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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합병안 (2) (122/529)

 123화. 합병안 (2)

 “엘리언트도 엘리언트지만 KSGI는 뭐 하는 놈들입니까? 설마 정말로 경영에 간섭하려고 저러는 겁니까?”

 주철진 부회장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한정그룹은 그의 할아버지가 세운 왕국이고 아버지가 물려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지켜보며 자신이 다음 왕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이 무산되게 생겼다. 아니, 자칫 잘못했다가는 왕국에서 쫓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던 주민재 회장이 입을 열었다.

 “진정해라.”

 “하지만······.”

 “고작 이 정도 일에 그렇게 흥분해서 나중에 큰일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나이가 들어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았지만 여전히 위엄이 서려있었다.

 주철진 부회장은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닫았다.

 “아, 알겠습니다.”

 주민재 회장은 경영진을 둘러보며 말했다.

 “좋은 생각 있으면 한 명씩 얘기해봐.”

 눈치를 보던 임원들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호세력에게 한정물산 자사주를 매각해 의결권을 확보해야 합니다.”

 “방송사와 신문사, 그리고 포털에 합병의 긍정적 효과를 강조하는 광고를 시작했습니다. 주총까지 홍보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주요 투자자들을 만나 다시 한번 확답을 받겠습니다.”

 “소액주주들을 설득해 위임장을 받아야 합니다.”

 “투기자본이 경영에 간섭하면 구조조정으로 대량해고가 발생할 수 있다고 노조 측에 넌지시 언질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노조가 들고 일어나면 여론도 합병을 지지할 겁니다.”

 황평수 전무가 말했다.

 “금감원과 검찰에 엘리언트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는 건 어떻습니까?”

 엘리언트는 4.97퍼센트까지 보유한 상태에서 단 이틀 만에 지분을 6.1퍼센트로 늘렸다. 당연히 정상적인 거래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금융가에서는 엘리언트가 TRS(총수익스와프)를 통해 지분을 늘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타금융사로 하여금 대신 주식을 매수하게 한 다음 한 번에 넘겨받는 방식이다.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식을 사용한 이유는 공시를 피하기 위함이다.

 한국 주식시장은 규정에 따라 특정 종목 주식의 5퍼센트 이상을 보유할 경우 보유량과 보유 목적을 공시해야 한다.

 만약 엘리언트가 장내에서 매입하며 공시를 냈다면 한정그룹은 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5퍼센트 직전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갑자기 지분율을 끌어올리는 바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TRS 자체가 불법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지분 파킹이나 이면계약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증거를 남겼겠나? 조사해 봐도 입증이 불가능할 텐데.”

 “어차피 결과가 나오려면 몇 년은 걸립니다. 하지만 일단 검찰이 조사에 나선다고 하면, 해외 투기자본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국내 대기업의 경영에 간섭한다는 점을 크게 부각시킬 수 있습니다.”

 주민재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방법이로군.”

 불법이 있었든 아니든 불법으로 몰아가면 그만이다.

 박운용 실장이 말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국민연금입니다. 국민연금만 찬성해도 우호지분과 자사주를 포함해 전체의 50퍼센트 가까이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규모의 연기금으로 한국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보유한 한정물산 지분은 9.9퍼센트로 2대 주주. 때문에 이번 사안에 대해 어느 쪽 손을 들어줄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국민연금은 대부분의 경우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만약 한정그룹 측이 확실한 승기를 잡고 있었다면 중립을 지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움이 필요했다.

 회의가 끝나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만 남게 되자 주철진 부회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로 괜찮을까요? 엘리언트도 KSGI도 본격적인 것 같은데.”

 현재 상황만 봐서는 주가만 끌어올리고 빠질 생각은 아닌 듯했다. 정말로 주총에서 표 대결을 벌이려는 건가?

 주민재 회장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대통령을 직접 만나봐야겠구나.”

 “대통령이 승낙할까요?”

 “그렇겠지. 그동안 받아먹은 게 얼만데.”

 한정그룹은 재계 10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과 언론에 끼치는 영향력은 재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막강한 로비력을 지녔다.

 특히 오영환 대통령에 대해서는 국회의원 때부터 지속적으로 후원을 해왔다.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정부 정책에 충실하게 따랐고, 대통령의 고향에 공장을 세워 투자와 고용을 했고, 여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이 순간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주민재 회장은 오영환 대통령을 떠올렸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 몫은 칼 같이 챙기는 사람이다.

 “몇 가지 요구를 하겠지만 정부 역시 국내 대기업이 외국계 자본에 넘어가길 바라진 않겠지. 걱정되냐?”

 주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라. 사업하다 보면 사기꾼도 만나고 도적 떼도 만나고 하는 법이니.”

 “알겠습니다.”

 실제로 그는 창업자이자 아버지인 주휘순과 함께 한정그룹을 키워오며 온갖 일들을 겪어왔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권에 밉보여서 각종 국책사업에서 배제됐고, 문민정부로 바뀌더니 비자금 조사를 받아 책임을 지고 잠시 회사를 떠나야 했다.

 IMF 때 수많은 대기업들이 무너졌지만 한정그룹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더욱 성장해 어느새 대한민국 10대 그룹 반열에 올라섰다.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후계자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은퇴하면 모든 게 끝난다.

 아버지는 다정하게 큰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이번 합병만 통과되면 누구도 한정그룹을 넘보지 못할 테니.”

 * * *

 한정그룹은 우호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 방법 중에는 한정물산이 보유한 5.5퍼센트의 자사주를 매각하는 것도 포함됐다.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를 우호세력에 매각하면 그만큼의 우호지분을 확보할 수 있다.

