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금감원 (3)
오영환 대통령은 기가 막혔다.
대체 돈이 어디서 나서 주식을 샀나 했더니,설마 사우디 왕실의 투자를 받았을 줄이야!
왕족이 얽혀 있고 사우디 대사관까지 나섰을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다.
국력으로 보면 한국이 사우디보다 훨씬 크다. 그러나 사우디에는 막대한 오일머니가 존재한다.
전 세계에서 사우디 자본을 무시할 수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되겠는가?
사실 TRS가 합법적으로 이뤄졌든 불법적으로 이뤄졌든 상관없었다.
그저 트집을 잡아 기소만 때리면 그만이었는데······ 사우디 왕실 자본이 관련되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의혹만으로 무리한 기소를 했다가는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다.
[불법행위는 없었고 필요한 자료가 있다면 협조하겠다고 해서 일단 압수수색은 중단했습니다.]
‘일개 기업의 일에 왜 대사관이 나서?’
다른 나라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사우디는 절대왕정국가.
왕족들은 필요에 따라 대사관도 움직일 수 있다. 게다가 항의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필요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제출하겠다고 한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걸릴 게 없다는 뜻이고, 억지로 트집 잡을 경우에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진행 금감원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미 압수수색까지 진행한 마당에 아무것도 못 건지고 물러나면, 금감원은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밀어붙여 봐야 건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오영환 대통령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조사 중단해.”
* * *
[(속보) 금감원 컨티뉴 캐피탈 무리한 압수수색! 청와대의 압력 있었나?]
[정경유착에 의한 한국 정부의 외국자본 탄압]
[금감원, TRS 관련한 의혹을 조사한 것일 뿐이라 해명]
[엘리언트 기소 준비 중이던 검찰. 난감한 기색 감추지 못해]
[한국 금융시장, 기울어진 운동장인가?]
[증권가, 외국계 자본 이탈 우려······]
뉴스트리거가 먼저 관련 기사를 띄웠고, 다른 언론들은 마지못해 기사를 썼다.
인터넷은 또다시 들끓었다.
-아니, 뭔 압수수색이야?
-진짜 대통령이 뇌물 먹은 모양인데.
-말도 안 됩니다! 오영환 대통령님은 역대 가장 청렴한 대통령입니다.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한 거 보면 충분히 그러시고도 남을 분 같은데.
-자료 제출을 거부해서 압수수색한 게 뭐가 문제냐?
-금융사들 불법행위를 수사하는 게 금감원 본연의 역할입니다! 금감원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 네. 금감원이 열일해서 프리머스 사태와 코발트 게이트가 터졌나 봅니다.
-두 번 열일했다가는 나라 말아먹겠는데······.
-이 시키들은 잡으라는 금융사기꾼은 안 잡고 뭔 애먼 곳을 들쑤시고 있어?
-총수일가나 좀 조사해봐라!
-친구가 한정물산 다니는데, 진짜 비리의 온상이라 함.
-그럼 한국 그룹이 해외 투기자본에게 넘어가도록 지켜보라는 거냐?
-투기자본은 불법행위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털어야 한다!
-ㅋㅋㅋ 미친.
-막상 저런 놈들이 외국자본이 다 팔고 한국 시장 떠나겠다고 하면, 왜 파냐고 지랄함.
-누구든 내 주식 올려주는 놈이 내 편이다!
김성권 대표는 목소리를 높여 성토했다.
“대체 금감원이 무슨 근거로 압수수색을 했는지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총수일가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어떠한 조사도 하지 않으면서, 사모펀드에 대해서만 수사와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것은 재벌 편들기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KSGI는 앞으로 부당한 수사에 대해서는 국내외 사모펀드들과 공동 대응하겠습니다.”
금감원은 정당한 수사였다며 항변했지만, 외국계 투자회사들은 큰 우려를 나타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장이 열리자 외국인들은 매도를 쏟아냈고, 증시는 큰 폭으로 하락했다.
* * *
기자회견장에서 쓰러졌던 주민재 회장은 여전히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그저 충격을 받아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일부러 퇴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은퇴를 선언한 데다가 당시 쓰러진 게 쇼였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는 만큼, 당분간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는 병실에서도 수시로 진행 상황을 보고 받았다.
“금감원 수사와 검찰 기소마저 실패했군.”
문병을 온 아들 주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설마 사우디 왕실 자본이 관련되어 있을 줄이야.”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처음부터 자료 제출 요구를 거부한 건가?’
차라리 엘리언트 매니지먼트를 먼저 기소해야 했다. 그랬다면 어느 정도 여론몰이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컨티뉴 캐피탈을 먼저 건드리는 바람에 이제 와서는 그것조차 불가능해졌다.
‘국민연금에 이어서 금감원마저 손발이 묶인 건가?’
마치 이쪽의 수를 전부 읽고 있다는 듯 상대는 그야말로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었다.
주철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국민연금을 움직일 방법이 없을까요?”
“불가능하겠지.”
뇌물 의혹이 보도된 뒤 야당이 특검을 하자는 걸 간신히 막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하면 다시금 얘기가 터져 나올 것이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주철진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뭐라도 해야 할 판이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주총에서 질 수도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우세를 점하고 있다.
국민연금을 제외하면 유효표는 90퍼센트.
한정그룹 측이 현재까지 확보한 주식은 우호지분을 포함해 약 38퍼센트. 반면 삼자연합은 우호지분을 포함해 약 35퍼센트.
