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제3자 배정 유상증자 (6)
언론을 통해 공론화가 된 만큼 산업은행과 한정물산은 합병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주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철진 부회장은 유상증자를 하겠다고 밝혔다. 주총까지 갈 것도 없이 사실상 삼자연합의 패배가 확정되는 분위기였고, 주가는 계속 하락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속보) 화안건설, 대준건설 인수전에 참여!]
[화안건설, 건설 경쟁력 확보를 위해 대준건설 인수 추진!]
[화안건설의 대준건설 인수, 현실성 있는 얘기인가?]
화안그룹은 재계 6위의 거대 그룹.
하지만 건설 분야만 놓고 보면 중견 건설사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규모 재개발이나 택지개발에 뛰어드는 대형 건설사들과는 달리, 계열사들 수주를 받아 간신히 실적을 채우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런 기업이 시총이 다섯 배는 큰 대준건설을 인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화안건설 허철원 사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화안건설은 대준건설 인수를 통해 세계적인 건설사로 거듭나겠습니다.”
기자들은 일제히 질문을 던졌다.
“자금 마련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화안건설이 대준건설을 인수할 만한 자본이 있습니까?”
“정말로 인수의향이 있는 겁니까?”
화안건설 혼자 대준건설을 인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자금을 마련할 계획이 없다면 그냥 찔러보기에 그칠 것이다.
그런데 기자들의 질문에 허철원 사장은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화안에너지와 손을 잡고 공동으로 인수를 추진할 예정입니다.”
화안건설 혼자서는 대준건설 인수에 필요한 자금조차 마련하기 힘들다. 하지만 화안에너지와 손을 잡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화안에너지는 토머스 모터스를 매각한 덕분에 2조에 달하는 현금을 쥐고 있다. 이 돈이면 인수자금 마련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화안건설 허철원 사장 발표 후, 화안에너지 허민웅 부사장도 나서서 목표를 밝혔다.
“화안에너지는 화안건설과 손잡고 친환경 에너지로 돌아가는 스마트시티를 건설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대준건설을 인수하겠습니다.”
두 기업은 손을 잡고 인수의향서를 제출하고, 인수팀을 꾸리는 등 인수 준비를 서둘렀다.
안타깝게도 시장의 반응은 좋지 못했다.
대준건설 인수 추진 소식이 알려지자 화안건설은 13퍼센트, 화안에너지는 21퍼센트 동반 하락했다.
주주들은 비명을 질렀다.
-ㅅㅂ 이게 뭔 상황이야?
-아니, 왜 갑자기 불똥이 화안에너지로 튀는 건데?
-어제까지만 해도 한정물산이 불타는 걸 보며 낄낄 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보니 제가 산 화안에너지도 같이 불타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허민웅은 잘하다가 왜 똥볼 차고 지랄이냐?
-하던 사업이나 잘할 것이지 뭔 건설사를 인수하겠다고 나서고 있어?
-미친놈인가?
-ㅋㅋ 쟤 원래 미친놈이었음. 별명이 화안그룹 망나니인데 뭘 바람?
-토머스 모터스 때 잘 대처했나 싶었는데 역시 ㅂㅅ이었음.
-저런 ㅂㅅ 믿고 주식 산 내가 ㅂㅅ ㅜㅜ
-화안에너지 진작 던졌어야 했는데.
-그나저나 진짜 대준건설 인수하려나?
-제발 걍 한정물산에 던져줘라 ㅡㅡ;
-허민웅 이 새끼 이거 배임으로 고발 안 되나?
-지난번에 보낸 화환 반품해, 새꺄~
* * *
화안건설은 공식적으로 인수의향서를 제출했다.
이 소식은 증권가를 뒤흔들었다.
허철원 사장은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대준건설은 대단히 매력적인 매물입니다. 인수 후에는 우선 최대한 미분양을 털어내는 것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쌓여있는 미분양만 털어내도 대준건설의 부채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산업은행은 난색을 표했다.
