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제3자 배정 유상증자 (4)
“그건 걔들이 만든 게 제대로 작동될 때 얘기지.”
아무래도 토머스 모터스 사태가 있다 보니 그런 의심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때문에 다들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고.
“잘 작동됩니다. 아직 언론에 나가진 않았는데 상반기 중에 본격 생산에 들어갈 거고 GM과 포드에 납품 협상을 진행 중입니다. 물류트럭 플랫폼 판매가 궤도에 오르면, 픽업트럭용 플랫폼도 만들 예정이구요.”
“어디까지나 계획 아니야? 토머스 모터스도 계획은 완벽했어.”
“넥스트로젠은 토머스 모터스와 전혀 다릅니다. 제가 보증하죠.”
“니가 어떻게 보증해?”
“그 회사를 컨티뉴 캐피탈이 샀거든요.”
내 말에 허민웅은 깜짝 놀랐다.
“샤크 매니지먼트에서 투자 중단하고 나서 다른 곳에서 투자했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그게 컨티뉴 캐피탈이었어? 대체 언제?”
“토머스 모터스 사태 터진 직후에요.”
잠시 후 그는 감탄한 표정으로 박수까지 쳤다.
“이야! 수소차 업계를 초토화시켜놓은 다음 쌀 때 날름 집어 갔구나. 대단한데.”
“칭찬 감사합니다.”
표정을 보니 허성훈 회장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남들이 놀라 시장에서 발을 뺄 때 한복판에 뛰어든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웬만한 통찰력과 결단력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지.
참고로 나도 그딴 거 없다. 다만 회귀를 했을 뿐.
허성훈 회장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사돈 그룹이라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걱정하는 건 10대 그룹의 경영권이 빼앗기는 선례가 만들어지는 거겠지.
난 고민하는 그에게 말했다.
“10대 그룹이 언제까지 10대 그룹일 것 같습니까?”
“무슨 말인가?”
“정확히는 화안그룹이 언제까지 10대 그룹에 속해있을 수 있을까요?”
허민웅은 당황하며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술이 덜 깼어?”
그만큼 도발적인 질문이다.
허성훈 회장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화안그룹이 10대 그룹에서 밀려날 거라는 건가?”
“순위란 가만히 있다고 유지되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위에 올라서면 한 칸씩 밀리게 되죠.”
실제로 1회차 때 화안그룹은 토머스 모터스 사태로 인해 수소에너지 사업을 중국에 매각했고, 그로 인해 10대 그룹에서 밀려났다.
“사람들은 재벌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IMF나 금융위기 때 얼마나 많은 재벌들이 사라졌습니까?”
“그건 그때 얘기 아닌가?”
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중요한 시기입니다. 산업구조가 변화하는 시기에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기 마련입니다. 덩치가 큰 재벌그룹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죠. 서로 품앗이할 시간에 자기 몫 하나라도 더 챙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허성훈 회장은 젊은 시절부터 30년 넘게 거대 그룹을 이끌어왔다. 바보가 아니라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겠지.
* * *
허성훈 회장은 눈앞의 청년을 보았다.
‘화안그룹이 언제까지 10대 그룹일 수 있냐고?’
이제까지 감히 그의 앞에서 이런 도발적인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 자리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그의 조언 덕분에 화안에너지가 살아남았으니까.
그렇다면 이번에 한 조언은 어떨까?
‘수소를 중심에 놓고 그룹을 재편하라고?’
돈과 인력이란 무한정 솟아나는 게 아니다.
그룹의 역량을 수소 에너지에 집중하려면 다른 사업은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
잘되면 좋겠지만 실패한다면?
그땐 계열사 한두 개 날아가는 게 아니라 그룹 전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한미루는 마치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물었다.
“회장님께서는 향후 수소 에너지가 성장할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물론이네.”
“지금 하고 계신 예상은 틀렸습니다.”
“무슨······?”
“회장님께서 예상하시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훨씬 더 큰 규모로 성장할 겁니다. 지금 생각하고 계신 것에 10이나 100 정도를 곱하면 얼추 비슷할 겁니다.”
