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경영권 분쟁 (3)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철진은 나를 보며 물었다.
“포커를 칠 줄 아십니까?”
“대충은요.”
“한국에서는 포커라고 하면 도박이라고 생각하지만, 미국에서는 체스 같은 게임으로 여깁니다. 라스베이거스 등에서 매년 큰 대회도 벌어지죠.”
“그래서요?”
“갬블에서 중요한 게 뭔지 아십니까?”
“글쎄요.”
“적당히 땄을 때 일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끝까지 갔다가는 그곳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 말에 난 피식 웃었다.
왜냐하면 난 그곳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묻죠. 손안에 에이스가 세 장 들어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며 죽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다음 카드를 받으시겠습니까?”
주철진 부회장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처음부터 저희와 거래할 생각은 없었군요.”
“그럴 리가요. 저희는 어디와도 거래합니다. 금액만 맞는다면 말이죠.”
“······.”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사재든 비자금이든 털어서 저희 지분을 사주실 생각이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잔을 쥔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한정그룹의 후계자로 자라난 그가 어디서 이런 대접을 받아 봤겠는가?
나니까 이 정도 대접해주는 거지.
주현진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잔을 집어 던지지 않는 것은 내가 컨티뉴 캐피탈의 대리인(?)이기 때문.
이래서 돈이 좋은 거다.
난 나가기 전 그에게 말했다.
“아! 주현진 이사님께 말씀 좀 전해주세요.”
주철진의 눈썹이 움찔했다.
“현진이와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럼요. 주현진 이사님이 아니었다면 저희가 이렇게 만날 일도 없었을 텐데요.”
내 말에 그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건 동생분께 물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주철진은 날 보며 물었다.
“뭐라고 전해주면 됩니까?”
난 웃으며 말했다.
“가족은 건드리는 거 아니라고 전해주세요.”
* * *
한미루가 나간 뒤.
주철진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콰앙!
“이런 건방진 새끼가!”
그는 한정그룹의 후계자였다.
이제까지 누구도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행동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아직 사회초년생 티가 빠지지도 않은 것 같은 애송이가 자신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할 말 다 지껄였다.
“고작 대리인 주제에 대표라도 되는 것처럼 굴어?”
태도만 봐서는 정말로 한정그룹과 싸울 생각인 듯했다.
이게 단순 블러핑일까, 아니면 다른 카드가 있는 걸까?
‘일단 상대의 패를 다 확인하는 게 우선이지.’
주철진은 회사로 돌아가며 지시를 내렸다.
“한미루에 대해 찾아와. 사소한 것까지 전부.”
회사에 도착한 그는 자료를 하나씩 훑어보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한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DA증권에 입사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딱히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
신기한 건 그다음이었다.
입사 후 반년도 안 돼 프리머스 펀드 부실을 폭로하고 회사를 나왔다. 그 일로 금융계가 발칵 뒤집혔고 DA금융그룹 후계자가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는 컨티뉴 캐피탈 대리인으로 등장했다.
‘회사를 나온 후 몇 달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퇴사 후 한미루는 미국을 다녀왔다.
‘이때 데이비드 록허트를 만났나? 아니면, 처음부터 사모펀드 쪽과 인연을 맺고 있었나?’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모든 게 의문투성이다.
컨티뉴 캐피탈이 한국 법인이라면 쉽게 조사해볼 수 있다. 언제 설립했는지, 누가 지분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대표인지 등등.
그런데 미국 법인이다 보니 쉽지가 않다.
일단 미국지사를 통해 계속 알아보고 있지만, 나오는 건 없을 것이다.
‘설마 이놈이 모든 일을 꾸민 건 아닐 테고.’
한미루가 이번 일과 깊은 관련이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어디까지 관련이 있는지가 의문이다.
“그러고 보니······.”
한미루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 주현진에 대해 언급했다. 그렇다는 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얘기다.
‘설마 운전기사가 폭로한 것도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 혹시 차명재단 뇌물 건도?’
혼자 생각하던 주철진은 박명훈을 호출했다.
잠시 후, 박명훈이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주철진은 그에게 물었다.
“혹시 현진이가 한미루라는 놈을 만난 적 있어?”
“예?”
질문을 하는 순간, 그는 박명훈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똑바로 대답해. 있어, 없어?”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주철진은 박명훈을 쏘아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해.”
* * *
주현진은 운전기사에게 갑질한 사건이 알려진 이후 이사직을 내려놓고 근신 중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괜히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 그런 만큼 밖에 나가는 것조차 경호원들의 허락을 맡아야 했다.
아마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큰형에게 보고되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 밖에 돌아다니지는 못해도 누군가를 집으로 부르는 건 가능했다. 세아는 가게를 나가는 대신 그의 집에서 함께 지냈다.
함께 침대에 누워있던 세아는 그에게 물었다.
“나 TV 좀 봐도 돼?”
“응.”
그녀는 TV를 켰다. 마침 컨티뉴 캐피탈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주현진은 코웃음을 치듯 말했다.
“저건 또 뭐 하는 새끼들이야?”
세아는 주현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다른 데 틀까, 오빠?”
“됐어. 그냥 놔둬.”
회사는 안 나가도 박명훈을 통해 관련 소식은 계속 전해 듣고 있었다.
주현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한정그룹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를 이어서 만든 거대한 왕국이었다. 그러한 왕국이 도적 떼 따위에게 넘어갈 리 없다.
‘문제는 나인가?’
한정그룹은 수십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기업집단.
