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합병안 (3)
총수일가든 양자연합이든 아직 어느 쪽도 필요로 하는 만큼의 지분을 확보하지 못했다.
때문에 소액주주들의 표심이 중요했다.
한정그룹 측에서는 각 증권사에 협조를 요청했다. 여기에는 DA증권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지점 직원들은 한정물산 주식이 있는 고객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위임 의사를 물었고, 애널리스트들은 관련 리포트를 작성했다.
여기서 국내 증권사와 외국계 증권사의 성향이 극명하게 갈렸다.
외국계 증권사들은 합병비율을 지적하는 리포트를 낸 반면, 국내 증권사들은 마치 수령님의 위대한 결단을 찬양이라도 하듯 합병에 찬성하는 리포트만 쏟아냈다.
이동호는 따지듯 말했다.
“이번 합병안은 명백히 한정물산 주주들에게 불리하게 정해졌습니다. 이건 주주들에 대한 배임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찬성하라구요?”
“아니, 왜 그렇게 흥분해?”
이동호는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바로 한정물산 소액주주입니다.”
우백현 과장은 잠시 눈을 크게 뜨며 이동호를 보았다.
“이야! 많이 벌었겠는데.”
“예전에 산 건 이제 간신히 본전입니다.”
얼마 전에 산 1억은 두 배 먹었지만.
“주식해서 돈 안 날렸으면 성공한 거지.”
너무 맞는 말이다.
“아무튼 당장 저부터 찬성 못 하겠는데, 찬성하라는 리포트를 쓰라는 게 말이 됩니까?”
지금 주가 상승은 분쟁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다.
합병안이 통과되면 다시 폭락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합병안에 찬성하라고 하는 것은 소액주주들에게 자신들의 머리에 날아올 총알을 빌려주는 것에 동의하라는 얘기나 다를 바 없었다.
“이제까지 잘만 썼잖아. 그렇게 따지면 그동안 쓴 매수 리포트 중 몇 종목이나 올랐는데?”
“······반반 아닐까요?”
국내 증권사들 상당수는 재벌그룹 계열사다. 그게 아니더라도 재벌그룹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리포트에 조금이라도 안 좋은 얘기가 있으면 바로 해당 기업에서 항의가 들어온다. 때문에 국내 증권사들은 매수 리포트는 잘 내도 매도 리포트는 거의 내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애널리스트이자 소액주주의 한 사람으로서 소신껏 쓰겠습니다.”
* * *
[(DA증권 리포트) 한정물산-HJ로직스 합병은 경영권 승계를 위한 대국민 사기극]
(전략) 합병비율이 명백히 한정물산 측에 불리하게 정해졌음에도 한정그룹 측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합병 이후 경영효율화로 주가가 오를 거라는 한정그룹 측의 주장 역시 합병을 위해 일부러 주가를 떨어트렸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한정물산에서는 합병의 이유로, 비용 절감, 시너지 효과, 글로벌 경영 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다른 계열사도 아닌 주철진 부회장이 대주주로 있는 HJ로직스와의 합병을 추진하는 이유는 전 국민이 알다시피 경영권 승계가 목적이다.
이번 합병안이 한정그룹 전체에 이익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한정물산만 놓고 보면 확실한 손해다.
따라서 한정물산 경영진이 합병안에 찬성하는 것은 심각한 배임행위이며, 한정물산 소액주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날강도 같은 짓이다.
주주들은 이러한 점을 인지하고 위임장 작성에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 한다.
대부분의 애널리스트들이 합병 찬성을 홍보하는 상황에서 한 애널리스트가 소신에 따라 작성한 이 리포트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리포트를 다 읽은 나는 해당 리포트를 작성한 애널리스트를 쳐다보며 말했다.
“되게 잘 쓰셨네요.”
동호 선배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내 평생의 역작이나 다름없지.”
이거 쓴 다음 바로 사직서 내고 나왔다고 한다.
