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한국지사 (2)
물론 챙겨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는 있다.
이번 생에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1회차 때 동호 선배는 내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때 화재 속에서 죽었으면 회귀도 못 하지 않았을까?
자기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후배를 챙겨줄 만큼 의리도 있다. 큰일을 하려면 믿을 만한 사람과 함께 해야 하지 않겠나?
“선배랑 일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요.”
“흠. 하긴 내가 유머 감각이 좀 있긴 하지.”
“······.”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재 개그나 안 하면 다행이다.
“어쨌거나 함께 할 거죠?”
“잠깐만. 신중하게 고민을······.”
“부담되면 다른 사람 구할까요?”
“어허! 그게 무슨 말이야? 후배가 도와달라고 하는데 당연히 선배가 도와줘야지.”
“그러고 보니 DA증권에 뼈를 묻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난 컨티뉴 캐피탈에 뼈를 묻을 거야. 이제부터 이 지시장이라고 불러줘.”
“태세변환이 빠르시네요.”
“기왕이면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한다고 말해줘. 그게 나의 가장 큰 장점이지. 그런데 우리 둘만으로 운영이 되겠어?”
“누구 또 데려올 만한 사람 없어요?”
내 물음에 동호 선배는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내 친구 중에 신라대 경영학과 졸업하고 MBA까지 취득한 인재가 한 명 있어.”
“지금 뭐 하는데요?”
“백수야.”
“그럼 소개해줘요. 만나서 얘기라도 좀 해보죠.”
“어차피 집에서 놀고 있을 테니 지금 한번 불러볼까?”
“예.”
동호 선배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로 집에서 놀고 있었는지 청바지에 패딩을 입은 가벼운 차림으로 바로 왔다.
체구는 평범했고, 곱슬머리에 안경을 꼈다. 며칠 동안 수염을 안 깎은 듯 수염이 제멋대로 자라있었다.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수 아저씨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아! 김범석!”
내가 이름을 말하자 동호 선배가 물었다.
“어! 둘이 아는 사이야?”
김범석도 당황했다.
“저 아시나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매직캐슬 노래 부르신 가수 아닌가요?”
내 말에 그는 더 크게 당황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노래 잘 듣고 있습니다. 그거 말고도 고백이랑 이별 편지도 좋아하고······ 아! ‘그때 그 소녀’를 제일 좋아해요.”
“예? 그때 그 소녀요? 그런 노래는 없는데.”
“······.”
이건 아직 발표 안 했나?
나중에 노래가 유명해졌을 때 동호 선배가 자기 친구라고 자랑하던 얘기를 몇 번 들었는데, 진짜 친구였구나.
사실 그가 예능이나 음악방송 출연은 거의 안 한 편이라서, 얼굴만 봐서는 알아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얼굴은 잘 몰라도 그가 만든 노래를 안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매직캐슬, 고백, 이별 편지, 그때 그 소녀 등을 비롯해 주옥같은 명곡들을 다수 발표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본업이 가수가 아니라는 것.
본업은 다름 아닌 펀드매니저다.
남부증권 팀장으로 일하며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더 뮤지션 펀드’를 출시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펀드매니저로서 능력도 뛰어났다는 것이다.
그는 마치 머니볼 이론처럼 다른 건 배제하고 오직 재무제표로만 기업을 분석해, 같은 섹터 내에서 저평가된 기업들만 골라 펀드에 담았다.
이를 주기적으로 분석해 평균보다 고평가된 기업은 팔고, 다시 저평가된 기업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펀드를 운용했다.
그만큼 종목 분석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아무튼 팬입니다.”
내 말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왠지 쑥스럽네요.”
동호 선배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너 진짜 얘 팬이야?”
“그럼요.”
“얘 별로 안 유명한데.”
“뭐······.”
지금은 안 유명하지만 내년쯤 유명해진다.
그 계기도 좀 웃긴데, 에이튜브에서 누군가 웃긴 장면에서 그의 노래를 가져다 썼고, 그 영상이 하나의 밈이 되며 여기저기 방송됐다.
원래 인터넷 밈이란 금방 시들기 마련.
그런데 그러기에는 노래가 너무 좋았다. 음원차트를 역주행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1위를 찍었다.
그전에 발표한 노래들도 주목을 받으며, 한순간에 가요계의 블루칩으로 등극한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만났는데, 내가 좋아하는 가수다 보니 꼭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력이 뛰어나기도 하고.
난 그에게 말했다.
“저희가 지금 사람을 구하는 중인데, 혹시 취직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사실은 회사에 들어갈지 말지도 고민 중이에요.”
“너 증권사 취직준비 중이잖아. 남부증권으로 갈 거라고 하지 않았어?”
동호 선배의 말에 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긴 한데 왠지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노래 부르는 거 그만하고 이제 취직자리도 좀 알아봐야지. 너 가수로 성공하기는 힘들다니까.”
가수로 성공한다.
정말이지 애널리스트라는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다 틀릴 수 있는지 신기하다.
“아! 그런데 매직캐슬을 게임하다가 만들었다는 게 진짜예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엘다의 전설 하다가 계속 죽다 보니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서요.”
“카논이 세긴 하죠.”
내 말에 그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엘다의 전설 해보셨어요?”
“그럼요. 세상에 그 게임 안 한 사람도 있나요?”
