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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경영권 분쟁 (4) (134/529)

 137화. 경영권 분쟁 (4)

 강남 테헤란로의 한 빌딩.

 건물 입구에는 어지럽게 현수막이 걸려있고 텐트도 몇 개 들어섰다. 그 앞에 선 사람들은 확성기를 들고 소리쳤다.

 “투기자본은 물러가라!”

 “외국자본 몰아내자!”

 “우리 일자리를 지켜내자!”

 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현수막 숫자와 시위 인원이 늘어난 것 같네요.”

 그도 그럴 것이 일전에는 단지 합병 반대였지만, 이번에는 경영권 분쟁인 만큼 반발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김성권 대표는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그때는 감쪽같이 속였군요. 설마 컨티뉴 캐피탈 소속이었을 줄이야. 그래서 제 취업 제안을 거절했던 거군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정말로 그냥 대리인이 맞습니까?”

 난 웃음을 지었다.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겠습니다.”

 그는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 그럼 저도 일단은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보다 이곳에 오기 전 주철진 부회장을 만나셨던데.”

 난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정그룹 측 움직임을 꿰고 계시나 보네요.”

 “저쪽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뿐 아니라 재계와 정계 모두 이번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겠죠.”

 이 말은 곧 내가 여기 왔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는 뜻이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요?”

 “한정그룹이 K문화재단에 뇌물을 건넸다는 건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어째서 저희 쪽에서 알렸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기사가 나오기 전에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를 포기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운이 좋았다고 해두겠습니다.”

 그는 궁금한 듯했지만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았고 비서가 커피를 내왔다.

 “컨티뉴 캐피탈은 경영권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별 관심 없습니다.”

 행동주의 헤지펀드는 인수한 기업의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계열사 상장, 자산 매각, 구조조정, 배당확대 등등.

 말만 들으면 쉬워 보이지만 이를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반면 김성권 대표는 그동안 이런 작업을 전문적으로 해왔다.

 이쪽 일에 있어서는 한국 최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영 참여가 목적이 아니라면 엑시트가 목적이겠군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매각 시기와 매각 대상을 물색 중에 있습니다.”

 “한정그룹 측과도 이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눴습니까?”

 “예.”

 “금액은 얼마를 생각하십니까?”

 “주철진 부회장에게는 3조를 불렀습니다.”

 김성권 대표는 헛웃음을 지었다.

 “엄청난 금액이군요.”

 “그래서인지 거절하더군요.”

 “덕분에 제 차례가 왔군요.”

 “가능하다면 KSGI에 매각하고 싶습니다.”

 “얼마에 말입니까?”

 “2조 5천 원은 어떻습니까?”

 “······.”

 웃던 표정 그대로 얼굴이 굳었다.

 “그럼 주당 대략 32만 원 정도 되겠군요. 현 주가에 비해서도 50퍼센트 이상 높은 금액 아닙니까?”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런 경우에는 프리미엄이 붙기 마련이잖아요.”

 그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 금액이면 장내에서 매수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현재의 거래량을 생각한다면 5퍼센트만 매수해도 주가가 치솟을 텐데요.”

 현재 시중에 남아있는 물량은 고작 15퍼센트 안팎. 이중 10퍼센트를 매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양쪽 다 섣불리 매수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다.

 “그렇다 해도 그 금액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다소 무리한 금액이라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투자한 금액과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투자할 만하지 않을까요?”

 분쟁 발생 전 한정물산의 주가는 4만 원 아래까지도 떨어졌다. 그리고 현재는 폭등해서 17만 원까지 올랐다.

 시총 역시 3조 5천억 원 수준에서 이제는 17조 원까지 치솟았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지주회사 주가 폭등 덕분에 시총 기준으로 한정그룹 재계서열이 10위에서 8위로 바뀌었을 정도다.

