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주총 준비 (1)
매수주문이 끝없이 이어지며, 한정물산 주가는 20만 원을 돌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 30만 원까지 돌파했다.
시총도 8배 가까이 오르며 당당하게 코스피 1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동호 선배는 혀를 내둘렀다.
“대체 이 가격에 사는 놈들은 뭐지?”
“한정그룹 쪽에서 비자금 털어서 매입하나 보죠.”
재벌들이 재산이 많다고 해도 대부분 주식에 묶여있고 현금은 거의 없다. 그러니 그동안 알뜰살뜰 모아놓은 비자금을 다 털어서 주식을 매수하고 있을 것이다.
주총이 끝나면 주가는 폭락한다.
그나마 삼자연합이 승리한다면 모르겠지만, 총수일가가 경영권 방어에 성공하면 더욱 크게 폭락한다.
최소 반토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속이 심하게 쓰리겠지.
“이건 뭐 프리머스 사태 때보다 더 난리네.”
사실 사모펀드가 1조를 날려 먹든 말든 돈을 투자하지 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남의 얘기다.
하지만 국내 10대 그룹 중 하나가 투기자본 손에 넘어가게 생겼다고 하니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그리고······.
드디어 주총을 앞두고 주주명부가 폐쇄됐다.
주주명부가 폐쇄되면 주총 당일 소유주가 의결권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주주명부 폐쇄 시점을 기준으로 보유한 사람이 의결권을 행사한다.
이제 주식을 사봐야 의결권 행사를 할 수 없는 만큼, 매수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위임장은 효력이 있다.
주주명부가 폐쇄되자 343,000원까지 올랐던 주식은 20퍼센트 넘게 하락하며 다시 20만 원 대로 내려왔다.
동호 선배와 김범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팔아치웠다.
“으하하! 이게 대체 얼마야?”
4만 원일 때부터 긁어모았으니 주당 30만 원은 먹었다. 그동안 투자한답시고 날려먹은 돈 복구한 건 물론이고 몇 년 치 연봉을 한 번에 벌었다.
“DA증권 다닐 때보다 낫죠?”
“그럼!”
동호 선배는 기사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총수일가 쪽이 유리하다는 얘기가 많은데.”
당일 결과를 봐야겠지만 근소한 차이로 총수일가가 앞서고 있다는 전망이 우세했다. 상당수의 전문가들 역시 한정그룹의 승리를 예측했다.
“재벌그룹을 상대로 한 적대적 M&A가 성공한 적이 없으니까요.”
이건 대한민국의 법칙과도 같다.
난 그 법칙을 깨려는 거고.
“만약 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여기는 무사한 거야?”
이번 건은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의 첫 업무. 잘못되면 향후 투자계획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 경우 굳이 지사를 유지할 필요가 없겠지.
“뭐가 걱정이에요? 이미 돈 많이 벌었잖아요.”
“뭐, 그렇긴 한데······.”
유일한 직원이라 할 수 있는 김범석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여기처럼 일 조금 하고 월급 많이 주는 곳을 찾기도 힘들다. 이번처럼 짬짬이 가외소득도 챙길 수 있고.
“너무 걱정 마요. 잘되겠죠.”
사라가 물었다.
“혹시 필승법 같은 게 있나요?”
난 피식 웃었다.
“그런 게 있을 리 있나요?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미래의 정보를 알고 움직이긴 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나도 모른다. 왜냐하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저쪽은 이기기 위해 모든 걸 다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 역시 이기기 위해 모든 걸 다할 생각이다.
난 김성권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잔뜩 지친 것 같은 목소리다. 하기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난 그에게 물었다.
“윤한빈 대표이사를 좀 만났으면 하는데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주주명부가 폐쇄되며 주총에서 다룰 구체적인 안건과 세부 사항과 함께 의장이 누군지도 발표됐다.
한정물산의 대표이사는 세 명.
그런데 주민재 회장이 사임하며 두 명이 남았다. 둘 중 윤한빈 대표이사가 의장을 맡기로 정해졌다.
[제가 방법을 알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모르더라도 쉽게 알아내실 수 있지 않나요?”
적대적 M&A 상황에서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상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후일담 같은 거 보면 첩보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이사의 동선을 파악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겠지.
[지금 상황에서 비밀리에 주총 의장을 만났다가는 저쪽에 괜한 트집 잡힐 수도 있습니다.]
뭘 걱정하는지 잘 안다.
말 한마디만 실수해도 상대는 그걸로 여론전을 펼칠 것이다. 최대한 신중을 기하고 싶겠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꼭 만났으면 합니다.”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김성권 대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원하는 대답을 했다.
[알겠습니다.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 *
한정그룹은 주총을 앞두고 총력전을 벌였다.
한정물산 주식을 가진 직원들은 의무적으로 위임장을 써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아예 인당 할당량까지 지시했다. 강제성은 없다지만,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직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직접 주식을 사서 위임장을 써야 했다.
사내에서는 농담조로 ‘전 직원 옥쇄’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직원들이 이 정도니 임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임원쯤 되면 대부분 회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기 마련. 그들은 진작 위임장을 써냈다.
그건 윤한빈 대표이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통 주총은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주총은 좀 달랐다.