 엘리언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법원에 한정물산 자사주 매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청와대는 예정에 없던 기업인 간담회를 열었고, 주민재 회장은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청와대로 향했다.

 엘리언트와 KSGI는 글로벌 경영 자문회사 맥컬리 컨설팅에 합병에 대한 의견을 묻는 한편, 국민연금에 부당한 합병안에 반대해야 한다는 공식서한을 보냈다.

 한정그룹은 방송사, 신문사, 포털 할 것 없이 모든 광고를 싹쓸이하며 합병의 필요성을 홍보했다.

 홍보팀 직원들은 매일 같이 기자들을 만나 접대를 했다.

 대규모 광고를 수주한 언론들은 합병에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며, 대기업 홍보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 새로운 한정이 이끌겠습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한정그룹!]

 [합병은 비상을 위한 힘찬 날갯짓!]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한정이 함께 뛰겠습니다!]

 김성권 대표는 인터뷰에서 주민재 회장과 주철진 부회장의 횡령, 배임, 폭언, 폭행, 갑질, 일감 몰아주기 등의 잘못과 각종 경영실패를 지적했다.

 마치 콜로세움에서 검투라도 하듯 칼과 방패를 격렬하게 휘두르는 모양새다. 하기야 판에 걸린 금액을 생각하면 서로 목숨을 걸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기사가 쏟아졌고, 인터넷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헤지펀드와 재벌의 싸움이라.

 -서버린 자산운용이 LK그룹 경영권 공격한 거 생각나네.

 -그거 누가 이겼음?

 -LK그룹이 승리했어요. 서버린이 LK 지분을 27퍼센트까지 확보했는데, 결국 GG치고 다 팔고 떠났어요.

 -맞음. 그때 털렸으면 지금 LK그룹은 공중분해 됐을걸.

 -푸하! 서버린이 졌어? 투기자본 좆된 거 실화?

 -ㅋㅋㅋ 완전 사이다네.

 -LK그룹이 이겼다는 게 뭔 쌉소리냐? 경영권 분쟁으로 주가 띄워서 서버린이 6개월 만에 당시 돈으로 1조를 넘게 벌고 나갔는데. LK그룹은 그거 막느라 완전 만신창이 됐고.

 -기업이야 어찌되든 헤지펀드는 돈만 벌면 됨~

 -여러분! 투기자본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글로벌 투기자본 VS 횡령배임으로 재판받는 재벌. 당신의 선택은?

 -자강두천 ㄷㄷㄷ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

 -이렇게 꿈도 희망도 없는 대결은 처음 봄 ㄷㄷㄷ

 -그놈이 그놈이라 누구를 응원해야 하나?

 -한정물산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기업입니다. 대한민국 기업이 양놈들 손에 들어가게 놔둘 겁니까? 소액주주들이 힘을 모아 한정물산을 지켜야 합니다! 한 주라도 가진 주주는 위임장을 씁시다. 가까운 증권사에 문의하시면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네, 다음 한정물산 직원.

 -위임장 받으러 다니느라 니들이 고생이 많다~

 -누가 이기든 제발 10만 원만 가자!

 -말리지 마라. 오늘부터 한정물산 몰빵 들어간다.

 -응. 안 말림.

 * * *

 이동호는 DA증권에 출근했다.

 한정그룹 경영권 분쟁은 재계뿐 아니라 금융계에도 큰 이슈였다.

 직원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와 관련된 얘기를 떠들어댔다.

 “KSGI랑 엘리언트가 본격적인데.”

 “한정그룹이 여지를 많이 주긴 했지. 총수일가 문제로 여러 번 시끄러웠잖아.”

 “경영 상태도 별로 안 좋은데 문어발처럼 계열사만 늘리고 말이야.”

 “이제까지 엘리언트가 실패한 적은 거의 없어. 네덜란드 연기금 지분까지 매수한 걸 보면 완전 작정한 건데.”

 “에이, 그래도 한국에서는 힘들지. 괜히 재벌공화국이겠어?”

 “합병의 키는 국민연금이 쥔 거 아닌가?”

 “어차피 한정그룹 편들겠지. 지금 여야 가릴 것 없이 로비 중이라는데.”

 “합병안 발표하기 전에 한정물산이나 좀 사놓을걸.”

 이동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확히 미루가 말한 대로 돌아가고 있잖아.’

 회사 사람들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는 이번 사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10대 그룹 경영권 분쟁 한복판에 뛰어들다니!’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그 상황이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는 중이다.

 떨어지기만 하던 한정물산 주식은 이제 자고 일어나면 오르는 품절주가 됐다.

 주가는 벌써 저점 대비 두 배 가까이 뛰었다.

 다행히 이동호는 그전에 가진 돈에 대출을 받은 것도 모자라 신용까지 써서 1억 원을 풀매수했다.

 혹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차명으로.

 그냥 얘기만 들었다면 흘려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한 종목을 3천억 원 넘게 사들인다는 것은 확실한 정보가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재빨리 숟가락을 얹었고, 결과는 성공이다.

 이동호는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밀린 연차도 다 썼겠다, 얼른 사표 쓰고 저쪽에 합류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역사와 전통이 있는 DA증권보다 후배가 만든 회사가 훨씬 비전이 있어 보였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사직서를 쓰려고 하는데, 우백현 과장이 그를 불렀다.

 “한정물산과 HG로직스 합병 관련해서 찬성 리포트 하나 작성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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