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한국지사 (1)
무사히 그림이 팔리며 3억 달러라는 자금이 마련됐다.
방법은 이미 생각해놨으니 실행하는 일만 남았다. 나 혼자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직원이 필요하다.
어차피 중요한 일은 데이비드 록허트와 본사 직원들이 할 테니, 한국에는 최소한의 인원만 있으면 된다.
난 한국대 앞 실내포차에서 동호 선배를 만났다.
“여기에요!”
내가 손을 들어올리자 동호 선배는 다가와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동안 잘 지냈어?”
“예.”
“미국 다녀왔다며?”
“어떻게 알았어요?”
“성윤아가 말해주던데.”
“그렇군요.”
“너 성윤아랑 친해?”
예전이었다면 아니라고 대답했을 텐데, 요즘은 왠지 친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럭저럭요.”
“혹시 만나서 내 얘기 안 해?”
“선배에 대해 할 얘기가 있나요?”
“없으면 지어내서라도 좀 해봐. 나의 뛰어난 업무능력이나 후배를 위한 마음 같은 거. 내 얘기를 잘 좀 해주란 말이야.”
“그게 의미가 있을까요?”
“회장 손녀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잖아. 오래오래 회사 다녀야지.”
여전히 애사심이 넘치는 모습이다.
얘기를 하는 사이 술과 안주가 나왔다.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그런데 미국은 무슨 일로 다녀온 거야?”
“일도 좀 있고, 머리도 좀 식힐 겸해서요.”
동호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서 밥도 못 먹고 사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잘 살고 있네. 여행 좋지. 내 선물은 안 사왔어?”
“사왔어요.”
“오! 진짜?”
난 화구통을 건네주었다. 안에 든 그림을 꺼내본 동호 선배는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웬 그림이야?”
“여행하다가 노점에서 샀어요.”
“아니, 차라리 열쇠고리나 마그넷을 사오지.”
“마음에 안 들어요?”
내 물음에 동호 선배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선물은 마음이 중요하니까. 아무튼 감사.”
전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 않은데.
이게 랭크시 그림이고 50만 달러가 넘는다는 사실을 알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한때 내 목숨을 구해줬던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별로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거 나중에 비싼 가격에 팔릴 수도 있으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해요. 누구 주지 말고.”
“알았어. 걸어놓을 데가 있으려나.”
왠지 침대 밑에 대충 쑤셔 넣을 것 같지만······ 버리지만 않으면 되겠지.
“요즘 회사 분위기는 어때요?”
“프리머스 사태 이후 좀 휘청거리다가 이제 정상화되는 분위기야. 아! 이번에 유성증권 컨소시엄에 참가하는 거 알지?”
“예. 독일 LNG 인프라 인수한다면서요?”
“그거 펀드 순식간에 마감됐어.”
“다행이네요.”
술이 들어가자 동호 선배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럼 뭐 하냐? 월급 쏟아부어서 산 내 주식은 폭락하고 있는데. 하아~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냐?”
“걱정 마요. 앞으로 돈 많이 벌게 해줄 테니까요.”
“어떻게?”
난 슬쩍 본론을 꺼냈다.
“선배 저랑 일 한번 해보지 않을래요?”
“무슨 일?”
“큰돈 벌 수 있는 일이요.”
동호 선배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너 설마 요즘 다단계 해? 나까지 끌어들일 생각?”
“······.”
회사를 나간 후배가 갑자기 나타나 큰돈을 벌 수 있을 하자고 제안하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다단계는 뭐 아무나 하나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하던 일 해야죠.”
“그게 뭔데?”
“우리가 배운 게 투자밖에 더 있어요?”
“투자를 하자고?”
“예. 제가 얼마 전 아는 사람이랑 회사를 하나 차렸거든요.”
“무슨 회사?”
“투자법인이죠.”
“투자자문사? 자산운용사?”
“비슷해요.”
대한민국에 널리고 널린 게 투자자문사와 자산운용사다.
이들 중 직접 상품을 만들어 투자를 받고 운용하는 곳도 있지만, 상당수가 한 달에 인당10~20만 원 정도 받고 타톡방에서 종목의 매수와 매도 타이밍을 알려주는 것으로 연명하는 것이 현실이다.