동호 선배가 한마디했다.
“나 안 했는데.”
김범석은 자신의 사정을 얘기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악기를 다루고 노래를 부르는 일이 즐거웠다.
학창 시절 때는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고, 어설프지만 직접 작사 작곡을 해보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 정식으로 음악을 배워보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결사반대했다.
결국 그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신라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이때 학교생활을 하며 친구들과 인디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MBA까지 취득했으니 역시 천재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언제까지 노래만 부를 것도 아니고, 취직은 해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그렇긴 한데······.”
동호 선배가 한참 동안 열심히 설득했지만 김범석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난 그에게 말했다.
“둘 다 하시면 되죠.”
그는 놀란 듯 시선을 돌렸다.
“둘 다요?”
“예.”
대체로 금융권은 업무가 빡세다.
일을 하면서 음악 활동까지 병행하기는 만만치 않다. 아직 자기 길을 정하지 못한 만큼 그 점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저희 회사로 오시면 마음껏 음악 활동을 하실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증권사와 달리 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정말인가요?”
“약속드리겠습니다. 만약 음악 활동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언제든 그만두셔도 됩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는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뭐 하는 회사인가요?”
아! 그걸 설명 안 했구나.
“컨티뉴 캐피탈이라고 하는데······.”
그는 깜짝 놀랐다.
“헉! 컨티뉴 캐피탈이요!”
“예. 아시나요?”
“그럼요! 데이비드 록허트가 대표로 있잖아요. 이번에 기사 보면서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입사하시면 얼마든지 보실 수 있습니다.”
김범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사하겠습니다.”
동호 선배는 날 보며 말했다.
“아니, 이럴 거면 처음부터 회사 이름을 말했으면 되지 않았나?”
“······.”
듣고 보니 그러네.
* * *
데이비드 록허트는 미국계 증권사를 통해 계속 매수주문을 넣었고, 라시드 왕자 측 역시 투자회사를 통해 1억 5천만 달러 만큼의 주식을 사들였다.
사우디는 돈이 넘쳐나는 나라고, 전제군주제인 만큼 국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원하는 곳에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
그는 왕세자가 된 뒤 석유 의존의 경제체제를 바꾸기 위해 수천억 달러를 신산업에 투자한다.
앞으로의 계획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라시드 왕자와 손을 잡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에게는 돈이 있고, 나에게는 그 돈을 불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전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보여주는 게 먼저겠지만.
주식매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난 아셰르의 연락을 받고 파이브시즌스 호텔로 향했다.
라시드 왕자가 말한 사람을 만나보기 위함이다.
난 호텔 2층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매번 프랜차이즈 카페만 가다가 이런 곳에서 커피를 마시니 색다른 기분이다. 뭔가 비즈니스를 하는 느낌이랄까?
난 아셰르가 보내준 메일을 다시 읽어보았다.
프로필을 보니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MBA 과정을 밟았다. 그리고 CFA 시험에도 합격해 현재는 실무를 진행 중이다.
난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 경력이면 한국대는 명함도 못 내밀겠는데.”
CFA란 공인재무분석사.
기업 재무제표를 분석하는 일을 하는 만큼 금융사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이력서만 봐도 기업들이 서로 모셔가려고 줄을 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군가 내 쪽으로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건넸다.
“한미루 씨 맞나요?”
나타난 사람은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미녀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커다란 눈에서는 생기가 넘쳤다. 하나로 묶은 갈색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내려왔고, 긴 다리와 늘씬한 체형을 실크 블라우스와 정장으로 감쌌다.
백인 같은 외모지만 피부색은 짙은 편이다.
그녀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전 사라 에이버리예요.”
“아, 네. 반갑습니다. 한미루입니다.”
난 엉겁결에 그 손을 맞잡았다.
“왜 그러시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연히 중년의 남자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내 또래의 여자일 줄이야. 그러고 보니 내가 받은 프로필에는 나이나 성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설마 일부러 안 적어놓은 건가?
사라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모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미모에 주위에 앉아있는 있는 남자들이 힐끔거렸다.
난 영어로 물었다.
“사우디에서 오신 건가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지금 한국에서 일하고 있어요.”
“한국어는 할 줄 아세요?”
내 질문에 그녀는 한국어로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요. 2년 동안 한국에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회사 다니며 계속 공부 중이에요.”
발음만 들어봐도 제대로 배운 거 같다.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에이오일에서 재무이사로 일하고 있어요.”
“······예?”
에이오일은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나라 4대 정유사 중 하나.
동시에 유일한 외국계다. 대주주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유회사이자 세계 최대의 정유회사이자 세계 최대 시총을 자랑하는 아람코.
현재 CEO는 무함마드로 아람코 출신의 사우디인이다. 최근 유가 폭락에도 불구하고 재계 순위는 무려 18위.
이런 거대 기업의 재무이사라니!
라시드 왕자가 에이오일에 자기 사람을 심어놓은 건가?
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라시드 왕자님과는 어떤 관계인가요?”
“사촌이에요.”
“사촌이요?”
라시드는 왕자다. 왕자의 사촌은 당연히 왕족.
“그럼 공주님?”
내 표정을 본 사라는 생긋 웃었다.
“공주는 아니니 안심해요. 전 무슬림도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