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주총 준비 (2)
그런데 이연지의 전남편이 회사로 찾아와 돈을 요구하며 난동을 피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녀를 다른 부서로 전출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주현빈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며 단호하게 반대했다.
오히려 직원을 보호하는 것은 회사의 의무라며, 법무팀을 동원해 전남편이 처벌을 받고 다시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졌다.
윤한빈은 이제까지 여자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여자보다는 일에 대한 성공을 우선시했고,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는 연애조차 제대로 못 해봤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번 불이 붙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 나이에 이런 열정이 남아있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였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진짜 남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생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가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
세간이 보기에는 그저 불륜일 뿐이다.
그것도 대기업 대표이사와 비서의 불륜.
걸리면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멈춰야 했다.
하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높은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아랫도리 한번 잘못 놀려 추락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이전에는 그런 행동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평생을 바쳐 쌓아온 커리어를 겨우 여자 하나 때문에 망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런데 자신이 이 상황이 되어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기 싫어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사실이 알려지면 단지 추문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경계하는 그에게 한미루가 말했다.
“안심하세요. 전 그저 일 얘기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일 얘기?”
“주총 의장을 맡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정체를 밝혔을 때부터 이것 때문일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주총에서 삼자연합의 편을 들어달라는 건가?”
그러자 한미루는 실소를 흘렸다.
“하하!”
그가 왜 웃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상대는 웃음을 멈췄다.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런 부탁을 드리면 들어주실 수는 있나요?”
“······.”
주총 의장은 진행만 할 뿐, 스스로 판단하거나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다. 설사 그를 회유한다 한들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아무것도 없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가진 한정물산 주식이 목적인가?”
한미루는 또다시 웃었다.
“공시 보니까 5600주 가지고 계시던데.”
5600주면 현재 시세를 기준으로 10억이 넘는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최근의 주가 폭등 덕분. 비율로 보면 전체의 0.01퍼센트도 안 된다.
십시일반이라고, 있으면 좋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그럼 뭐지? 한정물산이나 주철진 부회장의 비리라도 알려달라는 건가?’
“대체 원하는 게 뭔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한미루는 태연하게 말했다.
“원하는 건 단 하나. 바로 공정입니다.”
“공정?”
“예.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진행해주셨으면 합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주총에서는 주주들의 표가 모든 걸 결정합니다. 더 많은 표를 확보한 쪽의 손을 들어주시는 게 공정이죠.”
“······.”
너무 상식적인 얘기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굳이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주총이란 안건에 대해 주주들이 모여 투표하는 행사. 만약 투표 결과를 무시하고 멋대로 진행했다가는 욕을 먹는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정말로 그걸 원한다고?”
“예.”
한미루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한 가지만 생각하세요. 어느 쪽이 더 많은 표를 확보했는지. 그러면 두 분 모두에게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여기서 ‘두 분’이란 그와 이연지 비서를 뜻할 것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
“그 순간이 되면 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실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얘기는 그냥 잊어주시면 됩니다. 약속해주실 수 있습니까?”
여전히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지극히 타당한 요구인 만큼 거절할 이유도 없다.
“약속하지.”
“감사합니다.”
윤한빈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연지 비서에 대해서는······.”
한미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그게 누군가요?”
뭐라 말을 하려던 윤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쉬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했습니다. 그럼 주총 날 뵙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한미루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런데 한 가지만 조언을 드려도 될까요?”
“뭔가?”
“하루빨리 마음을 정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여자의 촉은 무섭거든요.”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이제까지 이 문제에 대해 누구에게도 마음 터놓고 얘기하지 못했다. 그런데 왠지 이 청년이라면 정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한미루는 잠시 생각한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삼자연합이 승리하면 이사님을 대표이사직에서 해임하고 유럽 지사 중 한 곳으로 좌천시킬 생각입니다. 어쩌면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 * *
한정물산 대표이사 윤한빈.
내가 애널리스트로 일했다고 해도 모든 경영자들을 다 외우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유는 비서와의 불륜 관계가 들통났기 때문.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아내는 회사로 쳐들어가 불륜 상대를 찾아 죽여버리겠다며 난동을 피웠다.
당시 뉴스에 나올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윤한빈은 그 일로 인해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물러났다. 그래도 이혼 후 불륜 상대와 결혼한 걸 보면 정말로 사랑하긴 했나 보다.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진정한 로맨티스트다’와 ‘조강지처를 버린 쓰레기다’로 의견이 나뉘었다.
뭐, 언제나 그렇듯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아니겠나?
윤한빈 이사를 만나고 나서 집에 돌아오니, 선우가 거실 소파에 누워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역시나 한정물산 주총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요즘은 맨날 저 얘기만 나오네. 나도 한정물산 주식 좀 살 걸 그랬나?”
“살 돈은 있고?”
