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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부정 청탁 (3) (130/529)

 133화. 부정 청탁 (3)

 아직 발표하지 않았을 뿐.

 합병 포기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끝까지 밀어붙여봐야 주총에서 패배할 테니.

 분쟁 이슈가 소멸된 만큼 10만 원 가까이 올랐던 주가는 15퍼센트 넘게 빠지며 8만 원대에서 거래됐다.

 그래도 여전히 합병안이 발표된 이후보다 두 배 이상 오른 금액이었다.

 “이야! 결국 합병 실패했네.”

 그렇게 말하는 동호 선배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합병이 무산된 것은 다행이지만, 주가가 하락하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다.

 “아! 역시 기사 나오기 직전에 팔 걸 그랬나?”

 팔려고 하는 걸 내가 말렸다.

 사라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정말로 합병을 무산시켰네요. 대단한데요.”

 표정에는 진심으로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최대 행동주의 헤지펀드라는 KSGI도 글로벌 투기꾼으로 악명 높은 엘리언트도 못 해낸 일을 내가 해낸 것이다.

 사라는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엑시트를 할 건가요?”

 사모펀드는 사들일 만한 기업을 물색하고(딜 소싱), 소수의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끌어모으고(펀드레이징), 기업을 인수한다(M&A). 그다음 구조조정이나 투자 등을 통해 가치를 끌어올린 뒤 매각해 투자금과 이익을 회수한다(엑시트).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부분이 엑시트다.

 아무리 기업가치가 높아져봐야 그건 장부상의 금액일 뿐. 팔아서 현금이 들어와야 진정한 내 돈이라고 할 수 있다.

 평가가치가 1조가 넘어도 사줄 사람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때문에 투자를 시작할 때부터 엑시트 전략을 잘 세워야 한다. 끝이 좋아야 모든 게 좋은 거 아니겠나?

 컨티뉴 캐피탈이 차명을 포함해 매수한 지분은 9.2퍼센트.

 투자한 3300억은 이제 6700억이 됐다.

 겨우(?) 두 배밖에 못 벌었냐고 할 수 있지만, 수익률 계산에 있어서 금액 다음으로 중요하게 고려하는 게 바로 기간이다.

 투자 기간은 고작 1개월 남짓.

 이를 연수익으로 환산한다면 1000퍼센트가 넘는 수익률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걸로 만족해야 할까?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사라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끝난 게 아니라니요? 설마 다시 합병을 시도할 거라는 건가요?”

 “그건 아니겠죠.”

 당분간 지배구조 개편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일단 지금 상태를 유지하며 기회를 보겠지.

 “그럼요?”

 난 화이트보드에 숫자를 적어가며 말했다.

 “생각해보세요. 부정청탁 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한동안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소액주주들도 등을 돌렸고, 이번 합병 무산으로 총수일가의 그룹 지배력이 약하다는 게 입증됐습니다. 또한 총수일가의 이익을 위해서 얼마든지 다른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도요. 주주들 입장에서는 이런 경영진을 계속 믿어도 될지 의문이 들겠죠. 게다가 분쟁으로 주가가 올랐다지만 한정물산은 여전히 주가에 비해 보유자산이 많습니다. 다시 말해 뜯어먹을 게 많단 얘기죠.”

 동호 선배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 좋은 판에서 겨우 이것만 먹고 빠지려고 했어요?”

 “자, 잠깐. 설마······?”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동호 선배와 김범석은 입을 쩍 벌렸고, 사라는 원래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난 마커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예. 이번 기회에 한정그룹의 경영권을 뺏을 겁니다.”

 * * *

 한정그룹 내에서조차 합병은 물 건너갔다는 분위기였다.

 한정물산과 HJ로직스 합병은 주주들의 반발과 우려를 무시하면서까지 총력을 다해 진행한 일이다.

 하지만 일련의 일들로 인해 소액주주들은 등을 돌렸고,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도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부정청탁 의혹을 둘러싸고 치열한 정치공방마저 벌어지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합병을 계속 추진해봐야 더 큰 역풍이 불어닥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없던 일로 하고 대충 넘어갈 수는 없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주민재 회장은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경영일선에서 반쯤 물러나있던 그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내외신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주민재 회장은 단상 위로 올라섰다.

 그는 수십 개의 카메라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자식을 잘못 가르친 저의 잘못입니다. 피해를 입은 운전기사께도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주현진 이사는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물러났으며 법에 따라 정당한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저 역시 회장이 아닌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피해자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주현진 이사 운전기사의 갑질 폭로였다.

 일부 언론사에서 운전기사의 음주운전과 폭행전과를 거론하며, 합의금을 노린 폭로라는 논조로 후속기사를 내보냈지만, 때마침 부정청탁 관련 기사가 터지는 바람에 대중들은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주민재 회장이 잠시 입을 다문 가운데, 카메라 셔터 소리와 노트북 타자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퍼졌다.

 한정그룹 회장이 겨우 아들의 잘못을 사과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을 리는 없다.

 본론은 이다음부터였다.

 주민재 회장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현재 합병을 둘러싸고 사실과는 전혀 관련 없는 여러 억측과 의혹들이 일고 있습니다. 이런 억측과 의혹들이 완전히 해소될 때까지 합병 추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한정물산과 HJ로직스의 합병은 중단하겠습니다. 또한 저는 일련의 일들에 책임을 지고 한정그룹 회장직과 이사직을 비롯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주민재 회장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40년 가까이 한정그룹을 이끌어온 한국 경제의 거목이다. 그런 그의 은퇴 선언에 기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한정그룹을 사랑해주신 국민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근거 없는 의혹과 유언비어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처······.”