대준건설을 인수하기에 화안건설은 덩치가 너무 작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실사 과정에서 인수를 포기한 유반건설을 예로 들었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허철원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규모가 비슷한 건설사들끼리 합병하면 인력과 사업영역이 겹쳐 구조조정이나 인력 재배치를 해야 하지만, 화안건설은 덩치가 작은 만큼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한정물산은 인수 후에도 구조조정은 하지 않고 지속적인 투자를 이어나가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상증자에는 제동이 걸렸다.
언론 앞에 나선 김성권 대표는 목소리를 높였다.
“산업은행 측은 인수 의사를 보인 기업이 한정물산밖에 없다는 이유로 급하게 합병을 추진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화안건설이 새로운 인수 후보로 등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정물산과 합병시킨다면 이는 경영권 분쟁에 개입하기 위한 불법행위이자 특혜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입니다.”
이전까지 대준건설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기업이었다.
때문에 이를 한정물산에 인수시키겠다고 했을 때도 특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후보가 둘인 이상 최소한의 심사는 이뤄져야 했다.
화안건설이 계속해서 적극적인 인수 의사를 보이고 여론이 들끓자 산업은행은 결국 한발 물러섰다.
“대준건설 인수 문제는 공정한 입찰을 통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특정 재벌에 대한 특혜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주총 이전까지 합병이 이뤄질 리 없다는 게 확실시되며 한정물산 주가는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ㅋㅋㅋ 뇌물 처먹고 편들어주려다가 딱 걸렸네~
-주철진이 아쉽겠네~
-이 ㅅㅂ 새끼들은 회사가 망하든 말든 지들 경영권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음.
-진짜 개쓰레기 같은 놈들임.
-투기자본보다는 창업주 일가가 안정적으로 경영할 거라고 믿었던 내가 병신이지.
-ㅎㅎ 믿은 니가 바보. 애초에 횡령배임으로 주주들 뒤통수치던 새끼들인데 믿긴 뭘 믿어?
-한정물산을 살릴 방법은 저 새끼들을 경영에서 쫓아내는 것뿐입니다!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즈아!
-다들 뭔 소리야? 그래서 투기꾼들에게 그룹을 넘기자고?
-사모펀드들은 착한 줄 아나?
-이놈도 쓰레기고 저놈도 쓰레기면, 그래도 주가 올려주는 쓰레기가 낫지 않나?
-웬만하면 재벌 편들어주고 싶었는데, 진짜 이번에 하는 짓 보고 학을 뗌.
-주철진이 계속 경영하면 결국 대준건설 인수할 거 아님?
-무조건 쟤들 몰아내야 한다. 그게 한정물산을 살리는 길이다.
-자자~ 위임장 모아서 KSGI에 전달합시다!
* * *
난 허민웅과 통화했다.
“그쪽 분위기는 어때요?”
[말도 마. 회사로 항의 전화 오고 난리도 아니야. 직원들도 동요하고 있고.]
토머스 모터스를 매각해 얻은 2조 원을 수소 산업에 쏟아부어도 부족할 판에 부실건설사 인수에 쓰겠다고 하니, 주주들 입장에서는 복장이 터질 수밖에.
이전까지만 해도 허민웅을 찬양하던 종목게시판은 이제 성토장이 됐다.
[화안건설이랑 그룹 본사 쪽으로는 인수 의사 철회하라는 압력이 들어오는 모양이야. 기재부와 금융위 쪽에서도 연락 왔다는데.]
“예상했던 대로네요.”
허성훈 회장은 아예 출장을 핑계로 일본으로 출국했다.
[우리 회사 주가도 쭉쭉 빠지는 중이고. 인터넷 봤으면 알겠지만, 나 지금 주주들한테 엄청 욕먹고 있어.]
“욕은 원래 먹었잖아요.”
[뭐, 그렇긴 한데.]
“떨어졌을 때 자사주나 열심히 사놔요. 나중에는 비싸서 못 살 테니까.”
[형이 진짜 너 때문에 총대 멘 거야. 알지?]
사실 허민웅이 직접 나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총대를 멨다는 게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이번 일로 여기저기 찍혔을 테니까.
물론 그의 입장에서는 한정그룹이 무너지는 게 유리하다. HJW에너지를 화안그룹이 인수하면 수소 에너지 사업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주총에서 삼자연합이 승리했을 때의 얘기. 만약 우리가 지면 얻는 건 없이 욕만 먹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나선 걸 보면 대체 이 사람은 나를 얼마나 믿고 있는 거야?