문제는 아직 위임장을 제출하지 않은 10퍼센트가 넘는 소액주주들이다. 만약 이 표의 대부분을 삼자연합이 확보하면 끝장이다.
주민재는 아들을 보며 물었다.
“걱정되느냐?”
주철진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자신의 것이었던 것을 빼앗길 상황이다. 그 뒤의 일들도 문제였다. 과연 경영권을 빼앗기고도 무사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비자금으로 매수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한정그룹 비자금은 2조 원 규모.
이 정도로 엄청난 액수의 비자금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룹의 주력이 건설이기 때문. 수년에 걸쳐 빼돌렸고 이를 투자로 불렸다.
거대 그룹을 운영하다 보면 얻게 되는 정보가 한둘이 아닌 만큼, 돈을 불리는 건 쉬운 일이다.
혹시나 손실을 보게 되더라도 계열사를 동원해 적당한 가격에 매수하게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적 감시가 강화되며 이전처럼 돈놀이하기는 어려워졌다. 때문에 현재는 외국 페이퍼 컴퍼니에 분산해 놓은 상태다.
이중 당장 움직일 수 있는 현금은 5천억 원 수준.
이를 총동원한다고 해봐야 매수할 수 있는 주식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이렇게 해서 주총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한정그룹이 이기면 주가는 즉시 폭락한다. 투자한 돈의 절반도 건지기 힘들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수천억 넘는 돈을 손해 봐야 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주총에서 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걱정할 것 없다. 방법이 하나 있으니.”
그 말에 주철진은 눈을 번쩍 떴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 방법’이라면 주총까지 갈 것도 없이 무조건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컸다.
기업에 해를 끼치는 일인 만큼 주가는 폭락하고, 주주와 여론의 강한 질타를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주민재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살기 위해서는 독이라도 삼키는 수밖에.’
* * *
압수수색은 흐지부지 끝났다.
폭등하던 한정물산 주가는 소폭 하락 중이었다. 이는 양측 다 매수를 자제하는 중이라는 뜻이다.
동호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지금쯤이면 비자금이라도 탈탈 털어서 매수를 해야 하지 않나?”
나 역시 의문을 느꼈다.
삼자연합이야 실패한다 해도 돈 좀 날리면 그만이다. 반면 총수일가는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단지 경영권만 빼앗기고 끝이 아니다.
이제까지 김성권 대표의 행보를 볼 때 그동안의 비리부터 싹 다 털 것이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횡령과 배임으로 감옥행이다.
총수일가 입장에서는 목숨이 걸려있는 셈이다.
지금은 0.1퍼센트라도 아쉬운 상황일 텐데 어째서 추가 매수를 하지 않는 거지?일단 관망 중인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컨티뉴 캐피탈 본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금감원까지 움직였군요.]
한국에서 재벌그룹을 상대한다는 게 이렇게 위험한 일이다.
“그래도 당분간은 조용하겠죠.”
그런데 데이비드의 생각은 좀 달랐다.
[다른 수를 쓸 가능성은요?]
“다른 수요?”
[기존 주주들의 지분율을 한 번에 낮출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 역시 그 방법을 썼구요.]
“그게 무슨······.”
그 순간,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설마 유상증자요?”
[예. 정확히는 제3자 배정 유상증자죠.]
한 회사의 주식이 100주 있다고 가정해보자.
경영자인 A가 40주를 가지고 있는데 B가 60주를 사들였다. 이대로라면 주총에서 A는 B에게 경영권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가 50주를 유상증자하고 C가 이 주식을 전부 사들였다.
이렇게 되면 총 주식 수는 150주로 늘어나고, A가 40주, B가 60주, C가 50주를 갖게 된다. 여기서 A와 C가 손을 잡으면 90 대 60으로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다.
일반 유상증자라면 B도 참여해 그만큼 지분을 늘리면 되겠지만, 제3자 배정 방식은 애초에 참여 자체가 안 된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경영권 분쟁 도중 제3자 배정 유상증자는 못 하게 되어 있다.
이를 허용할 경우 사실상 적대적 M&A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지분율이 밀린다 싶으면 무제한으로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하면 그만이니까.
그야말로 M&A 가불기랄까?
[법으로는 금지되어 있죠. 개별 기업끼리라면 확실히 문제가 될 겁니다. 하지만 그 ‘제3자’가 정부라면 어떨까요?]
“정부요?”
[현재 산업은행이 지배하고 있는 기업과 한정물산을 합병시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데이비드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방식을 설명해주었다.
먼저 한정물산이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하고 산업은행이 그 주식을 산다. 그리고 한정물산은 산은에게 받은 돈으로 산은이 지배하는 기업의 지분을 인수해 합병한다.
이렇게 하면 산은은 원래 가지고 있던 주식 대신 한정물산 주식을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주식으로 주총에서 주철진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저의 괜한 우려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려본 것뿐입니다.]
“아, 아닙니다. 아주 좋은 지적이었어요.”
1회차에는 그냥 합병안이 통과되고 끝났다.
합병이 부결되고 경영권 다툼으로 이어지는 건 나도 처음 겪는 일.
한정그룹은 지금 그룹 전체가 날아갈 판이고, 대통령부터 시작해 정부 인사들은 엄청난 뇌물을 먹었다.
소금 먹은 놈이 물켠다고 돈을 받은 이상 반드시 뭐라도 하려 할 것이다.
하마터면 방심할 뻔했다.
역시 이래서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봐야 하는 것이다.
“만약 합병을 시킨다면 어느 기업과 시킬까요?”
데이비드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혹시 몰라 검토를 해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