“없긴 하지.”
그 이유는 그동안 모은 돈에 대출까지 받아 컨티뉴 캐피탈에 털어 넣었기 때문. 월급 받는 족족 마이너스 통장 갚는데 쓰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부는 왜 저렇게 경영권이 넘어가는 걸 반대하는 거야?”
사실 경영권을 누가 갖든 한국기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에이오일이 아람코에 인수되었어도 여전히 한국 재계 순위를 꿰차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재벌이 경영권을 쥐고 있는 편이 컨트롤하기 쉽잖아. 가끔씩 청문회장에 불러다가 투자랑 고용 좀 하라고 호통치기도 좋고.”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뇌물을 처먹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이길 것 같아?”
“아직 잘 몰라.”
이건 내가 아는 미래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나야말로 결과가 궁금하다.
난 대충 짐을 챙겼다.
그 모습을 본 선우가 물었다.
“어디 가?”
“휴가 좀 다녀오게.”
“주총이 코앞인데.”
“그러니까 그 전에 머리 좀 식히려고.”
난 휴가를 떠나기 전 성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윤아 씨.”
그녀는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루 씨. 무슨 일이에요?]
“한 가지 알아봐 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 * *
소공동 한정물산 본사에서 임시 주주총회가 열렸다.
연말부터 끌어온 경영권 분쟁 사안은 이번 주총을 통해 결정 날 것이다. 워낙 큰 사건인 만큼 내외신기자들이 잔뜩 몰려왔다.
주총은 다수 주주들의 뜻에 따라 비공개로 진행됐다. 증거를 남기기 위해 촬영은 하지만 언론에 공개하지는 않는다.
기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눴다.
“박 기자, 오늘 어떻게 될 것 같아?”
“아무래도 총수일가가 이기지 않겠어?”
“하긴, 위임장 포함해서 40퍼센트 이상 끌어모은 것 같던데.”
“이번에 비자금 다 털어서 주식 매수했다는 얘기가 있어.”
“그럼 이겨도 수천억 손실을 보는 거 아니야?”
“그래도 경영권 빼앗기는 것보다 났겠지.”
“그러게 진작 경영 좀 제대로 하지.”
“그걸 떠나서 범죄만 안 저질렀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엄밀히 말하면 삼자연합은 총수일가를 경영에서 쫓아내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저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이 사내, 사외이사를 맡을 수 없게 정관을 개정하자는 것뿐이다.
주민재 회장과 주철진 부회장이 여기에 딱 걸리는 거고.
기자들은 대체로 총수일가의 승리를 점쳤다.
잡담을 나누던 기자들은 주철진 부회장과 김성권 대표가 나타나자 일제히 달려들어 마이크를 내밀었다.
주철진 부회장은 짧게 말했다.
“주주 여러분들의 현명한 판단을 부탁드립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열심히 경영에 매진하겠습니다.”
김성권 대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입니다. 주식회사의 주인은 총수일가가 아닌, 주식을 가진 주주입니다.”
* * *
난 주총 시작 직전 김성권 대표를 만났다.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초췌해진 것 같은 모습이다. 눈 주변이 퀭하니 들어갔지만, 눈빛만큼은 생생하게 빛났다.
난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이 이기든 아주 근소한 차이일 겁니다.”
이번 주총에서 지면 다음 기회는 없다. 그때는 국민연금이 저쪽 편을 들어줄 테니까.
김성권 대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까지 적대적 M&A를 여러 차례 해봤지만 오늘만큼 긴장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이 판에 건 금액만 해도 조 단위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주총에서 이길 경우 한정물산 지분 9.2퍼센트를 2조 5천억 원에 넘기기로 계약을 맺었다.
만약 진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장내에서 매각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주가를 낮췄을 때 매수한 만큼 큰 손실을 보지는 않겠지만, 큰 이익을 얻기도 힘들 것이다.
5천억이나 건지려나?
다시 말해 통과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2조 원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이겨야 한다.
난 주총장으로 들어왔다.
동호 선배와 김범석은 일찌감치 안에 들어와 있었고, 선우도 궁금하다며 연차를 내고 참석했다.
“오! 나 주총장 처음 와봐.”
“주식을 사더라도 직접 올 일이 없긴 하지.”
잠시 후, 사라가 도착했다.
“오늘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되네요.”
아마 오늘 일은 라시드 왕자에게 그대로 보고가 들어갈 것이다.
참석 표가 워낙 많다 보니, 양쪽의 위임장을 확인하는 작업에만 세 시간이 걸렸다.
주철진과 주혜진은 주총에 참석했지만, 주현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앞자리에 앉아있는 주철진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주총장은 만석이었다. 좌석은 물론 계단까지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주총 의장을 맡은 윤한빈 대표이사가 말했다.
“한정물산 임시 주주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선언으로 드디어 주총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