“일 끝나면 제가 술 한잔 살게요.”
[어! 진짜지? 너 약속한 거다. 나중에 말 바꾸면 안 돼.]
“알았어요.”
왜 이렇게 좋아해?
* * *
주철진은 여동생 주혜진과 함께 아버지의 병실을 찾았다.
주민재 회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유상증자는 불가능해졌구나.”
이는 그가 생각한 필승의 방법이었다. 회사의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추진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설마 화안건설이 인수 후보로 나설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주철진은 여동생인 주혜진에게 따지듯 말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화안건설이 갑자기 왜 나선 건데?”
주혜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몰라, 오빠.”
“젠장! 매형은 뭐라는데?”
“자기도 모르는 일이래.”
“거짓말하는 건 아니고?”
“아니야. 화안건설 발표 보고 본인도 깜짝 놀랐어.”
“그럼 허민웅이 멋대로 화안건설이랑 손잡고 움직였다는 거야?”
주민재 회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럴 리가 있나?’
화안그룹은 철저하게 허성훈 회장이 지배하고 있다. 화안건설이 움직였다는 건 적어도 허성훈 회장이 승인했거나 묵인했다는 뜻이다.
허민웅을 내세운 것은 어디까지나 면피용이다.
주민재 회장은 직접 허성훈 회장에게 직접 연락을 했지만 받지 않았다. 일본으로 출장을 간 걸 볼 때 아마 만날 생각도 없을 것이다.
‘어째서 화안에너지가 나선 거지?’
잠시 생각하자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컨티뉴 캐피탈은 토머스 모터스를 폭락시킨 장본인이다. 그리고 화안에너지는 그 직전에 주식 전량을 직전에 매각해 엄청난 수익을 얻었다.
아마도 당시 컨티뉴 캐피탈 측에서 허민웅에게 접촉해 미리 정보를 알려줬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 보답을 하는 건가?’
중요한 건 화안건설이 나선 타이밍이다.
원래 이번 일은 산업은행과 비밀리에 추진 중이었고, 유상증자를 하는 시점에서 발표하려고 했다.
반대해도 소용없도록 말이다.
그런데 언론이 공론화를 시키는 바람에 발표보다 먼저 사실이 알려졌다. 어떻게든 강행하려고 했는데, 이 시점에서 화안건설이 인수 참여를 선언했다.
때문에 유상증자는 실패했고, 결국 주총에서 표 대결을 벌여야 한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가만히 있어야 했는데.’
그럼 계속 승기를 잡은 채 주총까지 끌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괜한 짓을 하는 바람에 우호적인 주주들마저 등을 돌렸다.
게다가 합병 무산 이후 주가가 폭락했을 당시 거래량이 폭증했다. 그 물량들을 누가 사 갔을지는 뻔했다.
한정물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주철진은 일전에 만났던 한미루의 얼굴을 떠올렸다.
‘설마 그놈이 꾸민 일인가?’
화안에너지가 움직인 걸로 볼 때, 이번 일을 주도한 것은 KSGI가 아닌 컨티뉴 캐피탈일 것이다.
주혜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러다가 정말 그놈들에게 경영권을 빼앗기면 어떡해요?”
“아버지!”
이제는 손실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비자금이고 쌈짓돈이고 할 것 없이 쏟아부어서 한 주라도 더 사들여야 할 판이다.
문제는 주가가 20만 원으로 폭등했다는 것.
4만 원일 때도 거들떠도 안 보던 주식을 다섯 배 넘는 가격에 사야 하는 것이다. 주총이 끝나면 폭락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최대한 매수하라고 지시하마.”
그 말에 주철진은 살짝 안도했다.
비자금을 총동원한다면 이탈하려는 우호 세력의 주식과 소액주주들의 주식을 최대한 사들일 수 있을 것이다.
주민재 회장은 아들을 보며 말했다.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된다. 마지막까지 절대 방심하지 말거라.”
주철진은 눈을 빛냈다.
“알겠습니다.”
목숨이 걸려있는 일이다. 방심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