전 국민은 물론이고, 외신들의 관심까지 집중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영권이 걸려있으니까.
만에 하나 진다면 과연 어떤 후폭풍이 불어닥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삼자연합이 승리해 경영권을 장악하면 기존 임원진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가 시작될 것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자리를 지키기 힘들다는 생각에 다들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른 임원들은 자리를 지킬 가능성이라도 있다. 하지만 대표이사는 100퍼센트 물갈이된다고 봐도 좋았다.
윤한빈 이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승진했나?’
50대의 젊은 나이에 대표이사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좋아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가 밀려왔다.
반면 그와 경쟁해 낙마했던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최근에는 스트레스로 인해 잠도 잘 자지 못하고, 두통에 시달릴 정도였다.
그는 자료를 분석해 삼자연합 측이 확보한 표를 계산했다. 아예 매 시간마다 이를 취합한 보고서가 올라올 정도였다.
분석에 따르면 여전히 이쪽이 약간 우세였다.
하지만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고, 약간의 변수로 언제든 뒤집힐 수도 있는 위험이 있었다.
“현황 보고서입니다.”
자료를 들고 들어온 사람은 비서실에서 일하는 직원이다. 30대 중반의 여성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외모를 지녔다.
“아, 거기 놓고 가게.”
그녀는 바로 나가는 대신 잠시 머뭇거렸다.
윤한빈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그러나?”
“걱정돼서요.”
대표이사가 잘리면 비서실 직원들이라고 무사할 리 없다.
임원이 아닌 직원인 만큼 잘리지는 않겠지만, 다른 부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네. 회사는 별문제 없을 테니.”
“회사가 아니라 이사님이요.”
“아······.”
“요즘 너무 신경 쓰시는 것 같아서요. 잠도 거의 못 주무신 것 같은데, 조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건강이 우선이잖아요. 그리고 이거 드세요.”
그녀는 다가와서 책상 위에 봉투를 올려놓았다.
“뭐야?”
“두통약이에요. 며칠 전부터 두통이 있으셨잖아요.”
윤한빈은 놀란 표정으로 비서를 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표정만 봐도 알아요.”
같이 사는 가족들도 잘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진작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윤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약은 꼭 드셔야 해요.”
* * *
윤한빈은 오랜만에 정시에 퇴근했다.
그는 뒷자리에 몸을 기댄 채 흘러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문득 지난 일들을 떠올랐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한정그룹에 입사한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했다.
능력이 좋았는지 운이 좋았는지 하는 일마다 잘 풀렸고, 회장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주철진의 밑에 배속돼 본격적인 승진 코스를 탔다.
결혼도 이때 했다.
그의 아내는 주민재 회장의 외조카.
아내의 적극적인 내조 덕분에 그룹 내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고, 결국 대표이사 자리까지 올라섰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아내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고, 얼마 전 큰아들을 결혼시켰다.
그런데 딸 결혼 때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일찍 집에 들어가 봐야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몸도 씻고 피로도 풀 겸 호텔 사우나에 들렀다.
“끝나면 부를 테니, 식사라도 하고 오게.”
“알겠습니다.”
수행비서를 보낸 그는 혼자 사우나로 들어갔다.
땀을 빼고 몸을 씻은 다음 가운을 챙겨입고 사우나와 연결된 카페로 향했다. 혼자 앉아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한숨 돌리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윤한빈 대표이사님이죠?”
그 말에 그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쳐다보았다. 2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혹시 회사 직원인가 싶어서 자세히 봤는데, 모르는 얼굴이다.
“누구······?”
청년은 바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아! 전 한미루라고 합니다.”
그 말에 윤한빈은 깜짝 놀랐다.
“한미루라고?”
한정물산 임원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사실상 김성권 대표와 함께 한정그룹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고 있는 장본인이나 다름없으니.
나이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이 청년이 지금 한정그룹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는 건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가 힘들었다.
경계심을 내비치는 그를 향해 한미루는 웃으며 말했다.
“신기하네요.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마치 우연이라는 듯한 태도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상식적으로 이게 우연일 리 없다. 자신이 평소 이곳에 들르는 걸 알고 미리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날 미행했거나.’
주총을 며칠 앞두지 않은 시점에 이런 식으로 접촉을 해왔다는 것은 뭔가 의도가 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거기에 말려들 생각은 없었다.
“먼저 일어나겠네.”
윤한빈은 몸을 일으켰다.
바로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한미루가 말했다.
“이연지 씨와의 관계에 대해 사모님께서도 알고 계신가요?”
그 말에 윤한빈은 멈칫했다.
“너······.”
“일단 앉으시죠.”
그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제 입으로 말씀드려야 할까요?”
“······.”
윤한빈은 입을 다물었다.
이연지는 그의 비서실에서 일하는 직원이다.
처음 봤을 때는 별생각 없었다. 그저 이혼하고 혼자 아들을 키운다는 말에 약간의 신경이 쓰였을 뿐이다.
그런데 같이 일을 하며 그녀에게 점점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홀어머니는 그를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끝내 그가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연지는 가녀리지만 강한 여자였다.
그런 모습이 왠지 어머니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웃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졌고, 그녀를 볼 생각에 출근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게 사랑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별다른 계기가 없었다면 그저 노년의 짝사랑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