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합병안 (1)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한 해가 끝이 나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달력이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예상했던 대로 한정그룹은 한정물산과 HJ로직스의 합병안을 공시했다.
HJ로직스가 승계법인, 한정물산이 소멸법인으로 HJ로직스가 신주를 발행해 한정물산 주주들에게 교부하는 방식이다.
합병 기준은 최근 3개월 평균주가인 1 대 0.32로 정해졌다.
박운용 실장은 기자회견장에서 합병 이유와 함께 합병 이후의 비전을 밝혔다.
“한정물산과 HJ로직스의 합병은 한정그룹의 경영 효율화와 투자 비용 절감, 글로벌 전략 재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합병을 통해 양사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며 글로벌 경영에 박차를 가할 예정입니다. 주주 여러분들의 지지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한정그룹 합병안 깜짝 발표!]
[한정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
[한정물산, HJ로직스와의 합병으로 글로벌 경영 가속화]
[경영 안정화 및 효율화 기대]
[합병안에 담긴 한정그룹의 비전은?]
[향후 주가 흐름에 긍정적]
[합병을 통해 한정그룹의 세계시장 도약 계기 마련]
언론들은 긍정적인 평가를 쏟아냈고, 증권사들은 앞다퉈서 한정그룹 계열사들의 목표주가를 올려 잡았다.
HJ로직스 주주들 입장에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지만 한정물산 주주들 사정은 달랐다. 실제로 합병안이 발표되자마자 한정물산의 주가는 내리고, HJ로직스의 주가는 올랐다.
주식포럼과 포털사이트 종목 게시판은 소액주주들의 성토장이 되었다.
-1 대 0.32 비율로 합병한다고? 장난하냐?
-이게 말이 됨?
-현재 시총으로 보면 대충 맞지 않음? 딱히 한정물산에 불리한 것 같진 않은데.
-뭔 소리야? 자산을 놓고 보면 한정물산이 HJ로직스보다 10배는 많은데. 지금 한정물산 PBR이 0.25임. 가지고 있는 땅이랑 계열사들 주식만 팔아도 현재 주가보다 최소 서너 배는 더 받을 수 있음.
-새우가 고래를 집어삼키는 꼴이네.
-이 합병은 무조건 막아야 합니다! 이건 HJ로직스에 한정물산을 헌납하는 행위입니다!
-ㅋㅋㅋ 주철진 부회장만 개꿀이네. 한정물산 잘 먹었다. 꺼억~
-어쩐지 내내 주가가 폭락하더니, 일부러 떨어트린 거였어?
-총수일가를 배임으로 고발합시다!
-ㅅㅂ 이래서 한국 주식은 개미들 무덤임
-와! 내가 한정물산 7년 동안 투자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때리네.
-이 와중에 언론들 한정그룹과 한편 먹은 거 보소. 찬성여론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다 쓰네.
-기자가 HJ로직스 갖고 있는 모양이네. 한정물산 주식 갖고 있으면 저딴 말 안 나올 텐데.
-설마 이딴 쓰레기 같은 비율에 국민연금이 찬성하지는 않겠지?
-국민연금은 반대하라!
-소액주주들끼리 뭉쳐야 합니다!
-주총 열리면 단체로 드러누웁시다!
소액주주들의 분위기를 확인하는데, 데이비드 록허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발표 보셨어요?”
[예. 말씀하신 대로 진행되는군요.]
“예.”
내가 한정물산 주식을 산다고 하자 데이비드는 한정그룹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역시나 한정물산과 HJ로직스가 합병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목표는 합병 무산입니까?]
“에이, 그 정도로 되겠어요?”
그는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쉽진 않을 텐데요.]
“뭐, 아니다 싶으면 팔고 빠져 나오면 되죠.”
내가 자신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사실을 눈치챈 것은 나만이 아니다.
다른 세력도 일찌감치 눈치채고 판에 끼어들었다. 한정그룹이 먼저 움직였으니 그들도 슬슬 움직일 것이다.