 “한정물산은 단순한 기업이 아닌 한정그룹 계열사들 지분을 잔뜩 들고 있는 지주회사입니다. 연관성이 없는 자회사들만 매각해도 단기간에 현금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 현금을 배당이라는 명목으로 주주들에게 지급하면 바로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것이다

 김성권 대표는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는 것 같은 모양새다.

 “그렇다 해도 주가를 끌어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말로 한정물산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분쟁으로 주가가 폭등한 이제야 PBR(주가자산비율) 1을 넘었다.

 하지만 이 PBR 계산에는 한 가지 허점이 있다.

 “한정물산 보유자산 중에는 계열사 주식만이 아니라 땅도 포함되어 있죠. 계열사 주식은 시장가로 평가받지만, 땅은 감정가로 평가받습니다.”

 한정그룹이 10대 그룹 중 말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자산가치만 놓고 보면 5위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보통 기업들이 돈이 생기면 인수합병을 하거나 재투자를 하는 반면, 한정물산은 지속적으로 땅을 사들였다.

 부동산이 한창 호황일 때도 그 땅을 개발하기는커녕 그냥 놀려두었다. 그저 세금만 나가는 땅들을 전국에 묵혀두고 있다.

 이 땅들을 제값 받고 매각하거나, 직접 아파트나 건물을 올리기만 해도 엄청난 수익은 보장되어 있다.

 “쓰지도 않는 땅을 사들인 건 계열사들도 마찬가지죠. 당장 HJ푸드의 시총이 1조인데 감정가로는 3천억 원의 땅과 건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실거래가로 환산하면 이것만 해도 1조가 넘습니다. 필요 없는 땅을 팔고 이를 배당으로 돌린다면 계열사들 주가는 일제히 상승할 겁니다. 그러면 계열사 주식을 가지고 있는 한정물산의 가치는 더욱 오르겠죠. 그 주식을 매각해 배당으로 돌린다고 하면 주가는 더욱 오를 테구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아십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룹의 해체죠.”

 애초에 별 연관성도 없는 사업 분야들을 굳이 그룹이라는 형태로 묶어놓을 필요가 없다.

 한정그룹의 경영이 워낙 막장이었던 만큼 오히려 각자도생하는 게 주가에도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계열사들 주가를 최대한 끌어 올리고 지분을 매각한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문제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바로 자금을 회수할 수 있도록 저희가 도와드리죠.”

 “어떻게 말입니까?”

 “한정물산이 가진 계열사 지분 중 가장 규모가 큰 회사는 HJW에너지와 HJ퓨어셀입니다.”

 김성권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그 지분을 인수할 만한 곳을 섭외해오겠습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제가 가능하다고 말해도 어차피 못 믿으실 겁니다. 하지만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모든 지분을 이 가격에 사는 것은 무리겠지만, 컨티뉴 캐피탈의 지분만 사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룹을 해체하고 뽑아먹을 것만 뽑아먹으면 투자금 회수에는 큰 문제가 없을 테니까요.”

 김성권 대표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KSGI에는 그만한 돈이 없습니다.”

 사실 말이 좋아 2조 5천억 원이지, 웬만한 대기업 시총과도 맞먹는 금액이다.

 아무리 KSGI가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모펀드라고 해도 이만한 현금을 쥐고 있을 리 없다.

 “돈이야 마련하기 나름이죠.”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럼 지금이라도 장내 매도에 나서야겠죠. 아니면 한정그룹 측에 적당한 금액에 넘기거나.”

 다시 말하지만 투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엑시트다.

 어차피 돈만 있으면 투자할 곳은 널려있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투자한 돈을 다시 현금으로 바꿔야 한다.

 만약 김성권 대표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말로 장내 매도를 통해 처분할 생각이다.

 우리가 파는 순간 주가는 폭락하겠지만, 그래도 투자금의 세 배 정도는 먹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컨티뉴 캐피탈이 발을 빼면 경영권 분쟁은 사실상 여기서 끝난다.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야말로 가진 지분을 엘리언트에 전부 매각하고 나가면 됩니다.”