 주민재 회장의 발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기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다들 동요하는 표정으로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주민재 회장의 은퇴 선언 때문도 아니고, 합병안이 무산됐다는 것 때문도 아니다. 다른 어떠한 이유 때문이다.

 ‘이게 무슨 일이지?’

 주민재 회장은 기자들이 더 이상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말을 멈췄다.

 그 순간, 한 기자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컨티뉴 캐피탈이라는 곳을 알고 계십니까?”

 그 말을 시작으로 기자들은 일제히 질문을 던졌다.

 “한정그룹과 관계가 있는 곳입니까?”

 “공시에 대해 사전에 인지하고 계셨습니까?”

 “오늘 기자회견과 공시가 관계가 있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주민재 회장은 당황했다. 박운용 실장은 단상 위로 올라가 태블릿으로 기사를 보여주었다.

 내용도 없이 딸랑 제목만 한 줄 있는 기사였다.

 [(속보) 컨티뉴 캐피탈, 한정물산 주식 9.2퍼센트 보유 공시. 보유 목적은 경영 참여]

 “이게 대체······.”

 기사를 보는 순간 잠시 동안 사고가 멈춘 듯했다.

 ‘컨티뉴 캐피탈?’

 들어본 이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가장 유명세를 떨친 사모펀드니까.

 그는 최근 벌어진 일련의 일들에 대해 미지의 힘이 뒤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근거는 없지만 확신에 가까웠다.

 그것은 수십 년간 기업을 이끌어온 기업인으로서의 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역시나 그의 생각이 맞았다.

 ‘이놈들이 이 모든 일들을 꾸민 건가?’

 이제까지 뒤에 숨어서 상황을 조종했다면, 어째서 합병 중단을 선언하는 지금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걸까?

 9.2퍼센트나 되는 주식을 매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설마······?’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리는 것만 같았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며 정신이 멀어졌다.

 “커억!”

 주민재 회장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박운용 실장은 깜짝 놀라 노회장의 몸을 붙들며 소리쳤다.

 “의사! 어서 의사를 불러!”

 * * *

 [주민재 회장, 기자회견 도중 쓰러져!]

 [컨티뉴 캐피탈은 어떤 회사인가?]

 [토머스 모터스 사태를 일으킨 미국계 헤지펀드]

 [컨티뉴 캐피탈 9.2퍼센트 보유 기습 공시, 공시법 위반일 가능성은?]

 [데이비드 록허트 대표, 별다른 입장표명 없어]

 [엘리언트와 KSGI와의 관계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기자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컨티뉴 캐피탈이면 걔들 맞지? 얼마 전 스노우 크래시 인수한 곳.”

 “데이비드 록허트 대표가 또 일을 벌인 건가?”

 “자금이 어디서 나서 투자를 한 거야?”

 “김성권 대표 지금 연락돼?”

 “한정그룹 홍보팀에 문의 좀 해봐.”

 “주민재 회장 상태는 어떻대?”

 “병원에는 지금 누가 가 있어?”

 기자들은 컨티뉴 캐피탈이 뭐 하는 곳인지, 어떻게 자금을 마련했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맨 처음 기사를 내보낸 뉴스트리거 사무실은 조용했다.

 민홍수는 공시가 나오기도 전에 정보를 받았고, 덕분에 가장 먼저 기사를 낼 수 있었다.

 안현철은 멍한 표정으로 민홍수에게 물었다.

 “한미루가 정보를 건네줬다고 했지?”

 “예.”

 “그렇다는 것은 컨티뉴 캐피탈이 한미루와 관련이 있다는 거겠네?”

 “그렇겠죠.”

 안현철은 눈을 껌뻑였다.

 “대체 뭐 하는 놈이야?”

 “글쎄요. 저도 잘······.”

 불과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한미루는 일개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DA금융그룹 차기 회장을 날리고 회사를 나오더니, 코발트 게이트를 알려주질 않나, 이제는 정치권에 이어 한정그룹마저 뒤흔들어 놓고 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중이다.

 민홍수는 한미루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진짜 정체가 뭐야?’

 * * *

 주민재 회장의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허민웅은 깜짝 놀라 마시던 커피를 뿜어냈다.

 “풉!”

 “앗! 괜찮으십니까?”

 옆에 있던 비서는 재빨리 티슈를 뽑아서 건네주었다.

 “어어, 괜찮아.”

 비싼 와이셔츠가 다 젖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니가 여기서 왜 나와?”

 “예? 누가 나와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놀란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한정그룹 경영권 분쟁에 컨티뉴 캐피탈이 개입되어 있었을 줄이야.’

 컨티뉴 캐피탈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모두가 데이비드 록허트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허민웅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만났던 한국인 청년을 떠올렸다. 그에게는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사람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허민웅은 의문을 느꼈다.

 합병안 무산이 목적이었다면 조용히 팔고 나가면 그만이다. 굳이 포기를 발표하는 시점에서 지분 보유를 공시한 이유는 뭘까?

 ‘설마 경영권을 노리고 있나?’

 순간, 떠오른 생각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되지.”

 중소재벌이라면 모를까 10대 재벌그룹이 경영권을 빼앗긴 일은 이제까지 단 한 차례도 없다.

 차라리 그룹이 망하면 망했지, 끝까지 경영권을 내려놓지 않는 게 재벌들의 속성이다.

 “잠깐만.”

 그런데 상대는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사람이다. 지난번만 해도40조 원이 넘는 기업을 똥값으로 만들어놓지 않았던가?

 시장에서 100조 원이 넘는 가치를 평가받는 스타트업을 인수하기도 하고.

 “이거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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