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한정그룹 막내아들 (2)
한정그룹 주민재 회장의 막내아들 주현진.
어차피 그룹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형이 물려받을 예정이었기에 그는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았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지냈고 집에서도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았다.
성질을 참지 못해 자주 사고를 쳤지만 집안에서 전부 해결해주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성윤아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히 놀다가 때가 되면 만나던 여자들 정리하고 그녀와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달 전 상황이 갑자기 바뀌었다.
프리머스 사태로 인해 양정욱 전무가 밀려나며 그녀의 어머니가 DA금융그룹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당연히 하나뿐인 외동딸에게도 관심이 집중됐다.
이렇게 되자 주현진의 마음이 급해졌다.
‘절대 놓칠 수 없어.’
그는 어린 시절 친분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연락하며 관심을 표했지만, 성윤아는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그러는 사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남녀가 친밀한 사이가 되기에 딱 좋은 시기다.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운 좋게 백화점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남자와 함께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입사 동기라는 말에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쥐뿔도 없는 저런 놈과 비교하면 내가 더 돋보이겠지.’
그런데 상황이 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가 알고 지내는 사람 중에는 재벌이 아닌 일반인들도 많았다.
이들이 자신을 대해는 태도는 둘 중 하나다.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하는 쪽과 애써 무시하려고 하는 쪽.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마치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기는커녕 아예 대놓고 자신을 망신 줬다. 농담이라며 넘어가긴 했지만, 그때부터 성윤아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안 좋아졌다.
여자들만 없었다면 바로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이런 자리에서 화내봐야 자신만 꼴이 우스워진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억지로 화를 참느라 손발이 덜덜 떨렸다.
주현진이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한미루는 성윤아와 민아름과 즐겁게 얘기를 나눴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웃음이 끊이지가 않았다.
민아름은 깔깔거리며 말했다.
“미루 씨 되게 재밌는 사람이네요.”
“어!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만난 사람도 그렇게 말하던데요.”
“누가요?”
“신분으로 치면 왕자님쯤 되는 사람이에요.”
“어머! 왕자님이요?”
“예. 제가 함부로 만날 수 없는 사람이죠. 다행히 신분이 안 맞아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더라구요. 원래 약간 어쭙잖은 사람들이 그런 거 따지지, 진짜 신분 높은 사람은 별로 신경 안 쓰나 봐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경을 긁었다.
누가 봐도 자기 들으라고 하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이런 개새끼가!’
* * *
식사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주현진이 가끔씩 날 죽일 듯이 눈빛으로 노려보는 것만 빼면 말이다. 포크를 쥔 손이 살짝 떨리고 있는 건 수전증이 있기 때문인가?
주현진은 분을 삭이려는 듯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러다 보니 두 번째 병은 금방 비었다.
그가 한 병 더 시키려고 하자 민아름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이만 일어나는 게 좋겠네요.”
주현진은 멈칫했다.
“벌써?”
“예. 집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와서요.”
그는 성윤아에게 물었다.
“윤아, 너는? 시간 괜찮으면······.”
“저도 이만 들어가봐야죠.”
“그럼 오빠가 데려다줄까?”
“아니에요. 이따 기사님 오시기로 했어요.”
“그, 그래?”
우리는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현진이 계산을 하는 사이 민아름은 나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번호 좀 알려줘요.”
“예.”
서로 연락할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일단 번호를 교환했다.
“나중에 백화점이나 면세점 올 일 있으면 꼭 연락해요. 최선을 다해 모실게요.”
난 슬쩍 물어보았다.
“좀 싸게 살 수 있나요?”
민아름은 눈을 찡긋해보였다.
“그럼요. 할인가로 모실게요.”
이러면 얘기가 다르지.
난 번호를 저장했다. 성윤아의 표정이 왠지 안 좋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난 주현진에게 말했다.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음번에는 제가 살게요. 제가 명함을 따로 안 가져와서, 아까 주신 명함으로 문자 보내놓겠습니다.”
“그러세요.”
주현진은 내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아름은 성윤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좋은 시간 방해했네. 먼저 가볼게. 다음에 봐.”
“예, 언니.”
주현진은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가볼게, 윤아야. 다음에 보자.”
“네. 잘 들어가세요.”
두 사람이 가고 나자 성윤아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
“좋겠네요. 언니 번호 따서.”
“아니, 뭐······.”
이건 내가 번호를 따였다고 봐야 하지 않나?
“같이 식사하는데 불편하진 않았어요?”
“전혀요. 재밌었어요.”
“그런데 아까 언니랑 없을 때 현진 오빠가 정말 그런 소리 했어요?”
“뭐, 비슷한 얘기를 하긴 했죠.”
성윤아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그냥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마요.”
“괜찮아요. 그런데 혹시 주현진 씨랑 친한 건 아니죠?”
내 말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전혀 안 친해요. 그냥 어렸을 때 가끔 얼굴 몇 번 본 정도예요.”
난 피식 웃었다.
“그래 보이긴 하네요.”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주현진의 실체를 대충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한정그룹 일가가 성격 더럽기로 유명하긴 하지.
“우리 좀 걸을까요?”
“어! 들어가 본다고 하지 않았어요? 기사님 온다고.”
