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부정 청탁 (1)
한정그룹은 여론 수습을 위해 총력을 다했다.
먼저 주현진 이사는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물러났고, 운전기사를 만나서 사과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한정그룹 측은 이번 일을 주현진 이사의 개인적인 문제로 선을 그으면서도, 그룹 차원에서 감시기구를 설치해 다시는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동시에 다수의 언론사에 운전기사와 관련한 각종 자료를 보내며 주현진도 피해자라는 식으로 기사를 써줄 것을 요청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10대 재벌가 중 한정그룹 일가만큼 사고를 많이 친 곳도 없다.
일가족 전체가 돌아가며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한 전력이 있을 정도다. 이미 여러 차례 사태를 수습해온 만큼 아예 대응 매뉴얼이 갖춰져 있었다.
그런데 한정그룹이 언론 대응에 나서기 직전.
또 다른 기사가 터졌다.
[(단독) 주현민 이사의 녹취에서 나온 청와대 청탁. 사실인가?]
(전략) 주현진 이사의 녹취에는 ‘주민재 회장이 오영환 대통령을 독대해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을 부탁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 이사의 발언에 따르면 지난번 청와대 기업인 간담회 자리에서 주민재 회장이 오영환 대통령을 독대했고, 그 자리에서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해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또한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지역구 국회의원들에게 로비를 하는 중이라고 발언했다.
이에 대해 엘리언트와 KSGI 측은 ‘사실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한다면 정식으로 ISD(투자자국가소송)에 제소하는 방향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정그룹과 청와대 측의 입장을 묻는 한편······.
주민재 회장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이게 무슨······.”
합병에 있어서 국민연금의 찬성은 필수적이다. 때문에 한정그룹과 정치권 사이에서 교감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안다고 해서 그걸 말로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추측’이나 ‘짐작’이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사실’이 된다.
주현진의 갑질이 악재이긴 해도 합병이 무산될 정도로 치명적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다르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국민연금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국민연금의 한정물산 지분율은 9.9퍼센트.
만약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를 포기한다면 합병에 필요한 표를 확보하기가 어려워진다.
‘대, 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놀라는 주민재 회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가 표시되지 않은 것으로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변조된 목소리는 따지듯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죄송합니다.”
국민연금은 내부적으로는 찬성 방침을 정해놓았다.
그런데 녹취와 기사가 터졌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모두가 ‘청탁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여길 것이다.
[여기서 더 나온 얘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행히 녹취에는 독대해서 부탁했다는 것 이상의 내용은 없었다.
증거가 없는 만큼 서로 부인하면 그만이다.
그 자리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어떤 방식으로 뇌물을 전달했는지는 주현진조차도 모르는 사실이다.
[아시겠지만 사실이 밝혀지면 매우 곤란합니다.]
“절대 그런 일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믿겠습니다.]
통화를 끝마친 주민재 회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합병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KSGI와 엘리언트라는 변수가 생겨났다.
이때까지도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갑질 사건이 터지며, 소액주주들이 등을 돌리고 국민연금 찬성마저 위태로워졌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
‘설마 누군가 뒤에서 상황을 조종하고 있는 걸까? 적절한 시점에 일이 터지도록.’
한참 동안 생각을 하던 주민재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 없겠지.”
의혹은 어디까지나 의혹일 뿐이다.
거기서 뭔가를 더 알아낸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 * *
주현진의 발언을 근거로 야당이 청와대와 여당을 상대로 공세를 펼치며, 한정그룹 합병안은 이제 정치적 문제로 비화됐다.
프리머스 사태, 코발트 게이트에 이어서 이번에는 국민연금 청탁 스캔들마저 터지자 청와대와 여당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정그룹은 청탁 사실을 부인했고 전경련은 지원에 나섰다.
“정부가 기업을 지원하는 것을 두고 청탁이니 뭐니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반기업정서는 기업의 투자와 고용 활성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청와대 대변인까지 나서서 해명했다.
“기업인 간담회에는 기업 활동에 대한 얘기만 나눴고,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오직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의 의결에 따를 뿐, 청와대는 어떠한 지시도 내리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또한 근거 없는 루머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처하겠습니다.”
대변인의 발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자들은 일제히 손을 들며 질문을 던졌다.
“그럼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를 안 한다는 겁니까?”
“맥컬리 컨설팅의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민들 노후자산에 손실을 끼칠 수 있다고 하는데, 찬성할 겁니까?”
청와대 대변인은 이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인터넷은 또다시 난리가 났다.
-야이~ 그래서 의결권 행사 안 할 거야?
-니들 어차피 찬성할 거잖아.
-주민재 회장이 평생 일궈온 회사를 빼앗는다는 게 말이나 되냐?
-그게 왜 주민재 회장 거야? 주식회사면 소유주가 주주 아니야? 그게 마음에 안 들면 상장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럼 국내 재벌그룹 경영권을 헤지펀드에 넘겨주란 말이냐? 당연히 국가가 나서서 지켜줘야 하는 거지.
-그럼 주주를 벌레로 보는 경영진의 손을 들어준다는 건 말이 되냐?
-국민연금이 한정그룹 편들어준다에 내 손목을 건다. 니들은 뭘 걸래?