 “그건 불가능할 텐데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합니까?”

 “애초에 KSGI 설립 당시 투자한 게 엘리언트 아닌가요?”

 서로의 이익을 위해 뭉친 집단은 상황이 불리해지면 어느 한쪽이 먼저 발을 빼기 마련. 그러나 엘리언트와 KSGI의 연합은 마지막까지 굳건했다.

 그러니 이 둘은 애초부터 한편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김성권 대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체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하겠지.

 “마찬가지로 KSGI에는 그만한 돈이 있을 리 없지만, 엘리언트에게는 있겠죠. 부족하다면 지금부터 모집해도 될 테구요.”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얘기를 꺼냈다.

 “설사 컨티뉴 지분을 다 인수한다고 해도 주총에서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지 않겠습니까? 확실하지 않은 일에 투자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다.

 만약 컨티뉴 캐피탈 지분을 2조 5천억 원에 샀는데 주총에서 패한다면 두 회사 모두 막대한 손실을 떠안게 될 테니.

 예상했던 얘기인 만큼 난 또 다른 제안을 건넸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경영권 확보에 성공할 경우 저희 측 지분을 2조 5천억 원에 사들이는 걸로 계약을 맺죠.”

 “실패한다면요?”

 “그럼 계약은 없던 게 되고, 각자 알아서 하면 되겠죠.”

 김성권 대표는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 말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한배를 탄 이상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내려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습니다.”

 헤지펀드는 이익을 최우선시한다.

 혹시 자신을 믿게 만든 다음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겠지.

 “주총이 끝날 때까지 한 주도 처분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컨티뉴 캐피탈의 의결권을KSGI에 위임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뒤통수 맞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난 설득하듯 말했다.

 “아시겠지만 지금처럼 판이 깔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주민재 회장의 은퇴, 주철진 부회장의 재판, 주현진 이사의 갑질, 합병 실패로 인한 주주들 이탈,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불가 등등.

 지금은 여러 조건이 ‘운 좋게’ 맞아떨어졌다.

 정확히는 내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거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여론은 가라앉기 마련입니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다시 말해 지금이 한정그룹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성공할 경우 얻게 될 이익은 어마어마하다.

 대한민국 10대 그룹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다. 김성권 대표 능력이라면 투자한 돈 이상을 얼마든지 뽑아먹을 수 있을 것이다.

 김성권 대표는 깍지를 낀 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한정그룹은 오래전부터 오영환 대통령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뇌물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어떻게든 이번 일에 개입하려 할 텐데요.”

 “그 부분도 저희 쪽이 책임지고 막겠습니다.”

 국민연금공단 김환국 이사장, 금감원 장진행 원장 등은 전부 오영환 대통령의 측근이고 그동안 정권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 그렇게 안 될 것이다.

 “손을 잡으신다면 주총에서 반드시 이기게 해드리겠습니다. 설사 경영권을 빼앗는데 실패한다고 해도 딱히 손해 볼 건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원래 목표가 사내이사와 사외이사 다섯 자리 정도를 확보해 경영에 지속적으로 간섭하는 거였으니까.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이런 큰 결정을 그 혼자 내릴 수는 없다. 엘리언트 매니지먼트와 상의가 필요하겠지.

 난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창밖에는 강남의 마천루들이 펼쳐졌다.

 생각해보면 재밌는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백만 원 월급 받으며 일하는데, 이런 곳에서 고작 수십 명이서 수조 원의 돈을 움직이다니.

 세상에 얼마나 많은 돈이 오가고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내가 증권사에서 일하며 본 돈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겠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김성권 대표가 자리로 돌아왔다.

 “한 가지만 묻죠.”

 “얼마든지요.”

 “정말로 자신 있습니까?”

 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 거니까요.”

 잠시 생각하던 김성권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난 웃음을 지었다.

 “그럼 계약서를 작성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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