동호 선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뭐 언론이고 증권사고 다 재벌그룹 편이야. 헤지펀드는 죽일 놈들이고.”
“한국은 기업과 총수일가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주주 자본주의가 발달된 미국에서는 자신이 창업한 기업에서 창업자가 쫓겨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한국은 경영권 분쟁을 마치 남이 힘들여 일궈놓은 가업을 빼앗는 도적질쯤으로 여긴다.
그게 싫으면 상장하지 말고 개인회사로 운영했어야지.
“앞으로의 계획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 건가요?”
“잠깐만요. 한 명 더 올 테니 그때 설명할게요.”
“응? 누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큰 키에 늘씬한 체형, 뚜렷한 이목구비에 커다란 눈,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
갑자기 나타난 외국 미녀를 본 동호 선배는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외국인이 잘못 찾아오신 모양인데.”
“아니요. 맞게 찾아오셨어요.”
사라는 나를 보며 말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미루 씨의 예측대로 되었네요.”
동호 선배는 나와 그녀를 번갈아보았다.
“뭐야? 아는 사이야?”
“예. 이쪽 분은 사우디 왕자님의 사촌여동생이에요. 현재 에이오일 재무이사로 일하고 계십니다.”
“응?”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동호 선배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우디 왕자님의 사촌여동생이라는 것과 에이오일 재무이사로 일하고 있는 것 중 뭐가 농담이야?”
“둘 다 진짜예요.”
“······.”
“일단 서로 인사하세요.”
사라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사라 에이버리예요.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세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회의실에 앉았다.
“이제 다 모였으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난 강의를 하듯 화이트보드에 쓰며 설명했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엘리언트 매니지먼트와 KSGI가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합니다.”
동호 선배는 손을 들어올렸다.
“나 대충 아는데.”
사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알아요.”
김범석도 슬쩍 손을 들었다.
“저도 압니다.”
역시 전문가들 모아놓으니 다 알고 있구나.
그래도 준비해온 자료가 아까워서 말했다.
“알아도 또 들으세요.”
먼저 엘리언트 매니지먼트는 1978년 폴 엘리언트 아닉스가 창업한 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로, 현재 운용자산은 30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KSGI는 한국계 헤지펀드.
창업자인 김성권은 나와 마찬가지로 DA증권 애널리스트 출신이다. 채권 애널리스트였던 그는 재벌그룹의 지배구조 문제를 분석한 보고서를 내며 유명해졌다.
그는 대주주의 배임, 횡령, 갑질, 편법증여, 일감 몰아주기 등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총수일가의 황제경영과 기업 지배구조만 개선해도 기업가치를 크게 올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가재는 게 편이라고, 한국 증권사가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의 주장은 공염불에 그쳤다.
국내 증권사의 한계를 느낀 그는 HSBC 산하에 있는 PEF로 자리를 옮겼고, 이때부터 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용진개발의 지분 48퍼센트를 취득해 계열사들을 정리하고 지배구조를 개선해 주가를 세 배로 끌어올린 다음 매각했고, SR통운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수익을 냈다.
몇 차례 성과를 입증한 그는 외부의 투자를 받아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차렸다. 그게 바로 KSGI(Kim Sung Gwun Investment)다.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외국에서 그리 드물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사실상 최초다.
이들은 보통 단기간에 최대한 많은 수익을 얻는 것을 목표로 움직인다.
일반적인 투자방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일정 이상의 지분을 매수하거나 회사를 통째로 인수한 다음, 영업과 관련 없는 비핵심 자산과 계열사의 보유 지분을 매각해 현금화시키고 이를 자사주 매입과 배당에 쓴다.
주주들에게 직접 혜택이 돌아가는 일인 만큼 이렇게 하면 주가가 상승하는 효과가 있다.