성윤아는 눈을 찡긋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현진 오빠 안 가고 있었을걸요.”
“하긴 좀 눈치가 없어 보이긴 하더라구요.”
이는 별로 눈치 볼 일 없이 살아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길을 걸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거리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고, 길 한쪽에는 트리가 서 있었다.
베이커리에서는 정문 앞에 매대를 펼쳐놓고 케이크를 팔기 위한 할인행사가 한창이었다.
확실히 크리스마스 같은 느낌이다.
와인 때문인지 성윤아의 볼이 살짝 붉게 변해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귀엽다.
“왠지 신기해요.”
“뭐가요?”
“그냥 여러 일들이요. 미루 씨랑 이렇게 편하게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그러게요.”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2년 뒤 회사를 그만둔다. 그 이후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녀라면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았을 것 같다.
그럼 이번에는 과연 어떻게 될까?
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요?”
왼편에 있는 가게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이 노래 알아요?”
“씨랩 이번 신곡이잖아요. 제목이 ‘너의 사진’이었나요?”
“맞아요.”
1회차 때 들었던 바로 그 노래다. 그런데 후렴구에 나오는 여자 목소리는 내가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검색해보니 피처링은 걸그룹 핑크걸스의 리더 케이나가 맡았다고 한다.
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얘기한 건데 정말로 안 할 줄이야.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뀌었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원래 알던 미래와는 더 많이 바뀌겠지.
성윤아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우리 카페 가요. 저 이 근처에 분위기 좋은 데 알아요.”
난 그녀와 함께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라지만 술과 간단한 요리도 파는 곳이다. 크리스마스라 그런지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자리에 앉아 커피를 시키고 나자 성윤아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서 내밀었다.
“자요.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선물은 아까 정장 아니었어요?”
“그건 그냥 사준 거고, 이게 진짜 선물이에요.”
설마 이거 주려고 오늘 만나자고 한 건가?
“풀어 봐도 돼요?”
“그럼요.”
포장을 풀어보니 다름 아닌 시계였다.
“롤렉스네요. 안 그래도 하나 사려고 했는데.”
사지 않은 이유는 유명한 제품들은 전부 품절이기 때문. 예약을 걸어놓을 수는 있지만 언제 들어올지 알 수가 없다.
때문에 돈 많은 아예 사람들은 리셀러숍을 이용해 정가의 두 배 가격을 주고 구매한다.
나도 알아볼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만뒀다. 그렇게까지 해서 사야 하나 싶기도 하고.
“한번 차봐요.”
난 시계를 손목에 찼다. 미리 시계줄을 줄였는지 딱 맞았다.
“마음에 들어요?”
“예. 그런데 이렇게 비싼 선물 받아도 되는 거예요?”
이 시계 가격은 직장인 월급의 몇 배.
아무리 집안에 돈이 많다고 해도 그녀가 그 돈을 멋대로 쓸 수 있지는 않을 테니, 꽤나 부담되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비싸 봐야 지난번 받은 선물에 비하면 별거 아닌데요.”
“랭크시 그림이요?”
“예. 침대에 누워서 볼 수 있는 곳에 걸어놨어요. 볼 때마다 좋던데요.”
비싼 그림은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법이지. 마음에 들어 하니 선물 준 보람이 있다.
“고마워요. 잘 차고 다닐게요.”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한동안 얘기를 나눴다.
“이만 일어날까요?”
“예.”
난 왠지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조심히 들어가요.”
“미루 씨도요. 다음에 또 같이 쇼핑해요.”
난 성윤아를 먼저 택시에 태워 보냈다. 대리기사를 불러 집으로 가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난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다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까 같이 식사했던 주현진입니다.]
“예, 잘 들어가셨나요?”
[설마 아직까지 윤아랑 같이 있나요?]
“아니요. 방금 헤어졌어요.”
[잘됐네. 그럼 남자끼리 술이나 한잔하죠. 할 얘기도 좀 있고.]
“무슨 얘기요?”
[일단 이쪽으로 좀 와 봐. 거기서 별로 안 머니까.]
혀가 좀 꼬인 걸로 볼 때 이미 술을 많이 마신 듯하다.
만나봐야 할 얘기가 있을까 싶지만, 미리 친분을 쌓아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난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좋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 * *
주현진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들이 웃으며 말했다.
“이야! 크리스마스에 재밌는 구경하겠는데.”
“크크, 지난번 그 새끼는 뭐더라? 센 척 존나 하더니 가게 망하게 해주겠다니까 울면서 살려달라고 빌었잖아.”
“하여튼 돈도 없는 놈들이 자존심 세우는 거 보면 존나 웃긴다니까.”
여기 있는 남자들은 평소 주현진과 함께 어울렸다. 표면적으로는 친구 관계지만, 실제로는 상하 관계에 가까웠다.
주현진은 아까의 일을 생각했다.
‘근본도 없는 새끼가 윤아에게 집적거려?’
그녀에게 주려고 비싼 돈 들여서 선물도 샀다. 그런데 건네주지도 못했다. 이 모든 게 다 그놈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지금 시간까지 같이 있었지?’
집에 들어가려는 윤아를 억지로 잡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주현진은 술잔이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네까짓 게 감히 날 모욕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