이나 감명 깊은 얘기가 이어졌다.
경영진들은 다들 입을 다문 채 경청했지만 일반 주주들의 반응은 달랐다. 말이 끝도 없이 늘어지자 여기저기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그만 좀 해라!”
“너만 마이크 잡냐?”
“국회나 가서 떠들어!”
“세금 도둑놈이 어디서 윤리경영을 말하고 있어?”
“사퇴하세욧!”
“아, 아니, 지금 제가 말하고 있잖아요. 조용히 좀 하세요!”
계속되는 항의에 정한수 의원은 목소리를 높였지만, 주주들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뭐여? 지금 국민한테 큰소리친 거여?”
“주민소환 한번 해봐?”
“국회 출석은 제대로 안 하면서 여기 와서 왜 개소리야?”
“야!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주총에서는 주주가 갑이다.
아무리 국회의원의 권위를 내세워봐야 예비군 앞에서 장성이 별 자랑하는 꼴이다. 결국 항의가 계속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말을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흠흠! 아무튼 이번 일을 계기로 국가와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으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이걸로 끝이냐면 그건 아니다.
총수일가의 일원이라도 되는지 거수기처럼 무조건 찬성만 하는 사람, 죽어라 반대만 하는 사람, 재무제표를 들여다보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 그냥 깽판 놓는 사람, 바닥에 드러눕는 사람, 욕하는 사람 등등.
그렇다 보니 이런 광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의 있습니다!”
“무슨 주주총회를 이따위로 해? 여기가 독재국가야?”
“공산당이야 뭐야?”
“다른 주주의 말씀도 경청해주시기 바랍니다.”
“거 좀 조용히 합시다!”
“너 몇 살이야?”
“쉰여덟이다!”
“난 예순여섯이다!”
“나이 많아서 좋겠네! 머리털도 없는 놈이!”
“뭐, 새꺄? 내 마빡이 넓은데 뭐 보태준 거 있어?”
“내가, 임마! 느그 회장이랑! 밥 묵고! 사우나도 가고! 다 했어, 임마!”
“에헴! 내가 누구냐면 지리산 왕코도사올시다! 만덕산 폭포 밑에서 도를 닦다가 계시를 받고 오늘 주총에 참석했습니다.”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여기 발언권 좀 주세요!”
완전 개판이나 다름없다.
대기업 주주총회에서 이게 말이 되는 장면인가 싶지만, 주총 시즌만 되면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은 재빨리 다가가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들은 끌려 나가면서도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 손 놔! 내가 누군지 알아? 나 한정물산 주주야!”
“주주를 쫓아내는 게 어디 있냐?”
“주주 탄압 반대! 주주의 권익을 보장하라!”
“감히 주주를 무시해? 이러고도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냐?”
“이따위로 할 거면 당장 주총 때려치워!”
“이놈들! 만덕산 산신령께서 노하신다!”
한번 밖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선우는 그 모습을 보며 나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은 어디로 끌려가는 거야?”
“보통은 주총이 끝날 때까지 지하 감옥에 가둬놓지.”
내 말에 선우는 깜짝 놀랐다.
“진짜?”
“응. 뻥이야.”
보통은 5만 원짜리 몇 장 쥐여주고 돌려보낸다.
애초에 저 사람들이 정말로 주주의 권익을 위해 저러겠나? 그냥 의사 진행을 방해해 돈을 뜯어내려고 저러는 거다.
김성권 대표는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오늘 주총은 길어지겠네요.”
아직 안건은 하나도 처리를 못 했는데, 장내를 정리하는 데만 다섯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나갈 사람들 다 나가고 나자 슬슬 진행이 되기 시작했다.
“원안대로 가결되었습니다.”
“가결되었습니다.”
“가결······.”
안건이 올라오는 족족 처리됐고, 윤한빈 이사는 의사봉을 두드렸다.
앞에 나오는 안건에는 다들 별 관심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안건.
바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의 이사직 박탈’이다.
* * *
오전 일찍 시작한 주총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5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난 화장실을 다녀왔다.
잠시 한숨 돌리는데 김성권 대표가 다가왔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끝났군요.”
“뭐가요?”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졌습니다. 저쪽이 참석 지분의 과반을 확보했습니다.”
“어느 정도 차이가 나나요?”
“2퍼센트가 조금 넘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만큼 더 샀으면 되지 않았겠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쪽이나 이쪽이나 바닥까지 표를 긁어모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는 말도 있잖아요.”
김성권 대표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적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라야겠군요.”
정말이지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상황을 뒤집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기적이란 가만히 앉아 기다린다고 일어나지는 않죠.”
“그럼요?”
“다행히 제가 100퍼센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김성권 대표는 의문을 나타냈다.
“그게 뭡니까?”
“그건······.”
내가 웃으며 뭔가 말하려고 하자, 그가 먼저 말했다.
“설마 지켜보면 알 거라고 말하려는 겁니까?”
“······.”
이젠 잘 아네.
* * *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났다.
주주들은 다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주총에 모두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다들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윤한빈 이사가 말했다.
“다음은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이사직을 박탈하는 것에 대한 안건입니다.”
드디어 모두가 기다렸던 안건이 올라왔다.
