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갑질 폭로 (1)
김성권 대표는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합니까?”
난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첫째로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를 포기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난 지난번 만난 한정그룹 회장 막내아들을 떠올렸다.
재밌게도 이번 합병안의 키는 바로 그가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나뿐이다.
이건 돈을 놓고 벌이는 결투다. 상대를 잡아먹지 않으면 이쪽이 잡아먹힌다. 그러니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먹어야겠지.
“자세한 건 지켜보시면 아실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둘째는요?”
“여기에 관심이 있는 건 엘리언트와 KSGI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다른 세력이 또 있다는 겁니까?”
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제가 관심이 있는 건 합병이 무산된 이후입니다.”
KSGI와 엘리언트의 목적은 뭘까?
당연히 한정물산과 HJ로직스의 합병을 무산시키는 거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당장은 주가가 올라 평가차익을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분쟁으로 인해 오른 주식은 분쟁이 끝나면 떨어지게 되어있다.
합병 전에 주식을 팔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KSGI와 엘리언트는 지금의 주가를 만든 ‘가격조성자’다.
이들이 발을 빼려는 움직임만 보여도 주가는 폭락하게 될 것이다.
가지고 있는 지분을 단기간에 매각하기가 힘든 만큼 팔기 위해서라도 일단 주가를 끌어 올려야 한다.
이전에 했던 방식대로라면 이사 몇 자리를 차지한 다음 비핵심 자산을 매각하고, 비상장 계열사를 상장하고, 배당을 늘려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딱 그가 생각하고 있는 지점.
그러나 난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다. 그러려면 KSGI와 엘리언트와 손을 잡아야 한다.
“합병이 무산되면 한정물산 주가는 크게 하락할 겁니다. 그때부터 진짜 시작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설마······?”
김성권 대표의 눈이 커졌다.
내가 뭘 말하는지 눈치챈 것이다.
“그게 진짜입니까?”
“때가 되면 아실 겁니다.”
아마 나한테 묻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닐 것이다.
난 더 이상 질문을 받는 대신 시계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20분 다 된 것 같네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 * *
주현진은 HJ푸드 공장 시찰을 위해 차를 타고 경기도로 이동했다.
평소였다면 다른 사람에게 맡겼겠지만, 지금은 지주사 합병안을 두고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회장의 막내아들이자 부회장의 동생으로서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주현진은 차 안에서 친구와 통화했다.
“국민연금이야 어차피 우리 쪽에 표를 던지게 되어 있어. 아버지께서 지난번 기업인 간담회에서 VIP를 만나 직접 부탁했어. 계열사 전체가 나서서 여야 국회의원들에게도 기름칠 중이기도 하고. 투자 더 하겠다, 공장 더 하겠다, 직원 더 뽑겠다, 정치후원금도 더 내겠다 등등. 막말로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우리 편 안 들어주면 어쩔 건데? 걔들 입장에서도 말 안 듣는 헤지펀드보다는 말 잘 듣고 해달라는 거 다 해주는 재벌 손을 들어주고 싶지 않겠어? 국민연금만 찬성하면 주총은 해보나 마나지.”
[그래도 아직 소액주주들 표가 남아 있잖아.]
주현진은 코웃음을 쳤다.
“크크, 소액주주? 그놈들이 반대해봐야 어쩔 건데? 지금 반대하는 놈들도 속으로는 주가 올려서 팔고 나갈 생각뿐일걸. 말이 좋아 주주지 개미 새끼들 아니야? 개미가 뭉쳐봐야 개미 떼밖에 더 되겠어? 헤지펀드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벌레 같은 놈들 눈치볼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나저나 그 새끼는 어떻게 할 거야?]
“아! 그 개새끼?”
[대충 알아보니까 그놈, 양자은 상무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던데. 프리머스 펀드 부실도 터트리기 전에 보고서 올렸다가 까이니까 빡쳐서 지 멋대로 터트린 거야. 양자은 상무님은 그걸 이용한 것뿐이고.]
“그래?”
[성윤아랑도 별 관계 아닌 모양이던데.]
“그게 정말이야?”
주현진은 그날 한미루의 행동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한정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욕을 하고 큰소리치기까지 했다.
그래서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허세였단 말이지?’
그런 허접한 놈한테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역시 그 자리에서 그냥 밟아버렸어야 했는데!’
분노로 이를 가는데 갑자기 차가 급정거하며 몸이 앞으로 쏠렸다.
놀란 주현진은 바로 운전석을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퍼억!
“씨발새꺄! 운전 똑바로 안 해?”
중년의 운전기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앞에 차가 끼어드는 바람에.”
“그럴 땐 그냥 받아버리라고 몇 번을 말해? 누구 마음대로 브레이크를 밟아? 내가 들이받으라고 했잖아!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죄송합니다, 이사님.”
정말로 받아버리면 그땐 사고를 냈다고 난리 칠 것이다.
지난번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을 때는 자길 죽일 생각이냐며, 살인미수로 고소하겠다고 며칠 동안 괴롭혔다.
심지어는 그것도 모자라 차 수리비를 월급에서 차감했다.
