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한정그룹 막내아들 (4)
난 주현진을 놔두고 룸을 나왔다.
그러자 박명훈이 따라 나오며 말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사과하고 끝내는 게 서로 편했을 텐데요.”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사과를 해야 하나요?”
“사과는 잘못한 사람이 잘한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박명훈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힘없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에게 하는 거죠.”
난 피식 웃었다.
“재밌네요.”
“그쪽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하루빨리 사과하는 게 좋을 겁니다. 가족들도 생각해야죠.”
가족이 인질이라는 건가?
아주 편한 방식이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차비 하세요. 괜히 언론에 알린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일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기사 써주는 기자도 없겠지만요.”
이런 식의 일 처리가 익숙한 것 같은 모습이다.
다시 말해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거다.
“저처럼 사과 안 한 사람도 있었나요?”
“드물지만 가끔 있었죠.”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더 비참한 꼴 당하고 결국 사과했습니다. 괜한 자존심 때문에 버틴 걸 후회하면서요.”
꽁초와 가래침이 들어간 술을 강제로 먹고,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 옷 벗고 무릎 꿇고 비는 것보다 더 비참한 꼴이란 게 과연 뭘까?
“덕분에 일이 귀찮게 됐네요. 뭐해요? 그만 자존심 부리고 어서 받으세요.”
난 박명훈을 보며 말했다.
“너도 똑같은 새끼야, 임마. 어디서 남 생각해주는 척하고 있어?”
“뭐······?”
“너 같은 새끼가 쫓아다니며 수습해주니까 애새끼가 저 지랄하고 다니지.”
“······.”
난 놀라 아무 말도 못 하는 박명훈을 놔두고 밖으로 나왔다.
차를 타고 집에 가며 허민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까는 뭔 상황이야?]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
[우리 사이에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전화하나?]
“······.”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인데?
[그냥 크리스마스 복 많이 받으라고 전화한 거야.]
“그건 새해 아니에요?”
[크리스마스에도 복 받으면 좋잖아. 선물은 받았어? 뭐 갖고 싶은 건 없어?]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사주게요?”
[뭐, 지난번에 신세 진 것도 있고, 크리스마스니까 형이 동생한테 선물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뭐 해줄까?]
난 그에게 물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는 사람 강제로 무릎 꿇리거나 모욕준 적 있어요?”
내 말에 그는 펄쩍 뛰었다.
[아니, 누가 그래? 내가 개념과 싸가지가 좀 없긴 해도 쓰레기는 아니야.]
“······.”
그래도 본인이 개념과 싸가지가 없다는 건 알고 있구나.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형 진짜 그런 사람 아니야. 너 오해하지 마.]
하긴, 내가 본 뉴스에서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선물은 됐으니 다음에 술이나 한잔 사줘요.”
내 말에 허민웅은 반색했다.
[진짜지? 너 약속한 거다.]
왜 이렇게 좋아해?
자꾸 친한 척하는 게 왠지 밉지만은 않은 느낌인데.
* * *
라시드 왕자는 한미루에게 받은 그림을 바로 뉴욕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미술계 전문가들과 관련 학자들을 전부 모아 그림을 검증했다. 그리고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
아셰르는 라시드 왕자에게 보고했다.
“12명 중 아홉 명이 진품이라는 의견을 냈습니다. 나머지 세 명도 중립 의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두 명은 오래전부터 이 그림을 찾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
“예. 그런데 자신들이 구매하기 직전 한 한국인이 갤러리에서 사갔다고 하네요.”
그게 누군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놀랍다.
“그는 저 그림이 진품이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혼잣말 같은 물음에 아셰르가 대답했다.
“저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예술 쪽을 전공한 것도 아닌데 랭크시 그림과 다빈치 그림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라시드 왕자는 곰곰이 생각했다.
‘일반인을 초월하는 직감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건가?’
재밌는 건 그가 자신이 왕이 돼야 한다고 말하며 각종 조언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라시드 왕자는 쿠데타를 준비하면서도 그동안 완벽한 확신을 갖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림이 진품임을 확인한 순간 마음을 확실하게 정할 수 있었다.
* * *
난 외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입니다.]
목소리를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라시드 왕자였다. 비서가 아니라 그가 직접 전화를 건 것이다.
“예. 반갑습니다. 왕자님.”
그가 직접 전화를 했다는 건 그림의 감정이 끝났다는 건가?
[1차로 그림을 감정해보았습니다.]
왠지 두근거린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으려나?
[물감을 벗겨내니 캔버스에 다양한 흔적들과 함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서명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역시!
하지만 이것만으로 진품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림 안에 서명을 숨기는 것은 화가들이 흔히 쓰는 방법이다. 그래서 위작들 역시 이를 위조해 만들기도 하고.
[좀 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다빈치 그림이 맞는 것 같군요.]
“정말인가요?”
[예.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보통 그림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전문가들에게 진품이라는 확답을 받아냈다는 거겠지?
라시드 왕자는 시원하게 말했다.
[약속한 대로 그림을 1억 5천만 달러에 사겠습니다. 그리고 컨티뉴 캐피탈에 1억 5천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하죠.]
한 방에 3억 달러가 들어왔다!
난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4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작품이니, 그의 입장에서는 투자비를 포함하더라도 1억 달러 이상 이익을 본 셈이다.