뭐, 잘되는 VIP방은 수백만 원씩 받는다고 하니 제법 돈이 되는 모양이다.
“유료정보방 운영하게?”
“에이, 설마 제가 선배 데려다가 타톡방 관리나 시키겠어요?”
“그럼?”
“제대로 투자를 해보자는 거죠.”
동호 선배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돈은 어디서 나서?”
“일단 회사 자본으로 투자하다가, 필요하면 펀드레이징도 하고 LP도 찾고 그러는 거죠.”
이는 사모펀드들이 투자하는 방식이다.
한 번에 수조 원을 움직이는 사모펀드라고 해도 인력은 그리 많지 않다. 적으면 열 명에서 많아야 스무 명 정도가 팀을 짜서 움직인다.
그렇게 투자해 엑시트에 성공하면 1인당 수십억의 인센티브를 챙기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유명 투자자가 차린 거대 사모펀드들 얘기.
“생각해봐요. 레드스톤이나 블루펄, 브릿지리버 같은 세계적인 PEF도 처음에는 몇 명이서 시작했어요. 국내 최대 PEF인 MKK파트너스도 강명국 회장이 친구랑 차린 거잖아요.”
동호 선배는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니. 그 사람은 그전에도 칼나인그룹 헤드였잖아. 시작부터 GIC가 앵커LP로 들어왔어.”
GIC란 싱가포르 투자청.
전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국부펀드다. GIC 투자를 받았다는 시점에서 이미 출발선부터가 다르다.
“아무튼 우리라고 못할 게 뭐예요?”
“너 왜 이렇게 스케일이 커졌어?”
“꿈은 커야죠.”
동호 선배는 나를 쳐다보며 슬쩍 물었다.
“너 설마 정말로 뒤에 누가 있는 거야?”
“무슨 말이에요?”
“아니, 뒷돈 받고 회사 비리 터트리고 나간 거 아니냐는 얘기가 있어서.”
“제가 누구한테 뒷돈을 받아요?”
“양자은 상무님이라든지. 아, 아니, 그게 아니면 말이 좀 안 되잖아.”
사실 회귀한 것부터 말이 안 되긴 하지.
난 웃으며 말했다.
“뭐,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죠.”
동호 선배는 한숨을 내쉬듯 물었다.
“현재 회사 투자금은 얼마나 되는데?”
“들으면 놀라실 텐데요.”
“안 놀랄 테니 말해봐. 설마 1억도 안 되는 건 아니지?”
“이미 투자한 돈은 제외하고 현금으로만 대충 3억이요.”
동호 선배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니가 3억이 어디서 났어?”
“다 방법이 있죠.”
내 말에 동호 선배는 속이 타는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3억으로 1년에 20퍼센트 수익 내봐야 6천 아니야? 그거면 너랑 나 인건비도 안 나와. 결국 타톡 유료방이나 운영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달러요.”
“달러?”
“3억 원이 아니라, 3억 달러.”
“응? 3억 달러면······.”
“오늘 환율로 3300억이 넘겠네요.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겠어요?”
동호 선배는 마시던 맥주를 다시 잔으로 주르륵 내뱉었다.
* * *
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난 동호 선배를 데리고 바로 강남에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불을 켜자 실내의 모습을 드러냈다. 집기와 컴퓨터도 다 들어와서 제법 사무실 같은 모습이다.
“어때요?”
“꽤 괜찮네. 그런데 여기 들어오면 내 직급은 뭐가 되는 거야?”
“한국지사장 어때요?”
“지사장?”
동호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가 지사면 본사는 어딘데?”
“본사는 미국에 있어요. 이번에 가서 설립했어요.”
“어차피 페이퍼 컴퍼니 아니야?”
“무슨 말이에요? 제대로 된 회사에요. 사무실도 있고 대표도 있고 직원도 있어요.”
“대표가 누군데?”
“데이비드 록허트라고 아세요?”
동호 선배는 잠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사람 컨티뉴 캐피탈 대표잖아.”