“······.”
허성훈 회장은 순간 강렬한 충격을 느꼈다.
‘그럼 수소 산업이 대체 어느 정도 규모라는 거지?’
“장담할 수 있나?”
“조만간 화안그룹의 열 배 이상의 자본을 가진 곳이 수소 산업에 뛰어들 겁니다.”
“어디를 말하는 건가?”
한미루는 전혀 뜻밖의 기업을 말했다.
“아람코입니다.”
아람코는 사우디의 국영기업이자 세계 최대의 석유회사.
컨티뉴 캐피탈이 사우디 자본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졌다. 그래서 금감원과 검찰이 수사와 기소를 포기했다는 것도.
하지만 아람코가 수소 산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한미루는 설명을 해주었다.
“아람코가 HJ퓨어셀을 인수할 겁니다. 에이오일을 통해서요.”
허민웅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확정은 아닙니다만 분명히 그렇게 될 겁니다.”
“아니, 확정은 아닌데 분명히 그렇게 된다는 게 무슨 뜻이야?”
한미루는 대답 대신 웃음을 지었다.
마치 자신의 말대로 될 거라고 말하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거지?’
처음에는 단지 한정그룹 경영권 분쟁을 통해 주가를 끌어올려 팔고 나가는 게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는 그보다 훨씬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상대를 파악할 때 중요한 건 선입견을 갖지 않는 거다. 모든 선입견들을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단 하나.
바로 결과다.
허성훈 회장은 온몸에 스파크가 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가 회장직에 오른 것은 고작 28세.
갑작스레 창업주를 잃은 화안그룹은 크게 흔들렸고, 그룹이 해체될 거라는 얘기마저 돌았다.
그는 그룹 일에 대해 아는 게 얼마 없었고, 실무를 맡은 임원들은 그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았다.
잘못하다가는 허울뿐인 허수아비 회장이 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그는 회의실과 현장에서 부딪혀 가며 실무를 익혔고, 나이 많은 임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모든 걸 걸고 그룹을 키워냈다.
주위에서는 잘못하면 그룹이 무너질 수 있다며 말렸지만, 사운을 걸고 신산업을 개척했다.
실제로 큰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지만, 그 결과 화안그룹을 재계 6위까지 키워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가진 것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급급했다. 신산업에 뛰어들더라도 기존 산업에 무리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만 진행했다.
그런데······.
정말 이걸로 충분한 걸까?
재계 6위라는 것에 만족해 안주하면 되는 걸까?
‘어째서 그동안 더 위를 보지 않았던 거지?’
마치 젊은 시절의 열정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하나만 묻지.”
“예.”
“유재호 회장님이 소개시켜줬다고 들었는데, 혹시 유성그룹 일에도 비슷한 조언을 해줬나?”
“그렇습니다.”
이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생각을 끝마친 허성훈 회장이 입을 열었다.
“대준건설 인수에 나서달라고 했나?”
“예.”
“정부에서 압력을 가한다면?”
“주총이 끝날 때까지만 버텨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정부와는 척을 지게 될 텐데.”
“정치권력이야 어차피 바뀌기 마련이죠.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그 이상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당장은 말뿐인 얘기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 한마디는 수십 장의 계약서보다도 가치가 있다.
생각을 끝마친 허성훈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화안에너지가 신세졌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그 빚을 갚는 걸로 하지.”
그 말에 한미루는 웃음을 지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주총 끝나고 식사 한번 하는 게 어떤가?”
“추천할 만한 식당이 있나요?”
“자주 가는 김치찌개집이 있네.”
한미루는 흔쾌히 대답했다.
“잘됐네요. 저 김치찌개 좋아하는데.”
* * *
얘기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어느새 새벽 3시다.
내가 집에 가겠다고 하자 허민웅은 따라 나왔다.
“정말로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만약 안 되면 어쩌려고 했어?”
“글쎄요.”
그때는 유재호 회장에게 부탁하거나, 사라에게 말해 아람코 산하에 있는 해외 건설사가 나서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다.
방법이야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는 법이지.
“그런데 방금 한 말 진짜야?”
