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한정그룹 막내아들 (3) (114/529)

 115화. 한정그룹 막내아들 (3)

 난 청담동에 있는 라운지바 앞에 도착했다.

 그러자 입구에서 젊은 남자가 날 맞아주었다.

 “한미루 씨 맞나요?”

 “예. 누구시죠?”

 그는 나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HJ푸드 과장 박명훈’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살짝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화가 많이 나있으니 그냥 무조건 맞춰주세요. 그럼 적당히 넘어갈 겁니다.”

 대충 알 것 같다.

 재벌가 자제를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하는 역할인 모양이다. 지금 말하는 것만 봐도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하고.

 난 그의 안내에 따라 안쪽에 있는 룸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룸 안에는 주현진을 포함해 세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주현진이 정면의 상석에 앉아있고 그 양옆에 다른 놈들이 앉아있었다.

 주현진은 그새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있고 자세도 풀어졌다.

 그는 나를 보더니 대충 손짓했다.

 “아이씨! 빨리도 오네. 일단 거기 앉아요.”

 난 편하게 자리에 앉았다.

 주현진은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넌 뭐 하냐? 술 한 잔 따라드려.”

 “어, 알았어.”

 지시를 받은 남자는 내 앞에 잔을 놓고 술을 따라주었다.

 “일단 한잔하죠.”

 그는 잔에 담긴 술을 마시며 말했다.

 “한미루라고 했지?”

 “예.”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쪽이 프리머스 부실 폭로했다면서?”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안 모양이다. 민아름은 이름 듣고 바로 눈치챈 것 같던데.

 그나저나 여자들 없다고 바로 말을 깐다.

 “그런데요?”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설마 양자은 상무님께 부탁이라도 받았나?”

 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펀드에 대해 분석하고 리포트를 쓰는 게 제 일이었으니까요. 뭐가 잘못됐나요?”

 그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아주 잘나셨군.”

 “칭찬 감사합니다.”

 “너 혹시 내가 누군지 몰라?”

 “HJ푸드 주현진 이사님이죠.”

 “그럼 내가 이 나이에 어떻게 이사가 됐을 것 같아?”

 “그야 당연히 다른 직원들은 감히 상상도 못 할 만큼 천재적인 업무능력을 회사가 인정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빈정거리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인상을 썼다.

 참고로 빈정거린 거 맞다.

 주현진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한정그룹 회장님이야.”

 난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헉! 한정그룹 회장! 그게 정말입니까?”

 내 얼굴을 본 그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옆에 있던 친구들 역시 웃음을 터트리며 한마디씩 했다.

 “뭐야? 설마 모르고 있던 거야?”

 “뉴스도 안 보나 본데.”

 “완전 바보 아니야?”

 정말이지 끼리끼리 논다.

 주현진은 납득했다는 듯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하긴 몰랐으니까 그런 실수를 한 거겠지. 알았으면 그럴 리가 있나?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잘 모르겠어서 물어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좋은 말로 할 때 사과하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면 되나요?”

 “말로만 하는 사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그럼요?”

 “정말로 죄송한 마음이 있다면 그만한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어?”

 주현진은 술병이 담겨 있는 투명한 버킷을 들고 뒤집어 얼음을 전부 바닥에 버렸다. 그러고는 위스키를 따서 그 안에 콸콸 부었다.

 그다음 재떨이를 들어 그 안에 쏟은 다음 걸쭉한 침까지 뱉었다.

 “카악! 퉤!”

 대체 비싼 술에 왜 이 짓거리를 하나 가만히 지켜보는데, 버킷을 내 앞으로 밀었다.

 “그거 다 마신 다음 옷 벗고 테이블 위에 무릎 꿇고 엎드려서 빌어. 그럼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해줄 테니.”

 옆에 앉아있던 놈들이 웃으며 떠들었다.

 “이야! 죄지은 놈한테 이 비싼 술을 주다니. 이건 벌이 아니라 상 아니야?”

