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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경영권 분쟁 (2) (132/529)

 135화. 경영권 분쟁 (2)

 난 동호 선배에게 물었다.

 “투자보고서는 다 작성했어요?”

 “응. 방금 메일로 보냈어.”

 이번에 투자한 돈의 절반은 사우디 왕자의 돈. 투자사는 투자자에게 상황을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관심이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투자보고서에는 매매내역과 자산변동내역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고생했어요.”

 “고생은 무슨.”

 그렇게 말하는 동호 선배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이유는 한정물산 주가가 치솟고 있기 때문. 시중에 물량이 빠르게 사라지며 주가는 연일 신고가를 갱신했다.

 계좌만 보고 있어도 웃음이 절로 나올 것이다.

 “그나저나 증권사 다닐 때에 비하면 여유 그 자체네. 그땐 진짜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빴는데.”

 “그랬죠.”

 매일같이 함께 야근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점심은 뭐 먹을까요?”

 “짜장면 어때?”

 “선배가 쏘는 거죠?”

 “내가 왜?”

 “주가 많이 올랐잖아요.”

 동호 선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탕수육도 시켜.”

 밥을 먹는데 동호 선배가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설마 이대로 계속 정체를 숨기고 있을 생각?”

 “그럴 리가요.”

 사실 처음에는 그럴까 생각도 했다.

 이름이 알려지면 귀찮은 일도 많아질 테니까. 그래서 데이비드 록허트를 공동대표로 내세운 거고.

 ‘베일에 가려진 투자자’나 ‘음지에 숨은 기업 사냥꾼’ 같은 것도 괜찮지 않나?

 ······라고 생각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왜냐하면.

 “요즘에는 힘을 숨긴 주인공은 인기가 없거든요.”

 내 말에 사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농담이에요.”

 어쨌거나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됐다.

 난 동호 선배에게 말했다.

 “밥 다 먹고 한정그룹에 메일 하나 보내요.”

 * * *

 한정그룹은 비상사태였다.

 직원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컨티뉴 캐피탈이면 거기지?”

 “맞아. 리포트 하나로 토머스 모터스 폭락시킨 사모펀드.”

 “걔들이 뭔 클라우드 4위 업체도 인수했다며?

 “언제부터 우리 회사 주식을 매수한 거지?”

 “어떻게 공시를 피해 9.2퍼센트나 확보한 거야?”

 “목적이 뭘까?”

 “이러다가 저놈들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는 건 아니겠지?”

 “앞으로 우리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거야?”

 토머스 모터스 사태가 워낙 유명했던 만큼 다들 컨티뉴 캐피탈과 데이비드 록허트에 대해서는 한 번쯤 들어보았다.

 그런데 정작 컨티뉴 캐피탈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알려진 게 없었다. 월스트리트에서도 유대계 자본이니, 오일머니니, 차이나머니니 하는 얘기들만 나도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보유만 공시했지 명확한 목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철진 역시 컨티뉴 캐피탈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뭐 좀 나온 게 있습니까?”

 박운용 실장은 송구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직은 없습니다.”

 주철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정보가 너무 부족해.’

 현재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KSGI와 엘리언트와의 관계다.

 만약 컨티뉴 캐피탈이 양자연합과 손을 잡는다면 이들 지분만으로도 거의 30퍼센트에 육박한다. 이탈 표와 소액주주들의 표까지 더하면 40퍼센트에 육박할 수도 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정말로 경영권이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메일이 하나 날아왔다.

 “뭐라고 하나요?”

 “한국에 있는 대리인이 부회장님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저를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먼저 만나자고 하는 건 저쪽도 원하는 게 있다는 거다.

 ‘목적은 어차피 돈이겠지.’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당장 약속 잡으세요.”

 * * *

 일원동의 한정식 집.

 난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마당을 지나 독채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40대 후반 정도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머리에 각진 얼굴. 회색빛 머리칼은 단정하고,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은 작은 편이었다.

 주현진과는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느낌이다.

 그의 이름은 주철진.

 한정그룹 부회장이다.

 원래대로라면 한정물산과 HJ로직스의 합병안이 통과되고, 그는 무사히 경영권을 세습 받게 된다.

 그랬다면 이렇게 서로 만날 일도 없었겠지.

 TV에서는 많이 봤지만 이렇게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다. 정말이지 조금도 긴장되지 않았다.

 유성그룹 회장도 만나보고 오일국 왕자님도 만났는데 10대 그룹 후계자쯤이야.

 주철진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정그룹 부회장 주철진입니다.”

 난 그 손을 잡았다.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하는지 손이 제법 묵직하다.

 “반갑습니다. 한미루입니다.”

 내 소개를 들은 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한미루? 설마······?”

 뭔가 눈치챈 것 같은 표정이다.

 재계 사람이라면 내 이름 정도는 들어봤겠지.

 “얼마 전까지 DA증권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아마 지금 머릿속이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을 거다.

 DA증권에서 프리머스 펀드 부실을 폭로하고 나간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나 궁금하겠지.

 난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었다.

 “퇴사 후, 운 좋게 록허트 대표님과 인연이 닿아 컨티뉴 캐피탈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인사를 끝낸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대리인이라고 하셨는데, 어느 정도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까?”