* * *
한정물산과 HJ로직스는 2월 초에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 합병안을 통과시키고, 3월까지 합병을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했다.
첫째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언트 매니지먼트가 한정물산 주식 6.1퍼센트를 보유했다고 공시한 것이다. 보유 목적은 ‘경영 참여’였다.
둘째는 KSGI가 합병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KSGI는 한국계 헤지펀드로 한정물산 7.7퍼센트를 가진 주요 주주. 김성권 대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KSGI는 한정물산과 HJ로직스의 합병 계획안에 반대합니다. 합병비율이 명백히 한정물산에 불리하고, HJ로직스에 유리하게 책정되었으므로 이는 한정물산 주주들에게 큰 손실을 끼치는 행위입니다. 또한 서로 다른 사업영역을 가진 두 기업을 합병시킬 경우 시너지 효과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이 발생해 미래가치를 훼손하게 될 것입니다.”
합병 반대로 뜻을 모은 엘리언트 매니지먼트와 KSGI는 서로 손을 잡고 연합을 결성했다.
[엘리언트와 KSGI, 한정그룹 합병안에 제동]
[엘리언트 매니지먼트의 정체는 미국의 유명 행동주의 헤지펀드]
[한정그룹 지배구조 개편에 반대하는 투자자들 결집]
[또다시 시작된 투기자본의 공격. 서버린 사태의 악몽 재현하나?]
[엘리언트와 KSGI의 진정한 목적은?]
[주주 권익을 표명하지만, 실제로는 단기 시세차익을 노리는 전형적인 투기자본]
합병이 발표되기 전 한정물산 주가는 40,500원이었고, 발표된 후 주가는 36,700원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엘리언트와 KSGI가 합병에 반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상한가로 직행했다. 주가는 단 사흘 만에 6만 원을 회복했다.
주식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은 내 주식 떨어트리는 놈이다. 그럼 제일 좋은 놈은 누굴까? 당연히 내 주식 올려주는 놈이다.
헤지펀드의 투기라며 비난하는 언론과는 달리, 한정물산 소액주주들은 두 팔 들고 환영했다.
-오오! 엘리언트! 오오! KSGI!
-와씨! 4만 원 깨졌을 때 살걸!
-이제 본전까지 얼마 안 남았다.
-합병 무산되면 10만 원까지 갑니다. 그때까지 다 같이 버팁시다!
-지금 팔면 바보다. 조만간 20만 원 간다.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아라.
-무조건 존버해야 합니다! 존버만이 살길이다.
-증권사나 한정물산에서 연락와도 절대 위임장 써주지 마세요. 그거 써주는 순간 다 끝입니다.
-주주 권리는 주주가 챙겨야 합니다!
-엘리언트와 KSGI와 끝까지 함께 갑시다.
-글로벌 투기꾼들과의 아름다운 동행~
-나 지금 눈물 날 것 같아ㅜㅜ
이때까지만 해도 엘리언트와 KSGI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합병비율을 올리려는 것일까, 지분경쟁을 부추겨 단기 시세차익을 얻으려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설마 향후 경영 참여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해결되었다.
엘리언트 매니지먼트는 네덜란드 연기금(ABP)이 가진 한정물산 지분 5.3퍼센트를 전량 사들였다고 발표했다.
이 거래로 인해 엘리언트는 11.4퍼센트로 국민연금을 제치고 한정물산 최대주주로 등극했다.
이제 양측의 지분을 합치면 무려 19.1퍼센트까지 올라갔다!
또다시 언론 앞에 나선 KSGI 김성권 대표는 한정그룹 총수일가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런 불합리한 합병안이 나온 이유는 경영진이 주주가 아닌 총수일가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정그룹은 무리한 합병을 밀어붙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정물산의 가치를 낮춰 주주들의 재산권을 침해해 왔습니다. 이에 KSGI는 즉시 합병을 철회할 것을 요구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주가치 재고를 위해 일부 계열사의 상장과 함께 총수일가의 지분율이 높은 회사에 일감 몰아주기를 금지시키고, 부실사업 부문과 비핵심 자산 매각, 그리고 한정물산이 보유한 토지 중 개발예정이 없는 곳을 전부 매각해 자사주 매입과 배당을 늘려 주주에게 환원할 것을 요구합니다.”