그룹을 큰형인 주철진이 물려받는 것은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하지만 그중 식품 부문은 주현진이 갖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HJ푸드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아왔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직에서 해임되며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 몫은 챙겨주겠지?’
HJ푸드는 카페와 빵집, 치킨집 등 10여 종의 프랜차이즈를 거느리고 있고, 한정그룹 계열사들과 관련 업체들에게 식자재를 납품했다.
시총은 약 1조 원으로, 한정그룹 전체에 비하면 작은 규모다. 그래도 보유자산이 시총과 엇비슷한 알짜기업이었다.
‘땅만 제값 받고 팔아도 두 배는 될 테고.’
재벌가 사람에게는 작은 계열사라도 물려받고 아니고는 차이가 크다.
돈만 물려받으면 단순 부자일 뿐이지만, 기업을 물려받으면 회사 돈을 자기 돈처럼 쓸 수 있고 직원들 위에서 왕처럼 군림할 수도 있으니.
주현진은 이를 갈았다.
‘운전기사 그 개새끼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그놈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집에 갇혀 지내지는 않을 텐데.’
주현진은 사소한 원한조차 잊지 않았고, 반드시 되갚아주는 성격이었다.
절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했다가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손봐줄 생각이었다.
‘나한테 기어오른 놈들은 철저하게 박살내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세아를 끌어안으려는데, 갑자기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꺄악!”
“어떤 새끼야!?”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던 주현진은 깜짝 놀랐다.
“혀, 형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형이었다.
주철진은 누워있는 여자를 보고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꺼져.”
그녀는 몸을 가린 채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그 사이, 주현진은 옷을 챙겨 입었다.
“가,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주철진은 바로 본론을 던졌다.
“너 한미루라고 만난 적 있지?”
“예?”
“대답해.”
“이, 있습니다.”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그 순간 든 생각은 이러했다.
‘서, 설마 한미루 그 새끼도 날 언론에 고발했나?’
주현진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서로 말싸움만 했어요.”
주철진은 동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한미루가 컨티뉴 캐피탈 대리인이라는 거, 알았어, 몰랐어?”
그 말에 주현진은 당황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그러니까 그놈이 지금 뉴스에 나오는 컨티뉴 캐피탈과 관련이 있다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분노한 주철진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이 병신 같은 새끼야! 너 때문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나 해?”
그 순간, 주현진은 한미루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버지께서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그룹 하나 운영하신다면서? 거기에 문제 생기면 어떨 것 같아?’
‘똑똑히 기억해 둬. 나중에 한정그룹에 문제 생기면 방금 그 한마디 때문이니까.’
하도 어이가 없는 말이라서 목소리와 표정까지 확실하게 기억났다.
“서, 설마······?”
그날 일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거야?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을 텐데······.
주현진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전 정말 몰랐습니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이고 몸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주철진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동생을 향해 주먹질과 발길질을 날렸다. 안 그래도 최근 벌어진 일들 때문에 폭발 직전의 상태였다.
한번 불이 붙자 멈출 수가 없었다.
주철진은 모든 걸 주현진의 탓으로 돌렸다.
“너만! 너만 아니었어도!”
아무리 때려도 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주현진은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웅크린 채 그저 맞기만 했다.
“이 멍청한 새끼야! 이 개새끼야! 누굴 욕하든 때리든 상대가 뭐 하는 놈인지는 알고 사고를 쳐야 할 거 아니야?”
“죄, 죄송합니다.”
때리는 건 익숙해도 맞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억울하고 분하고 아파서 저절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주철진은 분이 풀릴 때까지 폭행을 멈추지 않았다.
주현진은 그저 이 일방적이고 무자비한 폭행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후, 제풀에 지친 주철진은 손과 발을 멈췄다.
그는 바닥에 웅크린 채 울며 신음하는 동생을 내려다보며 이를 갈듯 말했다.
“만약 일 잘못되면 그땐 넌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 * *
사무실로 돌아오자 사라가 도착해 있었다.
그녀의 본업은 에이오일 재무이사.
그저 잠시 라시드 왕자의 부탁으로 투자에 대한 감사를 맡고 있을 뿐이다. 그냥 보고서만 검토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이렇게 열심히 출근 도장을 찍을 이유가 있나?
“회사 일도 바쁘지 않아요?”
“괜찮아요. 일찍 출근해서 필요한 일은 지시해놓고 왔으니까요.”
잠을 좀 덜 잤는지 피곤한 것 같은 모습이다. 설마 새벽부터 출근했나?
난 사무실로 돌아와서 주철진 부회장과의 만남에 대해 얘기했다.
동호 선배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렸다.
“질문하세요.”
“설마 정말로 한정그룹에 매각할 건 아니지?”
정말로 그럴까봐 걱정하는 표정이다. 그렇게 되면 주가는 바로 폭락이다.
“아니죠.”
“그럼 굳이 만날 필요가 있었어?”
난 웃음을 지었다.
“재밌잖아요.”
빡친 주철진이 달려가서 주현진을 쥐어패기라도 하면 그건 그거대로 재밌을 것 같고.
이런 걸 손 안 대고 코 푼다고 하는 거겠지?
단지 재미 때문만은 아니고 나름의 노림수가 있긴 하다.
이번에는 사라가 손을 들어올렸다.
“이젠 어떻게 할 거예요?”
“김성권 대표를 만나봐야죠. 안 그래도 약속 잡았어요.”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웃음을 지었다.
“전에 말한 대로 판이 점점 커지네요.”
재계서열 10위 그룹을 적대적 M&A하는 일이다.
정계, 재계, 금융계 할 것 없이 발칵 뒤집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