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크리스마스 (2)
성윤아는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차 좋은데요.”
난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포르쉐는 예나 지금이나 독일에서 생산돼 배를 타고 수입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계약 후 인수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딜러사들은 보통 가장 선호도가 높은 옵션을 넣은 차량을 선주문해서 재고를 가지고 있다.
계약을 할 때 가장 빨리 출고되는 차량으로 골랐고, 며칠 전 차가 나왔다.
“어디 갈까요?”
“바쁘지 않으면 같이 백화점 갈래요?”
“예? 백화점이요? 설마······.”
“제 옷을 좀 사려구요.”
“······아, 네.”
뭐지? 갑자기 좋아하다 실망한 것 같은 이 느낌은?
난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윤아 씨 옷도 한 벌 사줄게요.”
“정말요?”
“그럼요. 크리스마스잖아요.”
그러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얼른 사러 가요. 어떤 옷을 사려구요?”
“당장 입을 옷이랑 정장이요.”
“음, 정장은 맞춤으로 사는 게 좋은데. 그럼 오늘은 한 벌만 사고 다음에 저랑 테일러숍 같이 가요.”
“네.”
“생각하고 있는 브랜드 있어요?”
“아니요. 전 잘 모르니까 윤아 씨가 좀 골라줘요.”
“알았어요.”
집과 차는 돈을 많이 쓰면 무조건 좋아진다. 좋은 집과 좋은 차는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니까.
그런데 옷은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비싼 옷이라도 누가 입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옷이 되기 마련. 아이돌들이 입고 다니는 수백만 원짜리 명품도 나한테 입혀 놓으면 바보처럼 보이겠지.
그러니 나 혼자 대충 사서 입는 것보다 그녀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신세기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예전이었다면 들어가 보지도 않았을 명품 매장에 들어가 옷을 골랐다.
“이것도 한번 입어 봐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알았어요.”
“아! 이 코트도요.”
“예.”
“신발은 이거 어때요? 요즘 인기래요.”
“······.”
내 옷을 사는 건데 어째 나보다 더 신난 것 같은 모습이다.
난 그녀가 시킨 대로 옷을 갈아입고 앞에 섰다.
“어때요?”
성윤아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좋아요. 그대로 입고 가도 되겠는데요.”
“그게 좋겠네요.”
목 늘어난 셔츠와 무릎이 늘어난 바지는 여기서 버리는 걸로.
일상복을 산 다음 이어서 정장을 보러 갔다.
내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데 성윤아는 조금씩 스타일이 다르다며 나에게 한 번씩 입어보게 했다.
“한 사이즈 작은 게 좋겠네요.”
“전 좀 크게 입는 게 편한데.”
성윤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요. 정장은 무조건 핏이에요.”
잘 모르면 전문가(?)의 말을 듣는 게 좋겠지?
시키는 대로 입고 나오자 그녀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이네요. 역시 미루 씨는 정장이 잘 어울려요.”
난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이게 비싼 옷이라 그런 건지 핏이 맞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내가 봐도 마음에 든다.
그래. 비즈니스를 하려면 이 정도는 입어줘야지.
옷을 갈아입고 나와 계산을 하려고 하자 종업원이 말했다.
“방금 여성분께서 계산하셨습니다.”
그 말에 난 옆으로 고개를 돌렸고, 성윤아는 웃으며 말했다.
“선물이에요.”
“꽤 나오지 않았어요?”
재킷과 바지는 물론이고 셔츠와 베스트, 넥타이까지 세트로 샀다. 증권사 신입사원 월급쯤은 훌쩍 넘는 액수다.
“헤헷, 월급 모아놔서 이 정도는 괜찮아요.”
뭐, 그녀의 집안을 생각하면 그리 큰돈은 아니겠지.
성윤아는 내 팔을 잡고 이끌었다.
“이제 제 옷 사러 가요. 아까 사준다고 한 거 잊지 않았죠?”
“그럼요. 가시죠.”
