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크리스마스 (1) (110/529)

 111화. 크리스마스 (1)

 서울에 금융사들이 몰려 있는 곳은 대략 세 곳이다.

 첫째는 여의도. 주로 국내 증권사들이 몰려있다. 둘째는 광화문. 주로 외국계 증권사들이 몰려있다. 서울의 중심인 데다가 대사관들이 모여 있어서 업무 처리가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강남. 여기에는 PEF나 중소형 자산운용사들이 몰려있다.

 다시 여의도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서, 광화문과 강남 중 고민하다가 결국 강남으로 선택했다.

 왜냐하면 집에서 가까우니까.

 난 힘들게 발품 팔 것 없이 성윤아의 소개로 알게 된 GN부동산 컨설팅에 연락했다. 그러자 바로 조건에 맞는 매물을 찾아줬다.

 각종 집기들 역시 말만 하니 바로 세팅해주었다. 세상에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법이지.컴퓨터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주문하기로 했다.

 선우는 견적표를 짜며 투덜거렸다.

 “나 같은 고급 인력을 이런 일에 써먹어도 되는 거야?”

 “어차피 게임 망해서 요즘 할 일도 별로 없다며? 이번 기회에 집에서 쓸 컴퓨터도 새로 주문하자.”

 집 컴퓨터도 새로 사자는 말에 표정이 바로 밝아졌다.

 “흠, 컴퓨터 견적 짜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이게 호환성도 체크를 해야 하고, 소비전력에 따른 발열량을 계산해 쿨링 시스템을 설계해야······.”

 “그냥 용산 가서 사올게.”

 “어허! 그러다가 용팔이들에게 뒤통수 맞을라. 내가 아는데 있으니 거기서 주문하자.”

 표정을 보니 좀 신난 것 같다. 컴퓨터 견적 짜는 게 재밌긴 하지.

 “사양은?”

 “최고급으로. 작업용 워크스테이션으로 쓸 거야.”

 “흐음, 새 컴 맞추기에는 지금 시기가 별로 안 좋은데.”

 “어째서?”

 “CPU랑 그래픽카드 가격 엄청 올랐거든. 용산 가보면 아예 제품 숨겨놓고 시가로 팔고 있어.”

 “그날그날 부품 가격이 달라져?”

 “아니, 오전오후로도 달라져.

 난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컴퓨터 부품이 뭔 회도 아니고 시가에 팔아?”

 선우가 말했다.

 “원래부터 가격 변동이 심한 부품은 시가에 팔고 그랬어. 최근에는 배틀 아일랜드 때문에 더 심해졌지만.”

 “그게 뭔 상관이야?”

 “그 게임이 꽤 고사양이라서 지금 PC 교체수요가 장난 아니야. 그래픽카드랑 CPU는 품귀현상이고, 120Hz 이상 지원되는 게이밍 모니터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어.”

 “그러고 보니······.”

 PC방마다 배틀 아일랜드가 잘 돌아가는 최고사양 PC를 들여놨다고 현수막을 걸어놓은 걸 본 것 같긴 하다.

 하드 용량이 끝도 없이 늘어나는 이유가 야동 때문이라면, PC 사양이 계속 올라가는 이유는 게임 때문이다.

 사실 영상편집이나 그래픽작업 등 업무를 위해 고사양 PC를 구매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들 게임하느라 램 늘리고, 그래픽카드 업그레이드하는 거지.

 “덕분에 지금 개발하는 게임들 사양도 전반적으로 올라가는 추세지.”

 잘 만든 게임 하나가 PC 시장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생각해 보면 영화용이나 음악용 PC는 없지만, 게이밍 노트북과 게이밍 PC는 따로 출시되고도 하고.

 “아! 모니터 개수는 많아야 해.”

 “왜?”

 “그래야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

 선우가 컴퓨터 견적을 뽑고 주문을 넣는 동안, 난 아직 비닐도 뜯지 않은 의자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조만간 한국에서 큰 판이 벌어진다.

 잘만 베팅하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하지만 판에 앉기 위해서는 일단 판돈이 있어야 한다.

 결국 그림값이 들어와야 일이 진행된다. 안 되면 외부의 투자를 받아야겠지.

 “지금쯤이면 그림을 감정하고 있으려나?”

 * * *

 뉴욕의 갤러리스트 로버트 팬델.

 그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아 가족들이 걱정할 정도였다.

 그 한국인이 사간 그림은 다빈치 그림이 분명했다. 간발의 차이로 그림을 눈앞에서 놓쳤다.

 그의 입장에서는 강탈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대체 그 한국인 뭐였을까?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설마 내가 다빈치 그림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계속 내 뒤를 계속 밟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게 맞아 들었다.

 ‘그날 그놈이 센트럴파크에 있었던 건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야. 그다음 내가 시카고로 이동하자 바로 내 뒤를 따라온 거고. 목적지가 에펜프리트 갤러리라는 것을 알고 먼저 그곳에 와있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놈의 목적은 처음부터 다빈치 그림이었어! 나한테 슬쩍 접근해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 것도 다 나를 속이기 위한 술책이었고.’

 자신이 먼저 말을 걸었다는 사실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로버트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놈은 노점에서 파는 랭크시의 그림을 알아볼 정도의 안목을 지녔어. 전문가인 나도 못 알아본 걸 말이지. 그리고 내 뒤를 캔 걸로 볼 때 같은 업계 종사자인 게 분명해.’

 그림을 손에 넣었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순간부터가 시작이라고 봐도 좋다.

 ‘감정과 복원을 거치지 않은 그림은 별다른 가치가 없으니까.’