“죄송하지만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말씀해 보시죠.]
“투자금 1억 5천 달러를 현금이 아니라 주식으로 받을 수 있을까요?”
[어떤 주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투자하려는 주식이 있는데, 대신 구매해서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하자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흔쾌히 동의했다.
[어려울 것 없는 일이군요. 단 저도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요?”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으니, 저희 쪽 대리인을 한 명 파견하겠습니다.]
1억 5천만 달러는 그림값이라 해도 1억 5천만 달러는 투자다. 이에 대한 감사를 붙이겠다는 건가?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그는 말을 덧붙였다.
[투자에 간섭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만나 보고 마음에 안 든다면 거절해도 상관없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거절하기가 힘들다.
“알겠습니다.”
[그날 당신의 얘기를 듣고 난 후 결심이 확고하게 섰습니다.]
“어떤 결심이요?”
그는 선언하듯 말했다
[전 사우디의 왕이 될 겁니다. 기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부패하고 무능한 이들을 몰아내고, 시스템을 개혁해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습니다.]
“······예?”
난 당황했다.
아니, 이게 뭔 소리야?
당신 원래 쿠데타 할 생각이었잖아. 왜 거기에 내 핑계를 대는데?
누가 들으면 내가 등 떠민 줄.
* * *
한미루가 한국으로 돌아간 뒤.
데이비드 록허트는 컨티뉴 캐피탈 본사를 맡아서 운영했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합류하며 이제는 직원도 열 명에 육박했다.
이제 시작 단계지만 토머스 모터스 폭락과 스노우 크래시 인수 덕분에 컨티뉴 캐피탈은 월가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여기저기서 투자 문의가 이어졌다.
데이비드는 한미루를 떠올렸다.
비록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동안 많은 걸 배웠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걸 가능하게 만들다니······.’
특히 스노우 크래시 인수에서 보여줬던 행동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문제는 아직 인수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 인수에 필요한 자금 160억 달러를 마련해야 하는데, 이중 6개월 안에 80억 달러를 마련해야 한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한미루가 놀라운 투자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 데이비드도 인정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투자자라고 해도 투자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눈덩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눈뭉치가 있어야 하고, 큰돈을 벌기 위해서는 작은 돈이 있어야 한다.
데이비드는 일단 투자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한미루는 기다려보라고 했다.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지?’
걱정은 되지만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왠지 한미루라면 어떻게든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회사 계좌로 1억 5천만 달러가 입금됐다!
데이비드는 깜짝 놀랐다.
‘팻 핑거인가?’
누군가 실수로 잘못 송금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엄청난 금액이 입금됐을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미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1억 5천만 달러 들어간 거 확인했죠?]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미루는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미국을 떠나기 직전 뜬소문을 듣고 ‘우연히’ 그림을 하나 샀는데 ‘놀랍게도’ 그게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림이었다.
‘마침’ 미술품 좋아하기로 소문난 사우디 왕자가 한국에 방문했고, ‘어쩌다 보니’ 그를 만났고, 그는 ‘기꺼이’ 그림을 구매했다.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시카고에 들렀던 겁니까?”
[예. 저도 혹시나 했는데 그게 레오나르도 다빈치 진품이 맞았나 봐요.]
“······.”
뜬소문 듣고 산 그림이 다빈치 그림이라는 게 말이 되나? 만우절 농담도 이것보다는 더 말이 되지 않을까?
“그림을 라시드 왕자에게 팔았다구요?”
[예. 누군지 아시나요?]
“아부 바르크 국왕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왕실 경제개발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어! 아시네요.]
“그가 왕실 재산의 해외투자를 담당하니까요. 오일머니는 언제나 월가의 관심사죠.”
[그렇겠네요.]
사우디 국왕은 90세에 가까운 고령이고, 왕세자는 60대다. 때문에 실무를 대부분 왕자가 처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왕이나 왕세자만큼 권위가 있지는 않지만 쉽게 만날 수는 없는 사람이다.
한미루는 계속해서 말했다.
[1억 5천만 달러는 그림 판매대금으로 받았고, 1억 5천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받기로 했어요.]
“투자를요?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수익의 30퍼센트요.]
“30퍼센트 수수료면 괜찮군요.”
[아니요. 수익의 30퍼센트를 나눠주고 저희가 70퍼센트를 먹습니다.]
“······.”
아무리 잘나가는 사모펀드라도 이 정도 수수료를 받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봐도 좋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협상을 해오다니!
“그 1억 5천만 달러는 언제 넣는다고 합니까?”
[그건 나중에 추후에 주식으로 받기로 했어요.]
“주식이요?”
[예. 우리도 사야 해요. 지금부터 바로 매입하세요.]
주식의 이름을 들은 데이비드는 이해가 안 되어서 다시 물었다.
“왜 그 주식을 사는 겁니까?”
[조사해보면 대충 아실 거예요. 자세한 건 나중에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놓을게요.]
얘기가 끝나자 한미루는 전화를 끊었다.
“하······.”
데이비드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투자금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1억 5천만 달러가 생겼다. 여기에 추가로 1억 5천만 달러 투자까지 받기로 했다.
단지 그림을 산 것뿐 아니라 투자까지 한 걸 보면 라시드 왕자가 한미루를 좋게 본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어떻게?’
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수를 쓴 걸까?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데이비드는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정말로 어떻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