* * *
쇼핑을 끝마칠 무렵 한 남녀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남자는 성윤아에게 친한 척하며 말했다.
“어! 윤아야. 여기 있었네.”
“아, 오빠.”
말을 건 남자는 30대 초반. 키는 180이 약간 안 되는 듯하고 넓은 어깨와 각진 턱이 인상적이다. 짧은 머리카락은 뒤로 넘겼고, 안경을 꼈다.
잘생겼다기보다는 남자답다는 인상이다.
옆에 있는 여성은 꽤나 미인이다.
나이는 20대 중후반 정도. 성윤아가 귀엽고 착해 보이는 느낌이라면, 이쪽은 인상이 좀 세보이는 느낌이다.
단발머리에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큰 눈, 오뚝한 코와 도톰하고 붉은 입술. 왼쪽 눈 밑에 눈물점이 있는 게 매력적이다.
큰 키에 하이힐을 신었고, 화장은 진한 편이다. 입고 있는 옷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왔으면 왔다고 얘기하지 그랬어? 매니저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모를 뻔했네.”
성윤아는 반가워했다.
“언니! 그냥 옷 사러 잠깐 들른 거예요. 그런데 둘은 왜 같이 있는 거예요?”
“오빠가 선물 좀 골라달라고 부탁해서, 쇼핑하고 나서 커피 한잔하고 있었어.”
확실히 남녀라기보다는 그냥 지인 같은 느낌이다.
그녀는 성윤아와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러는 너는? 설마 남자친구랑 데이트하는 거야?”
그 말에 성윤아는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나, 남자친구라뇨? 아니에요.”
남자는 마치 그제야 날 발견했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누구야?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난 실소를 흘렸다.
그러자 같이 있던 여자가 물었다.
“왜 웃어요?”
“말의 앞뒤가 안 맞는 게 재밌어서요. 이 친구는 누구냐고 물으면서 처음 보는 것 같다니. 보통 처음 본 사람에게는 친구라고 안 하지 않나요?”
“푸훗, 정말 그러네요.”
내 말에 여자는 소리 내서 웃었고, 남자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주현진입니다. 윤아랑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예요.”
굳이 자기소개를 듣지 않아도 얼굴을 본 순간 누군지 알았다.
한정그룹 막내아들 주현진.
아직은 대중들에게 그다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후에 뉴스에 자주 나오며 웬만한 연예인보다 유명해진다.
난 그 손을 잡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미루라고 합니다. 윤아 씨랑은 직장동료였습니다.”
“그렇군요.”
남자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자는 내 이름을 듣고 뭔가 알았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전 민아름이에요. 윤아랑은 중고등학교 선배예요.”
“네, 안녕하세요.”
그녀 역시 잘 알고 있다.
신세기그룹 유혜경 회장 막내딸 민아름.
신세기그룹은 백화점, 면세점, 호텔 등의 사업을 하는 곳으로, 유혜경 회장은 유재호 회장의 고모다.
그러니까 그녀는 유재호 회장과는 사촌인 셈이다.
사촌이라고 해도 나이 차이는 20살이 넘는다. 하지만 꽤 친한지 두 사람은 야구장이나 백화점 등에 자주 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참고로 민아름은 셀럽으로도 유명하다. 그녀의 린스타를 보면 해외 유명 디자이너나 모델들과 찍은 사진들로 가득하다.
민아름은 성윤아에게 물었다.
“저녁 먹으러 갈까 했는데 같이 갈래?”
“괜찮아요, 언니.”
“혹시 예약해둔 데 있어?”
“그렇진 않은데······.”
그러자 이번에는 주현진이 권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그 물음에 성윤아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슬쩍 나를 보았다.
그는 당당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오늘은 예약 없으면 식사하기 힘들 겁니다. 제가 좋은 곳 예약해 뒀으니 같이 가시죠.”
권유라고 하기에는 살짝 강압적인 느낌이다. 당연히 자신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느낌이랄까?
“우리는 따로······.”
난 그녀가 거절하기 전 먼저 말했다.
