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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부정 청탁 (2) (129/529)

 132화. 부정 청탁 (2)

 뇌물은 준 쪽이나 받은 쪽이나 처벌 대상이다.

 한정그룹 입장에서는 돈은 먼저 건네줬지만 받을 건 아직 받지 못한 상황. 돈을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는 만큼 기밀 유지에 만전을 기했을 것이다.

 ‘그럼 내 주변에 배신자가 있다는 건가?’

 오영환 대통령은 매우 신중한 성격이고 주변 사람들을 잘 믿지 않았다. 때문에 관련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측근 몇 명뿐이었다.

 그는 머릿속에서 배신할 만한 인물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주민재 회장이 말했다.

 [제 생각에는 누군가 뒤에서 상황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오영환 대통령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확실한 건 아니지만 느낌이 그렇습니다.]

 “KSGI와 엘리언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수습해야 합니다. 잘못 대처하면 그쪽이나 저희나 끝장입니다.”

 배신자를 찾는 건 나중 일이다.

 두 사람은 일단 상황을 수습할 방법을 논의했다.

 * * *

 [한정그룹 부정청탁 의혹!]

 [K문화재단은 어디인가?]

 [우리국민당, 사실일 경우 대통령 탄핵 사유]

 [경제진실찾기시민연합, 재벌그룹의 기부금 내역 전수 조사해야······]

 [K문화재단, 여러 차례 정부정책 홍보용 영상 제작]

 [설립부터 의혹투성인 K문화재단]

 [국민연금공단 김환국 이사장, 국민연금 외압 의혹에 대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하게 부인]

 처음 기사를 보도한 곳은 뉴스트리거.

 아무리 주류 언론들이 정권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해도 이 정도 사건을 보도도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신문이고 방송이고, 소규모 인터넷 언론사고 메이저 언론사고, 내신이고 외신이고 할 것 없이 사방에서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난 인터넷에 올라오는 댓글들을 보았다.

 -저게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미쳤네 ㄷㄷㄷ

 -뇌물죄로 전부 처넣어야 한다!

 -사실일 리가 있나?

 -문화발전을 위한 기업들의 자발적인 기부를 뇌물로 취급하면 앞으로 누가 기부를 할까요?

 -ㅋㅋㅋ 대체 언제부터 문화발전을 위해 전경련이 돈 걷어서 기부했냐?

 -인터넷 언론사가 싸지른 기사에 휘둘리는 걸 보니 정신상태 알 만하다.

 -이런 식의 허위기사는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

 -그래그래. 기자 사형시키자!

 -광화문 한복판에 능지처참 가즈아!!!

 -기자가 국민연금 내기 싫어서 기사 쓴 듯.

 -내기 싫을 만하지~

 -나도 내기 싫다 ㅜㅜ

 사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로 K문화재단이 대통령의 차명 재단이었어요?”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다고 했잖아요.”

 폭로를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하다.

 쥐뿔도 없는 내가 K문화재단의 자료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에이오일 재무이사라면 얘기가 다르다.

 사라는 전경련이 기업들에게 돈을 걷어 K문화재단에 건넨 자료를 쉽게 입수했다.

 에이오일 역시 5억의 기부금을 냈으니까.

 아무래도 외국계가 대주주로 있다 보니 적게 냈지만 한국 재벌들은 기본 수십억씩 냈다.

 한정그룹이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100억을 기부한 것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그건 K문화재단을 까보면 나올 것이다.

 야당인 우리국민당은 특검을 하자고 주장했고, 여당인 새한국당은 결사반대를 외치며 대통령 호위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한정그룹 손을 들어준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뇌물을 받았음을 시인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반대를 하지는 않을 테니 결국 의결권 행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회귀하기 전과 기사 내용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그런데 적절한 시점에 기사가 터지니 반응이 천지차이다.

 세상일은 타이밍이 중요한 법이지.

 주현진의 발언에서 시작된 얘기가 사상 초유의 청와대 뇌물 스캔들로까지 번졌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렇게 돼야 했다.

 대통령이 뇌물 받아 처먹고 재벌그룹의 손을 들어줬는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넘어갔다는 게 말이 되나?

 * * *

 주요 주주들끼리 이익을 위해 연합을 형성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리고 연합의 주도권은 보통 지분을 많이 가진 쪽이 가져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엘리언트가 연합을 주도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 키를 쥐고 있는 것은 김성권 대표였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그가 한국 사정에 더 밝기 때문이고, 둘째는 ‘해외 투기자본이 한국 대기업을 공격한다’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김성권 대표는 한국 사모펀드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기업인수와 엑시트를 성공시켜 투자자들에게 큰 수익을 안겨주었고, 사모펀드계의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렸다.

 그런 그에게도 10대 재벌그룹을 상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타깝게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법원은 KSGI가 낸 가처분신청을 기각했고, 한정물산은 속전속결로 자사주 매각을 끝마쳤다. 정치인들은 투기자본에 국내 대기업이 넘어가서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국민연금으로 쏠렸다.

 글로벌 경영자문사 맥컬리 컨설팅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는 합병비율이 부당하게 책정돼 한정건설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김성권 대표는 이를 근거로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국민연금은 국민들의 노후자산으로 운영되는 만큼 합병안에 찬성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언론들은 그의 발언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대신 ‘주주 자본주의는 단기적인 성과에만 매진해 기업의 장기성장성을 해칠 위험이 크다’는 한국대 정현호 교수의 발언과 함께 실패 사례들만 골라 지면에 실었다.

