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한정그룹 막내아들 (1)
소믈리에는 디캔팅을 끝마친 와인을 잔에 따라주었다.
민아름은 잔을 들어올렸다.
“그럼 건배할까요?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는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좋은 음식점에서 좋은 와인을 마시고 있으니 왠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것 같다. 역시 나오니까 좋구나.
주현진은 성윤아에게 물었다.
“내일은 뭐해? 재철이가 크리스마스 파티 한다고 하는데 괜찮으면 같이 갈래?”
“가족들과 식사하기로 했어요.”
“그래?”
같이 가고 싶었는지 실망한 것 같은 표정이다.
민아름은 와인을 마시며 나에게 물었다.
“오늘 저희 백화점에는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옷을 좀 사느라구요.”
주현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설마 지금 있는 옷을 산 겁니까?”
“예.”
“옷은 고가 브랜드 산다고 다가 아닙니다. 같은 옷이라도 누가 입느냐에 따라 느낌이 전혀 달라지는데 센스가 영······.”
“어! 이거 윤아 씨가 골라준 건데. 주현진 씨가 보기에는 구린 모양이네요.”
성윤아는 그에게 물었다.
“제 센스가 그렇게 별로예요?”
그러자 그는 당황하며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센스가 영(Young)하다고. 젊다는 얘기였어. 어쩐지 느낌이 다르다 했더니, 역시 윤아 센스였구나. 옷 잘 골랐네.”
오, 제법 잘 빠져나갔는데.
속으로 감탄하는데, 민아름이 물었다.
“오늘 윤아랑 같이 쇼핑한 거예요?”
“예. 제가 옷은 잘 몰라서 윤아 씨한테 부탁했어요.”
민아름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정말요? 패션은 제가 전문인데. 나중에 옷 살 일 있으면 저에게 부탁하세요. 제가 골라드릴게요.”
“어! 그래도 돼요?”
안 그래도 계절마다 옷 사야 할 텐데, 전문가가 골라주면 편하지.
성윤아는 핀잔을 주듯 말했다.
“되긴 뭐가 돼요? 언니가 얼마나 바쁜데.”
“아, 하긴.”
역시 그냥 해본 말이겠지?
민아름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다 저희 백화점 매상 올리는 건데요. 고객 감동 서비스라고 생각하고 이용해주세요.”
정말 감동할 것 같다.
린스타로 볼 때는 도도하고 고고한 느낌이었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눠보니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이래서 사람은 만나봐야 알 수 있는 건가?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시며 다 같이 즐겁게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한 병을 다 마셨다.
주현진이 말했다.
“한 병 더 시킬까? 이 와인은 좀 별로인 것 같으니 다른 와인으로 마시자. 내가 진짜 좋은 와인 추천할게.”
민아름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왜요? 전 미루 씨가 고른 와인 맛있는데. 윤아는 어때?”
성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걸로 좋아요. 미루 씨는요?”
“맛있긴 한데 너무 비싸긴 하네요. 한 병 더 시키기에는 주현진 씨도 부담될 것 같으니 이번에는 다른 와인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기 자주 와보셨다고 하니 싸고 맛있는 걸로 추천해주세요.”
내 말에 주현진은 웃으며 말했다.
“윤아도 이게 맛있다고 하니 같은 걸로 시키죠.”
표정은 웃고 있지만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저, 잠깐 손 좀 씻고 올게요.”
“아! 나도 같이 가.”
성윤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민아름도 따라 일어났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여자들은 왜 화장실을 같이 가는 걸까?
* * *
성윤아는 민아름과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여자화장실 옆에는 파우더룸이 따로 연결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그곳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민아름은 성윤아보다 두 살 많은 언니이자 선배로 어렸을 때부터 자주 연락하는 사이였다.
성윤아는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현진 오빠는 왜 만난 거예요?”
그녀가 알기로 두 사람은 별로 안 친했다.
민아름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고객 응대지, 뭐. 저 오빠 VIP 중의 VIP야. 우리 백화점에 한 번 올 때마다 얼마를 쓰는지 알아? 가끔 커피 정도는 마셔줘야 다른 백화점으로 안 가지.”
그 말에 성윤아는 납득했다.
‘역시 비즈니스 때문이구나.’
부자라고 모두가 쇼핑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주현진은 백화점에서 돈을 흥청망청 쓰기로 유명했다.
“대체 뭘 그렇게 많이 산대요?”
“주로 여자 가방이랑 주얼리지. 본인 말로는 가족들 선물이라고 하는데, 과연······.”
주현진은 재계에서도 여자관계가 복잡하기로 유명했다.
민아름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보다 요즘 너한테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예?”
“오늘도 매니저가 너 백화점에 와 있다고 알려주니, 바로 인사하러 가자며 일어나던데.”
안 그래도 최근 만나자는 연락이 좀 자주 오긴 했다. 몇 차례 거절했지만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연락이 왔다.
“그보다 저 사람이 그 사람 맞지?”
“그 사람이라니요?”
“프리머스 펀드 폭로한 사람 말이야.”
“맞아요.”
민아름은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때 오빠한테 다리 놔달라고 했던 건 저 사람 소개해주려고 했던 거야?”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오빠란 유재호 회장을 의미했다.
“네.”
“흐음, 한미루가 저 사람이었구나.”
그녀의 말투에서 성윤아는 뭔가 의아함을 느꼈다.
“왜 그래요?”
“재밌네.”
“······뭐가요?”
“오빠가 미루 씨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요?”
