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합병안 (4) (124/529)

 125화. 합병안 (4)

 법원은 엘리언트가 낸 자사주 매각 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한정물산은 예정대로 자사주를 전량 매각했다.

 매각 방식은 주식교환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로써 한정물산은 5.5퍼센트의 우호지분을 추가로 확보하며 한숨 돌렸다. 이제 국민연금 표만 확보하면 확실한 승기를 잡을 수 있다.

 한정그룹 측은 총력을 다해 청와대와 정치권 설득에 들어갔다. 주민재 회장은 기업인 간담회 자리에서 따로 대통령을 만났다.

 기조실의 박운용 실장은 합병계획을 진두지휘했다.

 기자들에게 로비를 하고 언론 기사들을 모니터링하는 것은 물론, 직원들을 총동원해 포털사이트에 합병에 찬성하는 글을 올리고, 합병을 반대하는 글이 보이면 댓글을 달거나 신고를 넣도록 했다.

 양자연합 역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투자자들을 설득하며 우호지분을 끌어모으고 여론전을 펼쳤다. 하지만 그동안 한정물산이 언론과 쌓아놓은 유착관계를 넘지는 못했다.

 홍보비를 쏟아부은 효과가 있는지 여론은 한정그룹을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상황을 전달받은 주현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더니 꼴좋네.”

 박명훈은 신중하게 말했다.

 “아직 안심하기 일러. 소액주주들 표도 남아있으니까.”

 “그놈들이 뭘 할 수 있겠어? 합병 이후에 주가가 크게 오를 거라고 홍보하면 다들 가만히 있겠지.”

 원칙적으로 단 1주라도 가지고 있으면 주총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액주주들은 의결권에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주가가 오르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렇긴 하지만 저쪽에서 추가매수에 나설 가능성도 있으니까.”

 “어차피 주가가 배 이상 오른 만큼 이제 와서 대량으로 매수하기는 힘들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

 지금 상황에서는 소량만 매수해도 주가가 큰 폭으로 뛴다. 매수를 하면 할수록 매수가가 높아지니, 추가매수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해.”

 “뭐가?”

 “거래량이 너무 적어.”

 “그거야 개인들이 주가 상승을 기대해 매도를 안 하니 그런 거잖아.”

 “그 점을 감안해도 거래량 감소가 심상치 않아.”

 한정물산 거래량은 연일 최저치를 기록했다. 어찌나 거래가 줄었는지 1분씩 호가가 멈춰있는 일도 잦았다.

 걱정하는 박명훈과는 달리 주현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넌 항상 걱정이 너무 많아. 아버지 닮아서 그런가?”

 박명훈의 아버지는 기조실장 박운용이다.

 그는 주현진과 동갑이었고 자연스레 어린 시절부터 주현진을 보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아무튼 합병이 끝날 때까지는 최대한 조심해야 해. 회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사항이야.”

 * * *

 난 다시 계산을 해보았다.

 엘리언트와 KSGI 양자연합이 확보한 지분은 19.1퍼센트.

 한정그룹 측이 확보한 지분은 총수일가와 친인척들 10.6퍼센트에 자사주 매각으로 얻은 5.5퍼센트. 여기에 우호지분과 국민연금 9.9퍼센트를 더하면 대충 40퍼센트까지 올라간다.

 기관들이 확보하고 있는 지분을 제외하면 현재 시장에 남아있는 지분은 약 25퍼센트. 하지만 실제로는 이중 3분의 1이 넘는 물량이 우리 손에 있다.

 동호 선배가 말했다.

 “지금 거래량 보면 조만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텐데.”

 “그렇겠죠.”

 판은 벌어졌으니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왔다.

 사라가 말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않나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해요. 여기에 소액주주들 표도 가져와야 하구요.”

 지금 상황에서는 소액주주들 표심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 표들을 한정그룹 측에서 빠르게 집어삼키는 중이다.

 한정그룹은 전 직원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 국내 증권사들에게 협조를 요청해 위임장을 긁어모으다시피 하고 있다.

 이런 흐름이 계속되면 별로 좋지 못하다.

 한정그룹이 합병 통과에 필요한 만큼의 표를 확보한다면 우리가 가진 지분은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니 국민연금 의결을 막고, 소액주주들 표를 반대쪽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

 “둘 다 쉽지 않은 일이군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총수일가의 경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야죠.”

 “언론들은 전부 한정그룹 편인 것 같은데. 좋은 방법이 있나요?”

 큰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니 내가 어떤 수를 내놓을지 기대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왠지 감시자라기보다는 구경꾼 같은 느낌이다.

 다행히 나에게는 계획이 있다.

 “일단 사람 좀 만나고 올게요.”

 * * *

 한국에서 사모펀드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건 2004년 12월 간접투자자산운용법이 시행된 이후.

 비록 역사는 짧지만 그사이 뛰어난 투자자들이 다수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을 꼽자면 세 명이다.

 첫째는 당연히 MKK파트너스의 강명국 회장.