“뭐가요?”
“아람코가 수소 산업에 뛰어든다는 거.”
“시기의 문제일 뿐이죠.”
아람코는 세계 최대의 석유 회사.
하지만 석유의 가치는 예전보다 크게 줄어들었고 유가는 점점 하락세다. 때문에 석유로 벌어들인 막대한 이윤을 바탕으로 새로운 에너지 산업 진출을 모색 중이다.
그게 바로 수소다.
원래 이쪽 시장에 진출하는 건 당장은 아니고 3년 뒤쯤. 그러니까 라시드 왕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뒤의 일이다.
하지만 어차피 나라는 변수가 생겼으니, 상황에 따라서는 이 시기를 충분히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단 말이지? 잘하면 아람코랑 파트너가 될 수도 있겠네.”
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철석같이 믿는 듯한 모습이다.
“허민웅 씨는 집에 안 돌아가요?”
“아!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려고.”
말은 그렇게 해도 잠이 싹 달아난 것 같은 얼굴이다. 아마 이제부터 부자끼리 할 얘기가 많겠지.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 * *
다음 날.
늦게 집에 들어간 만큼 난 늦게 출근했다.
동호 선배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오늘도 조용하네.”
며칠 동안 한정물산 주가는 큰 변동이 없었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집에 가려는데, 사라가 나에게 말했다.
“이제 뭐할 거예요?”
“딱히 할 일은 없는데요.”
“그럼 술 한잔할래요?”
“좋아요.”
난 그녀를 따라서 자주 간다는 술집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수제 맥줏집이었다. 통유리로 된 안쪽에는 양조장이 있어서 직접 맥주를 제조하고 숙성시키고 있었다.
“맥줏집이네요.”
“그럼 고급 와인바라도 갈 줄 알았어요?”
“······.”
그럴 줄 알았다.
사라는 웃으며 말했다.
“돈이 많은 건 라시드지 제가 아니잖아요. 미국에서 대학 다닐 땐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었어요.”
“그래도 에이오일 이사면 월급은 많지 않나요?”
“그렇긴 해요.”
우리는 맥주잔을 부딪쳤다.
“화안그룹과 얘기가 잘 돼서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그런데 정말로 한정물산이 대준건설을 인수하겠다고 나설까요?”
“아니면 마는 거죠. 맞다면 역으로 좋은 기회가 될 테구요.”
이건 1회차 때는 없었던 일.
아닐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하지만 내가 본 이 정부의 성격상 충분히 하고도 남을 것이다.
사라는 맥주를 마시며 물었다.
“컨티뉴 캐피탈의 목표가 뭔가요?”
“글쎄요. 딱히 거창한 목표는 없어요.”
“그런 것치고는 엄청난 일들을 벌이고 있지 않나요? 덕분에 대한민국이 시끌시끌하잖아요.”
난 속마음을 얘기했다.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요.”
이전 생에서는 많은 후회를 했다.
회사가 망한 뒤에도 노력했다면 뭔가를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 시점에서 모든 걸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마음이 꺾였기 때문이다.
내가 쓴 리포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동호 선배도 크게 다쳐 일을 못 하는 상황에서 나 혼자서 열심히 사는 게 아무런 의미 없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 전력으로 부딪쳐 봐야지. 그래야 잘되든 안되든 후회가 없을 것 같다.
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니 할 수 있는 건 해봐야죠.”
“맞아요.”
난 두 번째긴 하지만.
아마 세 번째는 없을 테니 이번에는 정말 잘해야 한다.
“또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뭔가요?”
“한정물산에 투자한 게 단지 돈 때문인가요,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요?”
제법 눈치가 빠르다.
원래는 단지 경영권 분쟁을 일으켜서 그사이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게 목적이었다.
그런데 라시드 왕자와 사라를 만나며 계획이 좀 달라졌다.
사우디는 막대한 자본이 있고 난 그걸 다룰 능력이 있다. 이번 경영권 분쟁은 내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겸사겸사라고 해두죠.”
사실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하다.
난 주현진을 떠올렸다.
이번 기회에 악연은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