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왕세자 방한 (7)
한미루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고, 군대를 다녀왔고, 회사에 취직했다.
사우디는커녕 아랍 국가들과도 접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심지어는 중동 지역을 여행한 일조차 없었다.
그런데 사우디의 문제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해결책까지도 들고 왔다.
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사우디는 대단히 모순적인 나라다.
지구상에 몇 안 되는 전제군주국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이념으로 건국되었고, 메카와 메디니라는 이슬람 성지를 수호하고 있다.
반면 중동에서 가장 친미적인 성향을 지녔고, 미국의 대외정책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알 카에다나 탈레반 같은 이슬람 테러집단의 이념의 근간임과 동시에, 미국과 함께 그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섰다.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야 모순과 불만들을 돈으로 눌러왔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변화는 필수였다.
라시드는 여러 차례 개혁의 필요성을 말했지만, 그의 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란의 팔라비 왕조가 붕괴한 것을 보면서도 다들 지금의 체제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믿고 있을 뿐이지.’
국왕도 왕세자도 어차피 와하브파에 속한 근본주의자들이라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라시드는 자신이 권력을 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할리드 왕세자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다음 부왕의 승인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무능하고 부패한 왕족들을 전부 숙청하고, 시스템을 개혁한다.
당연히 강한 반발이 뒤따를 것이다. 쿠데타란 성공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지만 실패하면 목이 달아난다.
때문에 그는 주변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은밀하고 신중하게 사우디의 권력을 장악하는 중이었다.
명목상의 부처 수장들은 왕과 왕세자의 측근이지만, 실무자들은 하나둘씩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라시드가 쿠데타를 벌일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아셰르를 포함한 측근 몇 명뿐이다.
‘그런데 이 머나먼 땅에서 또 한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줄이야.’
아셰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한 조언들 중 새겨들을 만한 것도 있습니다.”
“왕족들을 붙잡아서 재산을 털자는 얘기 말인가?”
“예. 처음에는 깜짝 놀랐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권력에 이어 돈까지 빼앗고 나면 그들에게 남는 것은 왕족이라는 허울뿐이니까요. 명분도 충분합니다.”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부정축재한 재산을 환수한다는데 누가 반대할 수 있겠는가? 국민들은 물론이고, 주변국들 역시 지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라시드 왕자는 재미있다는 웃음을 지었다.
“설마 한국 땅에서 낯선 이를 만나 이런 조언을 듣게 될 줄이야.”
신기하게도 한미루의 얘기를 들으니 이제까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계획들이 구체화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재호 회장과는 대체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일까요?”
“글쎄.”
한쪽은 평범한 직장인이고, 한쪽은 대한민국 최대 재벌그룹의 회장. 둘 사이에 딱히 접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유재호 회장은 자신의 가족과 측근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뿌렸다. 그 금액만 해도 100만 달러는 가볍게 넘을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과 친분을 쌓으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만남을 주선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기업인들은 돈이 안 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한미루와 친분을 유지하는 게 유재호 회장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라시드 왕자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유성전자의 사업 방향이 변했지.’
덩치가 큰 기업일수록 장기 계획을 수립해놓고 이를 쉽게 변경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성전자는 사업 전략이 변했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펼쳤다.
변화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설마 한미루가 유재호 회장에게 인수를 조언한 건가?’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다. 하지만 라시드 왕자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쩌면······.
토머스 모터스를 폭락시킨 것도, 실리콘밸리의 천재로 불렸던 롤프 부치의 거짓말을 알아낸 것도 전부 그가 아닐까?
라시드 왕자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동안 나름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신했는데, 이 한국인에 대해서는 도저히 모르겠다. 만나서 얘기를 해보니 모호함이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혼란스럽다.
그의 말과 표정으로 볼 때 자신이 왕이 될 거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설마 분석만으로 이 모든 것들을 예측했다는 건가?’
아셰르는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그림이 정말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품일까요?”
그가 입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인지, 아니면 정말로 뭔가 있는지는······.
“감정해보면 알 수 있겠지.”
라시드 왕자는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나며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그림 속의 남자는 여전히 자애롭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쩌면 이 그림이 자신과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시드 왕자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를 만난 것 역시 신의 뜻인가?”
* * *
난 커피를 마시며 거실에 앉아 창밖에 내리는 눈을 구경했다. 펑펑 쏟아지는 눈으로 인해 다리 위를 오가는 차들은 엉금엉금 기어갔다.
선우가 기지개를 켜며 나왔다.
“너 회사 안 갔어?”
“오늘 일요일이야.”
“넌 일요일에도 회사 가잖아.”
“준비해놨던 이벤트와 업데이트 모두 일정이 뒤로 밀려서.”
게임이 망해서 할 일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잠은 잘 잤냐?”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푹 잤어. 좋은 집에서 자니 잠도 잘 오는 것 같아.”
생각해보면 그동안 그 좁은 집에서 둘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이사를 몇 번 하긴 했지만 역시나 좁은 투룸이었던 것은 마찬가지.