“잘됐네요. 안 그래도 저녁 먹을 생각이었는데.”
주현진은 마음에 들었다는 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하하! 잘 생각했어요. 식사는 제가 사죠.”
그러자 성윤아는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그녀야 아는 사람들이지만 난 모르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둘 다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재계 사람.
내가 괜히 어색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겠지.
난 주현진을 슬쩍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사준다는데 사양할 필요 있나요?”
그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나를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이게 우연인 건지 인연인 건지.
* * *
도착한 곳은 청담동의 프랑스 레스토랑이었다.
입구에는 미슐랭 별 3개가 떡하니 붙어있었다. 우리는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크리스마스다 보니 대부분은 연인들이었다.
나 빼고 다들 잘 연애하는구나.
주현진은 나에게 말했다.
“제가 살 테니 드시고 싶은 거 마음껏 시키시죠.”
메뉴판을 보는데 뭐가 맛있는지 잘 모르겠다. 에스카르고는 무슨 맛이려나?
내가 고민하자 성윤아가 대신 골라주었다.
“스테이크도 있네요. 이거 먹는 거 어때요?”
“괜찮을 것 같네요.”
그러자 와인 메뉴판을 살펴보던 주현진이 나에게 물었다.
“술 좋아하시나요?”
“싫어하진 않습니다.”
그는 보고 있던 메뉴판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 가게에는 프랑스에서 직수입한 좋은 와인이 많습니다. 그래서 와인 마시고 싶을 때 자주 오는 편이죠. 한번 골라보세요.”
난 메뉴판을 보았다.
와인 이름은 프랑스어로 써져 있다. 밑에 영어로 설명이 몇 줄 적혀있긴 한데, 어차피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설마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하고 골라보라고 한 건가?
하지만 고르는 게 그리 어려울 건 없다.
난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가리켰다.
“이걸로 하죠.”
주현진이 물었다.
“이 와인이 뭔지는 아나요?”
“아니요. 뭔지 잘 몰라서 가장 비싼 걸로 골랐어요. 비싼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잖아요.”
내 말에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알면서 골랐다는 거군요. 직장인 월급으로는 못 사먹을 금액일 텐데.”
“부담되시면 취소할까요?”
성윤아가 말했다.
“아, 그럼 와인은 제가 살게요.”
그러자 주현진을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니야. 내가 살게. 이런 자리 아니면 맛보기 힘드실 테니.”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민아름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미루 씨 덕분에 좋은 와인 먹겠네요.”
“뭘요.”
웃을 때 보조개가 생기는 게 귀엽다. 미인에 스타일도 좋다. 집안은 더더욱 좋고. 이러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소믈리에가 와인을 디캔팅하는 동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민아름이 나에게 물었다.
“스테이크 좋아해요?”
“자주 먹는 편입니다. 저희 동네에 맛있는데 있거든요.”
이번에는 주현진이 물었다.
“어디인가요?”
“말해도 잘 모르실걸요.”
“제가 웬만한 레스토랑은 다 가봤습니다. 좋은 곳이면 저희한테도 소개시켜주시죠.”
말투가 ‘니가 가봐야 얼마나 좋은 데 가봤겠냐’라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여기는 못 가봤겠지.
“아웃백이요.”
“······허.”
주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데, 성윤아가 말했다.
“거기 파스타도 맛있어요.”
“그, 그래?”
“예. 회사에서 직원들끼리 가끔 런치 세트 먹으러 가고 그래요.”
그러자 민아름도 흥미를 나타냈다.
“가끔 광고는 봤는데. 저도 가보고 싶네요.”
“제가 한번 쏘겠습니다.”
민아름은 반색했다.
“정말요? 데려가줄 거예요?”
“예.”
“약속한 거예요.”
“그럼요.”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진짜 가고 싶었나 보다.
어째서인지 성윤아는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리듯 말했다.
“뭐야? 왜 언니를 아웃백에 데려가?”
“······.”
더 좋은 음식점으로 데려가라는 건가?
정말로 둘이 친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