 “니 월급으로는 사 먹지도 못할 술이니 고마운 줄 알아.”

 “비싼 거니까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마셔. 흘릴 때마다 한 대씩 때린다.”

 자기들끼리 낄낄 웃으며 아주 신났다. 병신들끼리 아주 잘도 노는구나.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짓거리를 했을까?

 세상에는 법과 도덕이라는 게 있고 그걸 지키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다.

 그런데 지키지 않아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면 저 모양 저 꼴로 살아도 되는 걸까?

 실제로 그는 아무리 큰 사고를 쳐도 불이익을 받지 않고 잘만 살았다.

 난 그 버킷을 잡고 반대쪽으로 밀었다. 테이블을 미끄러지듯 이동한 버킷은 주현진의 앞에서 멈췄다.

 그는 인상을 쓰며 물었다.

 “뭐 하는 짓이지?”

 “그쪽이 먼저 마셔 봐

 순간, 룸 안이 조용해졌다.

 웃고 떠들던 놈들은 어느새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다들 조심스럽게 주현진의 표정을 살폈다.

 이놈들은 재벌이 아니다. 그저 한정그룹 계열사들과 거래하는 중소기업 사장의 아들이나 손자일 뿐.

 겉으로는 친구인 것처럼 행동해도 실제로는 똘마니나 다름없는 놈들이다. 그러니 다들 주현진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며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주현진은 이런 놈들 데리고 골목대장 노릇하고 있는 거고.

 대한민국에서 재벌이라는 이름은 엄청난 무게감을 갖는다.

 하지만 난 이미 유성그룹 회장이랑 사우디 차기 왕세자도 만나봤는지라 별 감흥이 없다. 그 두 사람에 비하면 고작(?) 재계 10위인 한정그룹 회장 아들은 우스울 뿐이다.

 난 등을 기댄 채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니들은 여친도 없나? 크리스마스에 아들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엄마가 알면 뭐라고 생각하겠냐?”

 “뭐, 뭐?”

 “이 자식이······.”

 더 이상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

 “더 할 말 없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친구들끼리 계속 재밌게 노시죠.”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주현진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버럭 소리쳤다.

 콰앙!

 “앉아!”

 순간, 몸이 움찔할 정도의 박력이었다.

 표정과 목소리에서는 누구든 당연히 자신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믿음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하하!”

 “웃어!? 너 내가 우스워? 당장 앉으라고!”

 난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싫은데.”

 내 말에 주현진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너 뭐라고 했어, 새끼야!?”

 이게 유전적 문제인지 가풍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정그룹 총수일가는 성질이 더럽기로 유명하다.

 그의 어머니는 임신한 가정부에게 손찌검을 하며 소리를 질러댔고, 그의 누나는 하청업체 사장에게 물건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지르다가 국민들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 역시 마약에 취해 미친놈처럼 난동을 피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뉴스에서 자기 아버지뻘 되는 운전기사한테 욕하고 발길질한 영상 보면 이게 사람 새끼인가 싶다.

 뭐, 아직은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마약에 폭행이면 구속되어 실형을 살아야겠지만, 그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는 정신과의사 소견 덕분에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재벌은 반성하면 집행유예로 풀어주는 게 국룰이지.

 어쨌거나 잘 못 들은 것 같아서 친절하게 다시 말해줬다.

 “싫다고, 새끼야.”

 순간, 그의 눈이 살짝 돌아갔다.

 “씨발! 이 새끼가 진짜 죽고 싶나?”

 쨍그랑!

 그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내 쪽으로 집어던졌다. 내가 몸을 피하자 잔은 벽에 부딪혀서 깨졌다.

 피하지 않았으면 머리에 맞았을 것이다.

 벌떡 일어나 나한테 달려들려는 그를 박명훈이 재빨리 붙잡았다.

 “진정해. 저번 사건도 아직 합의 중인데 또 문제 일으키면 이번에 부회장님께서도 가만히 안 계실 거야.”