차가 다시 출발했지만 주현진은 분이 안 풀리는지 운전석 헤드레스트를 계속 발로 걷어찼다.
“씨발, 맨날 죄송할 짓을 왜 해? 그 나이 처먹고도 학습능력이 없어? 대가리가 나빠? 그러니까 애새끼도 지능이 딸리고, 마누라도 도망간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그따위로 운전하면 당장 모가지야. 애새끼랑 길바닥에 나앉아서 구걸하기 싫으면 똑바로 운전해. 알았어?”
“아, 알겠습니다.”
주현진은 잠시 동안 운전기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설마 제 말이 기분 나빠요?”
그러자 운전기사는 억지로 웃었다.
“하하. 그, 그럴 리가요.”
“그래. 좀 웃어. 웃으니까 보기 좋네요.”
주현진은 다시 친구와 통화했다.
“아! 별일 아니야. 김 기사가 운전을 좆 같이 하기에 똑바로 하라고 주의 좀 줬어.”
* * *
지방에 있는 식품공장을 시찰하고 돌아오니 어느새 11시가 넘었다.
주현진이 탄 차는 청담동에 있는 고급 빌라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업무용으로 타고 다니는 벤츠 S클래스 외에도 페라리, 맥라렌, 포르쉐 등의 외제차들이 일렬로 주차되어 있었다.
공동현관문에 최대한 가깝게 차를 세운 운전기사는 먼저 내려서 차 문을 열어주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사님.”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주현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5만 원짜리 몇 장을 내밀었다.
“늦었으니 택시 타고 가요. 남는 돈으로 애 치킨도 좀 사먹이고.”
손은 앞이 아닌 아래를 향해있었다.
최대한 허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받으라는 뜻이었다.
운전기사는 허리를 깊게 숙이며 두 손으로 돈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내일 일찍 나갈 수도 있으니까 6시까지 와서 대기하고.”
“알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주현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던 운전기사는 다시 몸을 피고 차를 주차했다.
시계를 보니 다행히 아직 막차 시간 전이다.
집으로 가기 위해 근처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떨려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처음 지인을 통해 재벌가의 운전기사가 됐을 때만 해도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폭언과 폭행이 시작됐다.
폭행은 그냥 가볍게 머리를 때리거나 발로 차는 정도라서 견딜 만했다. 하지만 폭언은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마치 혼잣말처럼 가볍게 하던 욕설은 며칠 지나지 않아 그를 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날이 갈수록 폭언은 점점 심해졌다.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더 잘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느 순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현진의 목적은 그저 그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주현진 이사의 눈도 제대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의 앞에서는 항상 고개를 푹 숙였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그만둬야겠다는 마음이 들 때쯤에는 수십만 원씩 팁을 내밀었다.
아무리 심한 욕을 듣더라도 그저 이를 악물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배운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일을 그만두면 이보다 더 나은 일자리를 찾는다는 보장도 없다.
아내는 집을 나갔고, 아들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도······.
‘정말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가끔은 욱하는 심정이 들 땐 차를 몰고 강이나 절벽으로 돌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주현진은 과연 어떻게 할까? 여전히 욕하며 발길질을 할까, 아니면 살려달라고 빌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집에서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들 때문이다.
자신이 죽고 나면 아들은 누가 보살핀단 말인가?
절망의 깊은 곳에는 끓어오르는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절대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아들을 모욕한 것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하지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다 한들 과연 주현진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그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주현진 이사님의 운전기사 김승도 씨 되시죠?”
운전기사는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상대를 훑어보았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 * *
난 막차 끊기기 전에 집에 가야 한다는 그를 붙잡고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정장을 입은 중년의 운전기사는 약간 마른 외모에 안경을 꼈다. 등은 굽었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고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은 흐리멍덩했다.
늦은 시간까지 운전을 했기 때문인지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나를 보았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궁금하겠지.
“전 한미루라고 합니다.”
그는 내 이름을 듣더니 뭔가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개새끼······.”
“예?”
지금 내 욕한 거 맞지?
그는 자기가 말하고도 놀란 듯 손을 내저었다.
“앗! 죄송합니다. 계속 욕하는 걸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
아니, 대체 차에서 내 욕을 얼마나 한 거야?
그는 화제를 돌리려는 듯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다른 게 아니라 주현진 이사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는 경계의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어떤 걸 말입니까?”
“주현진 이사가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폭언과 폭행을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혹시 그런 일이 있었나 해서요.”
그의 손이 살짝 떨렸다.
“당신 기자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그걸 왜 묻습니까?”
“그냥 궁금해서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대체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쓸데없는 얘기할 거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을 떠보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모양이다. 괜히 말실수했다가는 큰일 날 테니.
“주현진 이사의 갑질을 폭로할 생각이라면 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는 멈칫했다.
“뭐라구요?”
주현진은 아버지인 주민재 회장과 큰형인 주철진 부회장에 비해 대중들에게 이름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인지도를 한 방에 끌어올리고 전 국민에게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키는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바로 수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운전기사를 폭언, 폭행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