이 과정에서 회사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영진의 비리를 캐서 고소고발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주가를 띄우고 기업가치를 올린 다음 배당과 차익을 챙겨서 팔고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경영을 투명화시키고 소액주주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반면 기업의 투자여력을 소진시켜 미래가치를 훼손한다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
헤지펀드가 자본으로 기업을 집어삼키는 게 좋든 싫든 옳든 그르든, 금융시장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현재 한정물산 지분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민재 회장이 4.3퍼센트, 주철진 부회장이 3.3퍼센트. 여기에 친인척들 지분을 다 합쳐봐야 10퍼센트를 조금 넘는다.
반면 양자연합은 현재 19.1퍼센트.
이렇게만 보면 양자연합이 유리해 보인다.
동호 선배가 말했다.
“총수일가의 경우 우호지분이 많잖아.”
“그렇죠.”
초록은 동색이라고 재벌은 재벌 편이다. 설사 안 좋은 사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품앗이를 하듯 서로 도와줄 것이다.
우호지분으로 분류되는 건 약 15퍼센트.
“국민연금 9.9퍼센트는?”
국민연금의 운용자금은 약 500조 원.
이는 세계적으로도 손가락에 꼽을 만한 규모다. 당연히 국내증시의 최대 큰손이고, 증시에 상장된 대부분의 대기업의 지분을 약 10퍼센트씩 들고 있다(운용원칙상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한 종목을 10퍼센트 이상 보유하지 않는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편들 가능성이 높을 거예요.”
“자사주 매각은 당연히 이뤄질 테니, 국민연금까지 편들어주면 거의 40퍼센트를 확보하는 셈이군.”
“반면 해외기관들은 양자연합 편을 들 거예요. 양자연합의 우호지분은 대략 5퍼센트라고 봐야겠죠.”
“그럼 이쪽은 대략 25퍼센트. 결국 주총 전까지 얼마나 더 매수를 하고, 소액주주들의 표를 끌어모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겠네.”
사라는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느 쪽이 이길 거라고 예상해요?”
“지금으로서는 한정그룹 측이 유리하겠죠.”
사실 난 이 게임의 끝을 알고 있다. 일이 터졌을 시점에는 내가 DA증권에서 일하고 있었던 때니까.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결과는?
엘리언트와 KSGI의 패배였다.
재벌그룹들의 지원과 국민연금의 가세로 한정그룹은 주총 참여주식 중 69퍼센트를 확보한 반면, 양자연합은 31퍼센트에 그쳤다.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주총에서 패하며 그들이 사모은 한정물산 주식은 HJ로직스 주식으로 바뀌었고, 지분율은 낮아졌다.
이후 엘리언트와 KSGI는 한정물산 주식을 전량 매각하고 철수한다. 손실액은 대략 1조에서 2조 정도로 추측되었다.
물론 엘리언트라고 해서 모든 투자를 성공한 것도 아니고, 손실을 본 적도 몇 차례 있다. 하지만 조 단위의 손실을 입은 건 이번이 최초다.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시장과 미국 시장의 차이를 잘 몰랐기 때문.
금융시장이 발달된 미국은 주주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은 좀 다르다.
언론도 재벌 편이고, 정부도 재벌 편이고, 법원도 재벌 편이다.
언론은 입을 모아 합병 찬성을 광고했고, 국민연금은 총수일가의 손을 들어줬고, 법원은KSGI가 낸 모든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여기에 국민들 역시 재벌에 대한 반감보다도 해외 투기자본에 대한 반감이 더 컸다.
아마 엘리언트는 KSGI와 연합해서 나서면 다른 주주들도 일제히 호응해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설마 총수일가의 이익을 위해 모두가 일심동체가 될 줄은 몰랐겠지.
한마디로 한국 시장을 너무 우습게 봤다가 참교육 당했다랄까?
이후 엘리언트는 국민연금의 부당한 의사결정으로 손실을 입었다며, 한국 정부에 ISD(투자자 국가소송)를 제기한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끝날 일이지만······.
“자, 그럼 여기서 제3의 세력이 끼어들면 어떻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