얘는 모르는 사실이지만 난 그 뒤로도 얘 집에 10년을 더 얹혀살았다. 그렇다고 내가 얘를 10년이나 데리고 살 수는 없는 노릇.
결혼할 때 적당히 강남에 아파트 한 채 해주고 내보내면 되겠지.
선우는 잠시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이야! 집에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눈 내리는 한강의 모습이 새삼스러울 건 없다. 그런데 확실히 따뜻한 내 집에서 앉아서 보니 느낌이 좀 다르긴 하다.
이래서 다들 한강뷰 찾는 건가?
“그나저나 집이 너무 휑하네. 가구 좀 사야 할 것 같은데.”
“법인카드 줄 테니 알아서 주문해.”
“가구를 어디서 사지?”
“아케아에서 대충 사. 요즘은 부자들도 다들 아케아 써.”
“조립은 누가 하고?”
“돈 내면 조립도 해준대.”
“흠, 진짜 날 잡아서 한번 가봐야겠는데. 밥은?”
“방금 피자 시켰어.”
“왜 치킨 안 시키고? 너 치킨 좋아하잖아.”
“치킨 끊었어.”
내 말에 선우는 깜짝 놀랐다.
“뭐? 치킨을 왜 끊어? 얼른 치킨도 하나 시키자. 보니까 근처에도 체인점 하나 있던데.”
“······.”
한여름에 튀김기 앞에서 땀 뻘뻘 흘리며 100마리씩 튀겨봐야 치킨 소리가 안 나오지.
결국 치킨도 한 마리 시켰다.
“새해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연말이네.”
“그러네.”
어느새 12월도 벌써 절반 넘게 지났다.
선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냐? 내 인생에서 가장 짧은 1년이었던 것 같아.”
“그래? 난 반대인데.”
내 인생에서 가장 긴 1년이었다.
1월에서 12월로 오기까지 10년도 넘게 걸렸으니까. 덕분에 연말의 모습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1회차 때였다면 그 집에서 계속 살며 DA증권을 다니고 있었겠지. 그런데 지금은 컨티뉴 캐피탈 대표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난 식사를 대충 끝마친 다음 미국에 있는 데이비드 록허트와 통화했다
[한국에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까?]
“그럼요. 집도 옮기고 차도 샀어요. 나중에 한국 놀러오면 한번 태워줄게요.”
[기대되는군요.]
“그쪽은 어때요?”
새로운 투자를 안 한다고 해서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존에 투자했던 기업들을 관리해야 하니까.
[스노우 크래시는 빠르게 정상화되고 있습니다.]
롤프 부치의 거짓말, 창업자 퇴진, 지분 매각, CEO 교체, 대량 해고 등등으로 인해 스노우 크래시는 한동안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이대로 망할 거라는 전망마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기존 고객들이 대거 이탈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놀랍게도 이탈률은 3퍼센트 미만이었다.
이마저도 최소한의 서비스만 이용하는 고객들이라 매출액 타격도 미미했다.
그만큼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다는 뜻이겠지.
“고생 많으셨어요.”
스노우 크래시 정상화에는 그의 도움이 컸다.
데이비드 록허트는 에드워드 밴슨과 함께 스노우 크래시의 재무 상황을 정리하고, 새로운 CFO와 직원들을 교육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래서인지 목소리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자금 마련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며칠만 더 기다려보세요.”
일전에 통화했을 때 그에게 투자금을 마련해오겠다고 큰소리쳤다. 방법을 묻는 그의 질문에는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답했다.
[다행히 여기저기서 투자 문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블라인드 펀드라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블라인드 펀드란 어디에 투자할지 정하지 않고 자금부터 모집하는 것이다.
투자에 대한 모든 권한을 투자사에 위임하는 것인 만큼, 웬만큼 명성이 있지 않고서는 모집이 힘들다.
명성만 있으면 돈은 얼마든지 끌어모을 수 있다. 이래서 금융계에서는 명성이 중요한 법이지.
[그럼 나중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흠, 오일국 왕자님께선 오늘도 연락이 없구나.”
이제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요즘 많이 바쁜가?
난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21세기에 전제군주국가의 왕자를 만나 협상을 하다니. 내가 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들었으면 지어낸 얘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디 가서 말해봐야 아무도 안 믿지 않을까?
과연 원하는 대로 따라줄지는 미지수다. 내가 그에게 그림을 파는 것은 1회차 때는 없었던 일이니까.
다만 사람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마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이익을 제시하는 것뿐이다.
미래를 알아도 거기 끼어들어 한탕 해먹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회귀할 줄 알았으면 로또 번호라도 외워 놓을 걸 그랬나?”
그런데 요즘 로또 1등 돼봐야 20억도 안 되지 않나?
사우디 왕자와 3억 달러짜리 딜(?)을 치고 나니, 20억 원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진다. 그 정도야 랭크시 그림 몇 장만 팔아도 쉽게 벌 수 있기도 하고.
왕자님의 연락이 올 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 사무실부터 구해야겠구나.
그래야 돈 들어오면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