“옆에 둘 수만 있다면 그룹을 물려줘도 아깝지 않을 거라고 하던데.”
“정말요?”
“설마. 그냥 농담이겠지. 그런데 좀 신기해. 오빠가 다른 사람에 대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처음이라서.”
그 말에 성윤아는 적잖이 놀랐다.
‘그 정도란 말이야?’
한미루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도 유성그룹 회장이 이렇게 높게 평가할 정도라니.
민아름은 눈을 빛내며 호기심을 나타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네.”
그녀는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가라는 유성 패밀리에 빼어난 외모, 그리고 뛰어난 패션 감각을 지녔다.
그동안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접근해왔지만, 민아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한미루를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다.
성윤아는 괜히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 언니 왜 이래?’
* * *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자 주현진은 태도부터 달라졌다.
바로 자세를 뒤로 젖히고 턱을 살짝 들었다. 분명 같은 높이에 앉아있는데도 내려다보는 것 같은 모습이다.
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이 사람도 이 시점에는 꽤나 젊구나. 10년 뒤에는 M자 탈모가 진행되니 지금부터 조심하라고 말해줘야 하나?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프로페시아와 미녹시딜. 약을 잘 먹고 잘 바르는 것만으로도 탈모의 진행속도를 크게 늦출 수 있다.
주현진은 나를 보며 말했다.
“윤아가 왜 당신과 식사를 같이 하는지 모르겠네요.”
“······.”
이게 뭔 소리야? 식사 같이 하는 데도 이유가 있어야 하나?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않나요?”
“직장동료라고 했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입사 동기입니다. 전 몇 달 전 퇴사했지만요.”
“집안끼리 알 거나 그런 건 아니겠네요.”
“그런 건 아니죠.”
“퇴사했으면 지금은 뭐 하나요?”
“그냥 새로운 일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참고로 그 일은 그와 아주 깊은 관련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뭐 하시나요?”
“작은 사업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도 차 보니까 아주 못사는 집안 같지는 않던데.”
“리스로 산 거라 다달이 나가는 돈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내 말에 그는 조소를 지으며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전 이런 사람입니다.”
명함에는 ‘HJ푸드 이사 주현진’이라고 적혀 있었다.
“윤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요?”
“성격이나 취미 말인가요?”
“아니요. 윤아 집안에 대해서요.”
“어머님이 DA금융그룹 회장님의 손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죠.”
그는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아, 알고 있었구나.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러더니 바로 나에게 말했다.
“그럼 그쪽이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겠네요.”
난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함부로 만나지 못할 건 뭔가요?”
대체 이런 말을 태연하게 하는 사람의 뇌 구조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궁금하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윤아를 좋아하는 건 아니죠?”
꽤나 직설적인 질문인데.
“그렇다고 한다면요?”
주현진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사회생활 해봤으면 알겠지만 사람에게는 신분이라는 게 있어요. 신분이 안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서로 불편해지기 마련이죠.”
“아······.”
사람 앞에 두고 이런 개소리를 지껄이니 불편해진다는 생각은 안 드는 모양이다.
“윤아가 무슨 생각으로 그쪽을 만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차피 오래 못 갈 거예요. 재벌가 사람이 일반인과 결혼하는 건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얘기죠.”
“윤아 씨 어머니인 양자은 상무님은 DA은행 신입사원과 결혼하지 않았나요?”
“그건······.”
너무 가까운 곳에 실제 예가 있으니 그는 반론을 하지 못했다.
“아무튼 윤아랑 그쪽은 사는 세계가 달라요.”
누가 들으면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줄 알겠는데.
그는 자신이 재벌이라는 자긍심과 함께 일반 사람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기야 날 때부터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났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일반인들과는 생각이 좀 다를 수는 있겠지.
“그쪽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는 게 아니에요. 제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죠?”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현진은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 말이 통하니 좋네요.”
“······.”
대체 어느 부분에서 말이 통한다고 느낀 거지? 혹시 나만 안 통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퇴직하고 놀고 있는 중이라고 했죠?”
“놀고 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일을 준비 중입니다.”
“그게 그거죠. 이제부터 잘하면 제가 그쪽한테 기회를 줄게요.”
이건 또 뭔 개소리인가 싶지만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혹시 취직 자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는 씨익 웃었다.
“눈치가 없진 않네. 마음에 들게 한번 잘해봐요. 그만한 대가는 충분히 줄 테니까.”
뭘 잘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그의 마음에 들면 HJ푸드에 취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 신난다.
얘기가 끝날 때쯤 두 사람이 자리로 돌아왔다.
민아름이 물었다.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요?”
그러자 주현진은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요즘 어떤 일 하는지랑······.”
난 그 말을 딱 잘랐다.
“저보고 윤아 씨랑 신분이 안 맞으니 만나지 말라는데요. 제가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 말에 성윤아와 민아름은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고, 주현진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다들 충격이었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주현진이 말했다.
“아, 아니, 내가 언제?”
성윤아는 눈을 치켜뜬 채 화난 목소리로 다그치듯 물었다.
“정말이에요? 정말 미루 씨에게 그런 말을 했어요?”
“그, 그게 아니라······.”
주현진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며, ‘이 새끼가 뭐 하자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난 웃으며 말했다.
“에이, 당연히 농담이죠.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사람 면전에 대고 그런 멍청한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무슨 바보도 아니고.”
이어서 바로 주현진에게 사과했다.
“제가 농담이 좀 지나쳤죠?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하하.”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