 “씨발! 저 새끼가 나한테 말한 거 못 들었어? 이거 놔! 놓으라고!”

 가만히 보고 있자니 재밌다.

 다 큰 성인이 저게 뭐 하는 짓거리야?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전혀 뜻밖의 사람이다.

 이 사람은 왜 갑자기 전화를 한 거지?

 아무튼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주위에서 난리를 치든 말든 난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헤이, 브라더. 유재호 회장님께 들었는데 한국 들어왔다며?]

 “예, 윤아 씨.”

 내 말에 주현진은 바로 소리 지르는 걸 멈췄다.

 [윤아 씨가 누구야? 나야 나. 민웅이 형.]

 이 사람은 왜 자꾸 자기를 형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집에 잘 들어가고 있어요?”

 [뭔 소리야? 형이라니까. 어! 설마 벌써 형을 잊은 건 아니지?]

 “주변이 왜 이렇게 시끄럽냐구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떤 미친놈이 술 취해서 난동을 피우는 모양이에요.”

 [너 술 마시는 중이야? 혹시 취했어?]

 “누구냐구요? 글쎄요. 누굴까요? 저도 좀 궁금하네요. 제가 잠시 후에 다시 연락할게요.”

 [야야, 끊지 마······.]

 난 전화를 끊은 다음 주현진을 보았다. 여전히 흥분한 모습이었지만 아까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달려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정말이지 너무 신기한 일이다.

 뭔 놈의 분노조절장애가 상황 봐가면서 발현되나?

 “우리 무슨 얘기하고 있었죠?”

 “너 이 새끼······.”

 난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같이 술 마시고 있다고 윤아 씨에게 영상통화 한번 할까요?”

 그는 당황했다.

 “지, 지금 치사하게 여자한테 이르겠다는 거야?”

 그래도 성윤아에게 이러고 있는 게 알려지는 건 부끄러운 모양이다. 부끄러운 짓은 애초에 안 하면 되지 않나?

 “치사하다니요. 술자리에 사람 불러다가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강요하는 것보다는 덜 치사한 것 같은데.”

 주현진은 이를 갈며 말했다.

 “너 오늘 일 후회하게 될 거야.”

 “무슨 후회?”

 “아버지께서 구멍가게 같은 사업 하나 하신다며? 거기에 문제 생기면 어떨 것 같아?”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난 세상 물정 모르는 재벌집 망나니에게 세간의 당연한 상식을 말해주었다.

 “가족은 건드리는 거 아닌데.”

 하지만 그는 내 충고를 귀담아 듣기는커녕 약점을 잡았다는 듯 이죽거리며 말했다.

 “건드리면 어쩔 건데?”

 그럼 나도 어쩔 수 없다.

 패드립에는 패드립으로 맞서는 수밖에.

 “아버지께서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그룹 하나 운영하신다면서? 거기에 문제 생기면 어떨 것 같아?”

 “······뭐?”

 다들 내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자리에 있던 일부는 실소를 흘리거나 대놓고 비웃음을 지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내가 대한민국 10대 그룹 중 하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가끔은 상상도 못 하던 일이 현실로 일어나는 법이다. 정확히는 내가 그 일을 일어나게 만드는 거지만.

 난 자리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똑똑히 기억해 둬. 나중에 한정그룹에 문제 생기면 방금 네가 한 그 한마디 때문이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 하하하!”

 주현진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이제 보니 이거 완전 미친놈이었네. 어쩐지 좀 이상하다 했어.”

 이 자리에서 그를 엿 먹이는 건 간단하다. 당장 유재호 회장에게 전화 한 통만 해도 그를 무릎 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의 악연을 생각할 때 그렇게 쉽게 끝낼 생각은 없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넌 내가 반드시 박살내줄게.”

 잘됐네. 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난 나가기 전 그를 향해 말했다.

 “우리는 또 보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다치지 말고 건강하게 있어요. 주현진 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