-만약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한다면 제 목숨을 끊겠습니다!
-나도 찬성에 목숨 검.
-그럼 내기가 성립이 안 되지 않나?
* * *
K문화재단.
설립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명목상으로는 ‘문화라는 매개를 통해 건강하고 하나 된 사회를 실현하여 한국문화와 한류발전에 기여한다’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통령과 관련된 차명재단이라고 보면 됩니다.”
민홍수가 받아온 자료에는 K문화재단의 실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안현철은 그 자료들을 보며 물었다.
“이 내용이 전부 사실이란 말이야?”
“몇 가지 조사해봤는데 맞는 것 같습니다. 재단 이사장이 박순혁인데 바지사장이고, 실세는 사무총장으로 있는 누나 박순자입니다. 김한숙 영부인의 고향 친구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부모님들끼리도 대단히 친한 모양이에요.”
“그것만으로 관련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나?”
“3년 전 만들어진 신생 재단이 전경련으로부터 700억 원대 기부를 받았습니다. 그럼 전경련은 이 돈이 어디서 났을까요?”
“재벌그룹들한테 걷었겠지.”
민홍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
“그렇겠죠. 그리고 재단 설립을 신청한 지 단 하루 만에 허가가 났습니다. 게다가 아무 실적이 없는 재단임에도 문체부의 지원금을 받고 홍보영상 제작까지 했구요. 이래도 청와대와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지.”
안현철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제보자는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아낸 거야? 이 정도면 내부고발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일 텐데.”
“재단이나 청와대 쪽 관련자한테 비밀리에 제보받은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어떻게? 그냥 증권사 직원이었잖아. 그쪽에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러게요.”
민홍수 역시 그 점이 의문이었다. 하지만 제보자가 함구하고 있어서 더 이상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래서 기사 안 낼 겁니까?”
“뭔 소리야?”
이 기사는 다른 기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권력에 비수를 들이대는 셈이다.
그는 KBC 기자로 일하며 오영환 정권이 얼마나 언론을 장악했는지, 정권과 맞선 언론사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 똑똑히 봐왔다.
그런데 이제 반격을 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주현진 이사 갑질 사건 연속보도 덕분에 뉴스트리거에 국민들의 시선이 집중되어있다.
이 상황에서 이 기사를 터트린다면?
파장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보도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걱정과 두려움이 드는 동시에 기자로서의 피가 끓어올랐다.
“바로 이런 걸 보도하기 위해 언론사를 차린 거야!”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그럼. 설마 죽기야 하겠어?”
“······.”
* * *
[(단독) 한정그룹,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K문화재단에 100억 기부. 국민연금 합병 찬성에 대한 대가로 의심돼]
(전략) 3년 전 설립된 K문화재단은 설립계획부터 인가까지 단 사흘 만에 이뤄졌다. 심지어 법인 등기와 대기업 임원들을 초청한 현판식까지 모두 설립허가 당일 단 세 시간 만에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제보자의 증언에 따르면 재단의 실질적인 관리자는 사모총장 박순자로, 그녀는 김한숙 영부인의 고향 친구다.
여러 정황 증거로 봤을 때 대통령의 차명 재단으로 의심되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한수범 대통령 비서실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직접 만나 기업들에게 돈을 걷어 기부금을 내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있다. 전경련은 기업들에게 총 720억을 걷어서 K문화재단에 기부했다.
그런데 최근 에이티제이라는 정체불명의 회사가 100억의 기부금을 냈다. 파나마에 소재지를 둔 에이티제이는 한정그룹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페이퍼컴퍼니로 추정된다.
에이티제이가 100억을 기부한 시점은 오영환 대통령과 주민재 회장이 독대했다고 알려진 청와대 경제인 간담회 직후.
한정그룹이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100억을 지불했다면 이는 국민연금 합병 찬성을 위한 대가성 뇌물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후략)
기사를 본 오영환 대통령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치 온몸의 피가 쏠린 듯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대체 어떤 놈들이······.”
K문화재단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건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다. 한정그룹이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기부금을 냈다는 사실 역시.
그런데 기사에는 마치 장부를 들여다본 것처럼 자금흐름이 명확하게 나와 있었다.
뇌물은 탄핵 사유로 규정되어있을 정도로 중범죄다.
직접 돈을 받는 대신 차명 재단을 통해 ‘기부금’을 받은 것 역시 뇌물수수 혐의를 피하기 위함이다.
사실이 밝혀지면 모든 게 끝장이니까.
‘그런데 이걸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내부에서 폭로라도 있지 않은 이상 누구도 알 수 없는 사실이다.
오영환 대통령은 핸드폰을 꺼내 주민재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얘기가 새나간 겁니까?”
[그건 저희가 묻고 싶습니다.]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 이쪽에서 새나갔다는 겁니까? 애초에 주현진 이사의 발언이 문제 아니었습니까?”
상대는 침착하게 말했다.
[저도 당황스럽습니다. 합병안 통과를 위해서는 국민연금의 찬성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관련 사실을 아는 건 저를 포함해 단 세 명뿐입니다. 분명 말씀드리는데 저희 쪽 문제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