* * *
한정그룹은 발칵 뒤집혔다.
합병안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일부 반대가 있겠지만, 주총 참여 주식 중 70퍼센트를 안정적으로 확보해 충분히 통과시킬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애초에 합병을 추진한 배경에는 그러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관투자자들 대부분은 한정물산과 HJ로직스를 함께 보유하고 있는 것은 물론, 여러 계열사들 주식들까지 함께 보유하고 있다.
주철진 부회장은 기관투자자들에게 합병 이후 그룹사 전체가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 등 주가 부양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한정물산이 손해를 입더라도 다른 계열사 주식이 올라 손해를 만회할 수 있다면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엘리언트가 등장하고 KSGI가 반기를 들며 상황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5분의 1에 해당하는 지분이 적대세력의 손에 넘어갔다.
한정그룹 양재동 본사에서 임원회의가 소집됐다. 그룹 핵심임원들은 긴장어린 표정으로 회의실에 모여들었다.
새벽까지 술 마시고 집에서 자고 있던 주현진은 뒤늦게 달려왔다. 큰형인 주철진과 누나인 주혜진은 이미 도착해있었다.
주철진은 주현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빨리 좀 다녀. 뭐 하느라 이렇게 늦어?”
“죄송합니다.”
잠시 후,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주민재 회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경영일선에서 반쯤 물러나 있었다. 그가 직접 회의를 주관하는 것은 1년 만이다.
오른편에는 그룹을 물려받게 될 주철진 부회장을 비롯해 주혜진, 주현진 3남매가 나란히 앉았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회의가 시작되자 주철진 부회장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째서 네덜란드 연기금이 엘리언트에 지분을 판 겁니까?”
네덜란드 연기금은 그동안 총수일가의 경영을 지지해왔고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매각이 이뤄지며 우호지분이 순식간에 적대지분으로 돌변했다.
기획조정실의 박운용 실장이 말했다.
“박유경 부사장에게 문의해 보니, 명분상으로는 글로벌 리밸런싱 중이라고 합니다.”
리밸런싱(Rebalancing)이란 가지고 있는 자산의 비중을 재조정하는 것을 뜻한다.
규모가 큰 연기금의 경우 전 세계에 투자하고, 시장 규모에 따라 투자 비중을 정하는 원칙이 있다.
예를 들어 10의 자산을 한중일에 각각 2대5대3의 비율로 투자했다 치자.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나면 투자성과에 따라 이 비율이 달라진다. 2대4대4가 될 수도 있고, 1.5대4.5대4가 될 수도 있다. 때문에 정기적으로 많이 오른 자산은 팔고 저평가된 자산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비중을 조정한다.
“하필 이 시점에서 엑시트를 한다구요? 지금 그걸 믿으라는 겁니까?”
네덜란드 연기금이 한정그룹에 투자한 것은 IMF 직후. 그동안의 주가 상승과 배당을 생각하면 투자금의 30배가 넘는 차익을 남겼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벌어다 준 돈이 얼만데.’
그런데도 한마디 상의도 없이 팔고 떠나다니. 배신감에 저절로 이가 갈렸다.
잔뜩 흥분한 주철진 부회장과는 달리 박운용 실장은 차분하게 말했다.
“이런 거래가 하루 이틀 안에 이뤄졌을 리 없습니다.”
“그럼요?”
“아마 발표가 이뤄지기 한참 전에 계약을 맺었을 겁니다.”
“그럼 엘리언트가 합병 사실을 미리 알았다는 건데,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요?”
주철진 부회장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마치 배신자를 색출해내는 듯한 눈빛에 나이 많은 사장과 임원들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