“해당 안건에 행사한 표는 전체 주식의 84.5퍼센트입니다.”
보통 주총 참석 표는 약 70퍼센트.
84.5퍼센트면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9.9퍼센트를 가진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포기했다.
공식적으로 의결권을 포기한 이들까지 합친다면 사실상 거의 모든 주주들의 표를 던진 것이다.
“양측 대리인이 위임장을 검토해 확인한 결과 반대가 43.4퍼센트, 찬성이 41.1퍼센트로 나왔습니다.”
그 말에 주총장 안에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2.3퍼센트 표 차이로 총수일가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 예상하고 있었는지 주철진 부회장과 김성권 대표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철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상처뿐인 승리로군.’
한 주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주식을 매수했다. 이를 위해 한정그룹의 비자금이 총동원됐다.
그 비자금은 원래 그가 회장직과 함께 물려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에 전부 쏟아부었다.
차명으로 가지고 있던 자산을 헐값에 매각해 현금을 확보했고, 그걸로 말도 안 되는 금액에 한정물산 주식을 사들였다.
손실이 얼마나 될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1조 가까이 날아간다고 봐야 한다.
승리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삼자연합이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김성권 대표는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경영에 간섭할 것이다.
약속한 주주환원 정책도 문제다.
우호세력과 소액주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한정물산의 땅과 비핵심 계열사 주식 등을 처분해 배당으로 돌리겠다고 약속했다.
주머닛돈이 쌈짓돈이라고, 회삿돈이 회사에 있으면 그건 총수일가의 돈이다.
그런데 그걸 배당으로 나눠주면?
그때는 남의 돈이 된다.
어쨌거나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지금은 일단 경영권을 지켜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윤한빈 이사는 의사봉을 들어 올렸다.
“이의 없으십니까? 이번 정관 개정 안건은 부결······.”
난동 피울 사람들은 진작 다 나간 터라 더 이상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제 정해진 결과를 발표만 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누군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이의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
손을 들어 올린 사람은 다름 아닌 정장을 입은 20대 청년이었다.
의사봉을 두드리려던 윤한빈 이사는 손을 멈췄다.
“발언하십시오.”
한미루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붙잡고 말했다.
“이번 안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다릅니다. 하지만 저희는 모두 같은 한정물산의 주주이고, 한정물산의 성장과 발전을 바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결과에 승복하고, 주주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좋겠습니다.”
주철진 부회장이 일어나서 말했다.
“주총은 주주들의 의사를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결정된 일에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 역시 앞으로도 한정그룹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한미루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는 발언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주철진은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한미루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저희 쪽에서 위임장을 검토해본 결과 심각한 문제가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합니다.”
주철진 부회장은 바로 항의했다.
“주총 전에 이미 참가주식을 확정지었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윤한빈 이사가 물었다.
“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한정그룹 측에서 제출한 위임장 하나가 위조된 걸로 확인됩니다. 해당 주주의 진짜 위임장은 제 손에 있습니다.”
한정그룹 측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패배가 확정되니 괜한 트집을 잡으려는 건가?’
윤한빈 이사가 다시 물었다.
“누구의 위임장입니까?”
“주현진 HJ푸드 전 이사의 위임장입니다.”
그 말에 장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대부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고, 일부는 ‘잘못 들었나’하는 표정이었다.
주현진 전 이사는 다름 아닌 주철진 부회장의 동생이다. 그런데 한미루는 그 위임장이 자신의 손에 들려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주철진 부회장은 소리치듯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주현진 전 이사의 위임장은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한미루가 그에게 물었다.
“그거 주현진 씨가 직접 쓴 거 맞습니까?”
“뭐······?”
“혹시 가족이라는 이유로 본인 의사도 묻지 않고 멋대로 위임장을 쓴 거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건 사문서위조에 해당하는 불법행위입니다.”
“······.”
“이 위임장은 이틀 전 법무법인 공증 아래 주현진 씨가 직접 작성했습니다. 법적 절차에 따라 정식으로 받은 위임장인 만큼 효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거짓이라면 법에 따라 처벌받겠습니다.”
한미루는 단상 위로 올라가 의장에게 위임장을 제출했다.
그것이 전달되기 전 주철진 부회장은 단상으로 뛰어올라 빼앗듯 낚아채서 훑어보았다. 1.4퍼센트 주식에 대한 의결권을 한미루에게 위임한다는 내용이었다.
위임장에는 주현진의 서명은 물론이고, 공증을 맡은 변호사의 직인까지 찍혀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게 이놈 손에 있는 거지?’
이전까지는 2.3퍼센트 차이로 안건이 부결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1.4퍼센트가 반대에서 찬성으로 움직이면 어떻게 될까?
고작 0.5퍼센트 차이로 결과 뒤집힌다!
주철진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위임장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사실일 리 없어. 이게 사실일 리가······.”
놀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철진은 한미루를 쳐다보았다.
‘뭘 어떻게 한 거지?’
무슨 짓을 했기에 주현진의 위임장을 손에 넣었단 말인가?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한미루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입에 모든 게 달려있다.
지금이라면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수 있었다. 대체 얼마를 받기로 했는지는 몰라도, 그 몇 배라도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그런데······.
한미루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현진 주주의 위임인으로서 해당 안건에 찬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