 또한 양자연합이 계속 경영에 간섭할 경우 대규모 구조조정을 할 거라는 기사를 썼고, 이를 본 한정건설 노조는 ‘투기자본을 규탄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경영진을 물갈이하고 조직을 개편하다 보면 잘려나가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반면 주민재 회장은 합병되더라도 구조조정은 없을 거라고 못 박으며 노조의 지지를 얻어냈다.

 어차피 월급은 회장이 주는 게 아니라 회사가 주는 거니, 오너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결정에 있어서 주주의 이익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고, 총수는 그 주인들의 대리인이다. 따라서 대리인은 주인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는 이러한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주주에게 돌아가야 할 이익을 오너가 챙겨갔고, 수백억을 횡령해 체포돼도 법원은 재벌들이 경제에 기여한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내리고, 국민들도 이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재벌의 경영권을 보호해주고 있는 모양새다.

 ‘이래서 한국이 재벌공화국으로 불리는 거겠지.’

 그는 일단 외국계 투자자들의 지분을 확보하는 한편, 지분을 보유한 다른 기관과 기업들에 설득 작업을 시작했다.

 또한 기존 지분을 담보로 대출받아 3천억의 자금을 마련했다. 이는 언제든 주식을 추가로 매수할 수 있다는 시그널이었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찬성에 선다면 승산은 희박했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승부의 추는 점차 한정그룹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한 패배는 확실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주현진 이사의 갑질, 거기서 나온 소액주주 비하, 그리고 부정청탁 의혹까지······.

 다급하게 상황을 알아보는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재밌는 일이 벌어졌군요. 설마 손을 쓰신 겁니까?]

 전화를 건 사람은 엘리언트 매니지먼트 루퍼트 황. 그는 미국계 대만인으로 아시아지역 총괄헤드였다.

 그 물음에 김성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이걸로 국민연금의 손발이 묶였습니다. 주총을 얼마 앞두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연금은 합병안 통과에 있어서 핵심 키였다. 굳이 반대에 서지 않더라도 의결권 행사만 포기해도 한정그룹에게는 치명적이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셈이다.

 루퍼트 황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났을 리는 없을 텐데······ 대체 누굴까요?]

 “아······.”

 루퍼트 황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김성권의 머릿속에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누굽니까?]

 그를 만난 건 단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박태일 대표를 침몰시킨 사람이 누군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생각으로 만났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는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를 포기할 것’이라고 정확하게 말했다.

 어찌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상황과 뭔가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아니, 어쩌면 직접 일을 벌인 게 아닐까?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 있다는 거지?

 김성권은 그가 다음에 한 말들을 떠올렸다. 그는 합병이 무산될 것을 예측하고,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 말했다.

 ‘이때가 기회라고 말했지?’

 한미루는 과연 뭘 노리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김성권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최근 한정물산 거래량이 이상할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그게 이번 일과 무슨 상관입니까?]

 한정물산 주가와 거래량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것은 KSGI와 엘리언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래량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김성권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설마······?’

 “애초에 상당한 물량이 시장에 없었을 가능성은요?”

 루퍼트 황은 당황하며 되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설마 한정그룹 쪽에서 차명으로 주식을 사들였다는 겁니까? 그쪽 자금흐름을 보면 그럴 리 없을 텐데.]

 김성권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 * *

 부정청탁 스캔들은 연일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청와대와 한정그룹 측 모두 부인했지만, 여파는 가라앉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뇌물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한정그룹과 에이티제이와의 연결고리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추측이 사실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그 기자는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메이저 언론사였다면 누가 제보를 했는지 캐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광고주의 눈치를 보지 않는 소규모 인터넷 언론사는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안 그래도 총수일가의 횡령, 배임, 폭행, 폭언 등으로 이미지가 안 좋고, 재판까지 진행 중인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에 뇌물혐의까지 추가되며, 한정그룹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당장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의 합병 추진은 불가능했다.

 주철진이 주민재 회장에게 물었다.

 “특검을 하자는데 괜찮을까요?”

 정말로 특검이라도 실시해 자금흐름을 추적하면 덜미가 잡힐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누구 하나 교도소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정치권 쪽 일은 대통령이 알아서 할 게다.”

 여당인 새한국당은 다수당이고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하다. 특검이 통과될 리 없다. 결국 진실은 밝혀내지 못한 채 의혹으로만 끝날 것이다.

 하지만······.

 주민재 회장은 탄식을 내뱉듯 말했다.

 “더 이상 합병 추진이 불가능하겠군.”

 이는 단지 원점으로 돌아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상당한 후폭풍이 불어 닥칠 것이다.

 KSGI와 엘리언트가 그냥 물러날 리는 없다.

 이들은 가진 지분을 무기 삼아 계속 경영 참여와 주주환원정책을 요구할 것이다.

 주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비핵심자산 처분, 계열사 상장, 자사주 매입, 배당 확대 등의 당근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결국 지배력 약화로 이어지게 된다.

 주민재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하지만 그중 가장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

 주철진은 막냇동생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 개자식이······.”

 주현진은 무릎을 꿇은 채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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