 엉망으로 훼손된 그림을 다빈치 그림이라고 하면 누가 믿고 사겠는가?

 그 상태로는 판매가 불가능한 만큼 반드시 감정과 복원에 나설 것이다.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을 걸로 볼 때, 미술계에 그럴 만한 인맥과 영향력이 없을 거야.감정과 복원을 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림을 적당한 가격에 팔 수밖에 없겠지.’

 그때를 노려 어떻게든 그림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그가 계속 한국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뜻밖의 초청장이 날아왔다.

 토머스 미술재단.

 사우디 왕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재단으로, 다양한 예술품을 사들이고 예술가들을 지원했다.

 초청장을 받은 건 패트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버트가 친구와 함께 갤러리 안으로 들어서자 한 남자가 아는 척했다.

 “어! 펜델 씨.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아! 서덜랜드 교수님.”

 안경을 쓴 노년의 백인 남성 이름은 에드워드 서덜랜드. 뉴욕대 전임교수로 전공은 미술사였다.

 로버트는 그를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전기집을 저술할 정도로 다빈치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다빈치 그림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여러 차례 자문을 구했다.

 “혹시 무슨 일 때문인지 들으셨습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일이라 꼭 참석해 달라고 연락이 와서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샴페인과 와인과 함께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잠시 후, 손님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대부분 미술계의 유명인들이었다.

 패트릭이 말했다.

 “저 사람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복원가 리처드 오스터잖아. 지난번에 산드로 보티첼리 그림을 복원했었지.”

 로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마이클 렌스키, 뉴욕타임즈 미술기자야.”

 그는 보스턴 미술관에 있는 위작을 폭로한 기사를 쓴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미술관 측에서는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그의 말이 옳은 것으로 밝혀지며 그에게 사과했다.

 다른 이들의 면면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학예사 조너선 리들리, 루브르 박물관 학예사 알랭 루브탱. 심지어는 다빈치의 벽화 복원을 감독한 다닐로 보누치까지 있었다.

 한마디로 미국과 유럽의 미술계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잠시 후, 양복을 입은 중년의 사우디인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에드워드 재단의 운영을 맞고 있는 이사장 우마르 아바스입니다. 먼저 저의 초청에 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그림 감정을 부탁드리기 위함입니다.”

 그 말에 모인 사람들은 일제히 웅성거렸다.

 “대체 무슨 그림이기에 그럽니까?”

 “보통 그림이 아닌 모양인데요.”

 “허허, 왠지 엄청난 그림을 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이군요.”

 패트릭은 로버트를 보며 말했다.

 “잠깐. 이거 혹시······.”

 “아, 아닐 거야.”

 ‘그 그림이 벌써 사우디 왕가가 운영하는 재단에 넘어왔을 리 없어!’

 애써 부정했지만 로버트의 마음에는 이미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바스 이사장은 그들을 지하에 있는 감정실로 안내했다.

 보관실과 이어져 있는 감정실은 마치 은행 금고처럼 철통같은 경비와 함께 첨단 보안 시스템, 그리고 조명과 온도, 습도 등 모든 것이 철저하게 관리됐다.

 감정실 안에는 이미 감정을 위한 각종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다.

 아바스 이사장은 테이블을 덮고 있던 천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바로 이 그림입니다.”

 그림의 크기는 가로 45.4센티, 세로 65.6센티.

 곳곳에 칠이 벗겨지고 뭉개진 그림에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한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을 본 순간 로버트 팬델은 생각했다.

 ‘개새끼야. 내 그림 내놔······.’

 * * *

 사무실 컴퓨터를 주문하며 집에서 쓸 가구와 가전도 함께 주문했다.

 왕자님의 연락을 기다리며 집에서 쉬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나에게 전화할 사람은 몇 명 안 된다.

 난 전화를 받았다.

 [뭐 하고 있어요?]

 “그냥 집에 있어요. 윤아 씨는요?”

 [저야 지금 회사죠.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인 건 알아요?]

 “그러고 보니······.”

 뭐 한 것도 없는데 벌써 크리스마스구나.

 1회차 때는 그래도 여자친구와 함께 보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딱히 만날 사람도 없다. 부모님 집에나 한번 들러야 하나?

 [미루 씨는 약속 없어요?]

 “음, 딱히 할 일은 없는데요.”

 [저 오늘 오전 근무만 하는데, 오후에 볼래요?]

 “예?”

 뭐지? 왜 크리스마스이브 같은 중요한 날 보자고 하는 거지?

 이거 설마······?

 “데이트 신청?”

 잠시 대답이 없었다.

 [끊을게요.]

 난 재빨리 말했다.

 “농담이었어요. 몇 시에 어디서 볼까요?”

 안 그래도 집에만 있기 심심했는데 잘됐다.

 난 약속을 잡은 다음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선우가 물었다.

 “누구야?”

 “성윤아.”

 “지난번에 봤던?”

 “응.”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둘이 무슨 사이야?”

 “그냥 전 직장동료야.”

 “대체 어떤 전 직장동료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보자고 하나?”

 “아니, 뭐······.”

 친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않나?

 “넌 약속 없냐?”

 “아! 나도 이따 직장동료랑 만나기로 했어.”

 “여자?”

 “응.”

 “······.”

 생각해보니 이때쯤 얘가 여친을 사귀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남의 연애에는 관심이 없다 보니 기억이 잘 안 난다.

 막상 나가려고 보니 있는 옷이라고는 일할 때 입는 정장 아니면,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무릎이 늘어난 바지밖에 없다.

 이런 거지같은 옷들을 그동안 잘도 입고 다녔구나.

 “옷도 좀 사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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