 “메일에서 밝혔다시피 이번 투자에 대한 전권입니다. 본사 결재 없이 모든 걸 제가 직접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일개 직원에게 수천억 원에 들어간 투자의 향방을 결정짓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니 내가 컨티뉴 캐피탈과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궁금하겠지.

 설마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일개 직장인이었던 내가 수천억의 자금을 모아 주식을 매수했다고는 상상도 못 할 테고.

 “궁금한 게 있으시겠지만 일단 오늘은 일 얘기를 해보죠.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하시면 됩니다.”

 주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컨티뉴 캐피탈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공시에 밝힌 대로 경영 참여입니다. 그동안 경영진의 잘못된 경영으로 인해 한정물산 주주들은 큰 손해를 입었습니다. 이를 바로 잡는 것이 목적입니다.”

 주철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난 그에게 되물었다.

 “그럼 경영을 잘했는데 주가가 그 모양이었나요?”

 “······.”

 내 말에 그의 표정이 굳었다.

 분쟁이 생기기 전 한정물산의 시총은 약 3조 6천억 원. 그런데 보유하고 있는 자산만 합쳐도 그 몇 배다.

 보유자산의 가치를 낮게 인정받는 게 지주회사의 특징이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 했다.

 그 이유는 합병을 위해 주가를 의도적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애초에 주가가 높았다면 지분을 확보하는데 더 많은 비용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면 기대수익도 낮아졌을 테니 헤지펀드의 먹잇감이 되는 일도 없었겠지.

 결국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벌인 일이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온 셈이다.

 “CEO가 투명하게 경영을 해왔고, 기업을 지속적으로 성장시켰고, 주주에게 더 많은 이익을 돌려주기 위해 애썼다면, 어느 주주도 경영진이 바뀌기를 바라지 않을 겁니다.”

 화이트로드의 경우 시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500억 달러의 현금을 쌓아두고 있지만, 어느 주주도 그걸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에 쓰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경영진의 판단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소액주주들이 등을 돌렸다는 것은 총수일가가 그동안 주주들의 이익이 아닌 자신들의 이익만 챙겼다는 뜻이다.

 “엘리언트와 KSGI와는 무슨 관계입니까?”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난 한마디 덧붙였다.

 “아직까지는요.”

 “‘아직까지’라는 건 이제부터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편한 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헤지펀드가 회사를 장악할 경우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난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기나요?”

 “늘 그래왔듯 구조조정부터 실시할 겁니다. 사람을 자르고 수익이 안 나는 공장 문을 닫겠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될 것 같습니까?”

 한국 재벌들은 그동안 문어발식으로 계열사를 확장해 왔다.

 그룹 입장에서는 영향력 유지를 위해, 또는 정치권과의 관계 등을 위해 부실이 나는 사업부분과 계열사들을 계속 지원해야 하지만, 헤지펀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정치권이나 국민여론 등의 눈치 볼 것 없이 적자가 나는 사업부를 구조조정하거나 매각하면 된다.

 그렇게 알짜자산만 남기고, 매각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배당을 늘려서 주가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는 주주 입장에서는 분명히 이익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공장 하나만 문을 닫아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는데, 대규모 구조조정이나 계열사 매각 등이 이뤄진다면 어떻겠는가?

 당연히 지역경제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이러니 정부도 헤지펀드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저희가 그걸 신경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주철진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지만 알고 보면 헛소리다.

 “기업은 자선사업을 하는 곳이 아니라 명백히 이익을 목표로 하는 조직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익이란 정치인들의 이익이나, 노동자들의 이익이 아닌, ‘주주의 이익’입니다. 그리고 구조조정으로 회사의 수익이 늘어날 경우 그 돈을 재투자해 더 많은 고용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문을 닫은 공장이 꼭 필요한 곳이었다면 누군가 공장을 새로 만들어 고용할 테고, 매각한 계열사 역시 인수한 곳에서 잘 맡아서 운영할 겁니다.”

 주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말은 컨티뉴 캐피탈이 직접 경영에 나서겠다는 겁니까?”

 사실 경영권을 넘겨주겠다고 해도 경영할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내가 맡아서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누가 됐든 잘하는 사람이 경영을 맡아야겠죠.”

 주철진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한정그룹은 부친과 조부께서 평생을 바쳐 일궈 오신 기업입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노력과 성과에 대해서는 저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세습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습니다. 주식회사는 다수의 주주의 지지를 얻은 능력 있는 사람이 경영을 맡는다는 게 상식 아니겠습니까? 부회장님께서 경영을 하고 싶으시다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더 많은 주식을 사셔서 더 많은 의결권을 확보하시면 됩니다.”

 “그 말은 컨티뉴 캐피탈이 보유한 주식을 팔 수도 있다는 걸로 들리는군요.”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매각가만 잘 쳐준다면 못할 것도 없겠죠.”

 “얼마에 말입니까?”

 “3조는 어떻습니까?”

 내 말에 주철진 부회장의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매수금액은 3천억 안팎에 불과할 텐데요.”

 “그렇게 따지면 한정물산 액면가는 500원이죠. 제가 액면가에 전부 사겠다고 하면 파실 겁니까?”

 “······.”

 주식의 가격이란 결국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필요에 의해 결정된다.

 “제가 얼마에 샀는지가 뭐가 중요한가요? 얼마에 사고 싶은지가 중요하죠. 안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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