“맞아요.”
“뭐가 맞아?”
“컨티뉴 캐피탈 대표 맞다구요. 여기가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니까요.”
“응?”
난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제가 미국에 가서 데이비드 록허트와 손잡고 컨티뉴 캐피탈을 만들었어요.”
동호 선배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자, 잠깐. 그러니까 니가 말한 컨티뉴 캐피탈이 토머스 모터스 폭락시키고, 스노우 크래시를 인수한 그 사모펀드를 말하는 거야?”
“예. 바로 그거예요.”
동호 선배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아니, 그게 뭔 소리야?”
난 이제까지 있었던 일을 대충 정리해서 말해주었다. 이 얘기도 몇 번 하다 보니 이제는 익숙하다.
한동안 멍하니 듣던 동호 선배는 한참 후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쉬워 보이는데······ 그게 진짜 됐다고?”
“사실 쉽진 않았어요.”
세상일이라는 게 결과만 놓고 보면 쉬워 보이기 마련. 똑같이 해보라고 하면 못할 뿐이지.
“좋아. 번 돈 다 투자해서 스노우 크래시까지 인수했다 치고. 그런데 3억 달러는 대체 어디서 난 거야?”
“절반은 투자받았어요.”
“투자자가 누군데?”
“중동 사람이요.”
“부천에 살아?”
“여기서 부천이 왜 나와요?”
동호 선배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부천 중동 말하는 거 아니야?”
“음······.”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부천이 아니라 사우디요.”
내 말에 동호 선배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여기서 사우디가 왜 나와?”
“사우디 왕자님이 투자했으니까요.”
“왕자님?”
“예. 진짜 왕자님이요.”
심지어는 그냥 왕자도 아니고 차기 왕세자다.
동호 선배는 당황했다.
“농담이야?”
“그사이 재밌는 일이 좀 있었어요.”
“아니, 어떤 재밌는 일이 있었기에 사우디 왕자한테 투자를 받았다는 거야?”
“그건 좀 이따 설명할게요.”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다.
나 같아도 믿지 않았을 것 같아서 할 말이 없다.
“그래서 그 투자금으로 뭘 할 건데?”
“투자해서 몇 배로 불려야죠?”
“어떻게?”
“서버린 사태 알죠?”
“서버린 자산운용이 LK그룹 경영권 공격한 거 말하는 거야?”
“칼 아이잭은요?”
“아이잭 엔터프라이즈 회장? 기업사냥꾼으로 유명하잖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랑 비슷한 일을 해보려구요.”
“······응?”
“자세한 건 차차 설명할게요.”
동호 선배는 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회사 나가서 밥이나 먹고 살까 걱정했는데, 몇 달 만에 컨티뉴 캐피탈을 만들고 그 많은 돈을 벌었다니.”
“운이 좋았어요.”
“대체 얼마나 운이 좋으면 그렇게 돼?”
“저도 좀 신기해요.”
“그런데 이 정도 벌었으면 굳이 투자를 할 필요가 있어? 그냥 놀고먹어도 되는 거 아니야?”
“언제부터 그렇게 꿈이 작아졌어요?”
“넌 언제부터 꿈이 그렇게 커졌니?”
난 동호 선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같이 큰돈 벌어 봐요.”
“연봉은 어떻게 돼? DA증권만큼 맞춰줄 수 있어?”
“첫 해에 1억 드릴게요.”
내 말에 선배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 연봉 1억.”
“그리고 매년 두 배씩 올려드릴게요.”
“두 배나?”
잠시 기뻐하던 동호 선배는 이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10년 뒤면 얼마가 되는지 계산은 해봤어?”
“그럼요. 512억 원이죠.”
“그게 말이 돼?”
믿거나 말거나.
동호 선배는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
“뭔가 좀 이상한데.”
“뭐가요?”
“나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야? 이유가 뭐야?”
“뭐라고 생각해요?”
“평소 내 투자 실력을 눈여겨봐서? 아니면, 나도 모르는 나의 재능을 발견했다든지?”
“······.”
본인이 말하고도 아닌 것 같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