 칼나인그룹 헤드 출신으로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유명인이다. 그가 칼나인그룹을 나와 만든 MKK파트너스는 국내 재계 서열로 보면 현재 6위, 사모펀드로 보면 아시아 전체에서 1위 규모다.

 두 번째로 유명한 사람은 프리머스 펀드를 만들어 사모펀드 대중화에 앞장선 박태일 대표.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신입사원(?)의 폭로로 인해 프리머스 펀드는 사기라는 점이 밝혀졌고, 그는 지금 구속돼 재판 중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이 바로 사실상 국내 최초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KSGI를 만든 김성권 대표다.

 난 KSGI로 김성권 대표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했다.

 KSGI쯤 되면 웬만한 재벌그룹보다 위에 있다. 그런 곳의 대표는 내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안 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는데 놀랍게도 바로 만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KSGI는 테헤란로에 있는 30층짜리 빌딩 세 개 층을 사용 중이다.

 컨티뉴 캐피탈 지사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아 걸어가도 충분했다.

 빌딩 앞에서는 ‘투기자본은 물러나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몇 명이 시위 중이었다. 그들은 절대 한정그룹이 투기자본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전단지를 나눠주었다.

 난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대표실은 그렇게 크게 않았다. 외형보다는 실속을 중시하는 성격이 드러나는 듯했다. 그래도 전망은 좋아 강남 일대의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내가 들어서자 안에 있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이는 대략 40대 후반.

 키는 작고, 체구는 왜소하다. 은테 안경을 꼈고, 머리는 단정한 2대8 가르마. 겉으로는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실체는 손짓만으로 수조 원을 움직일 수 있는 사모펀드계의 거물이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김성권입니다.”

 난 그 손을 잡았다.

 “한미루입니다. 한창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만 다음 일정이 있어서 20분 정도밖에는 시간을 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김성권 대표는 웃음을 지었다.

 “만나자는 얘기를 듣고 좀 놀랐습니다. 저도 예전부터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저를요?”

 “프리머스 펀드 부실을 폭로한 신입사원이 누군지 궁금했으니까요.”

 동종 업계에서 벌어진 일이니 사건의 경과에 대해 웬만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사건으로 나도 제법 유명해진 모양이다.

 인사를 끝마친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설마 그 정도 부실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운이 좋았습니다.”

 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했듯 적당히 둘러댔지만, 김성권 대표는 감탄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지나친 정보를 가지고 부실을 알아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합니다. 그 정도로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흔치 않죠.”

 그는 말을 하면서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탐색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는 농담처럼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혹시 취업 자리를 찾고 계신 겁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취업시켜주실 수 있나요?”

 김성권 대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말에 난 깜짝 놀랐다.

 KSGI는 국내 사모펀드 업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 투자자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꿈의 직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만큼 아무나 뽑지 않는다. 말단직원으로라도 입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스펙과 경력이 필요하다.

 “제가 KSGI에 입사할 만한 능력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김성권 대표는 농담처럼 말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어차피 능력이 안 되면 못 버티고 나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하긴. 능력도 안 되는 주제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을 만큼 사모펀드 업계가 만만치는 않지.

 만약 DA증권을 다니던 중 이런 제안을 받았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이직을 결정했을 것이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오늘은 취업을 부탁드리려고 온 건 아닙니다.”

 “아쉽네요.”

 표정을 보니 말만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 아쉬워하는 듯하다.

 “그럼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어서요.”

 “뭔가요?”

 “한정물산과 HJ로직스의 합병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초면에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상당히 무례한 일이다. 그럼에도 김성권 대표는 불쾌감을 나타내는 대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째서 그걸 묻는 겁니까?”

 “지금은 순수한 호기심이라고 해두겠습니다.”

 “합병은 무산될 겁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게 당연하다.

 “정말로 그럴까요? 주총에 참석하는 주식을 약 80퍼센트로 계산한다면 전체 주식의 55퍼센트만 확보해도 합병안 통과가 가능합니다. 국민연금만 찬성한다면 한정그룹은 합병안 통과에 필요한 만큼의 표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국민연금에 합병안에 반대해야 한다는 서한을 보내는 한편, 소액주주들에게도 반대를 호소했다.

 하지만 상황은 명백하게 불리한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뭡니까? KSGI가 주총에서 질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난 김성권 대표를 보았다.

 왜소한 체구와 선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눈빛은 맹수와도 같았다.

 금융시장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검투장과 다름없다. 돈을 벌기 위해 자본과 자본끼리 치열하게 경쟁하고, 때로는 손을 잡고 협력한다.

 이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냉철한 분석력과 불도저 같은 실행력은 필수다.

 이 업계에 있는 사람 중 누군들 안 그렇겠냐마는, 그중에서 김성권 대표는 특히 더 승부사적 기질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사냥하듯 전력을 다해 기업을 집어삼킨다.

 덕분에 KSGI는 행동주의 헤지펀드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이런 투자방식은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실패하면 리스크가 만만치 않다. 실제로 1회차 때는 실패하며 수천억 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끼어들며 상황이 달라졌다.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반대요?”

 난 웃으며 말했다.

 “KSGI가 이길 겁니다. 아마 굳이 주총까지 갈 것도 없을 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