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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왕세자 방한 (6) (108/529)

 109화. 왕세자 방한 (6)

 “진품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그림에 1억 5천만 달러를 내라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제가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림을 가지고 가셔서 얼마든지 감정을 해보시고, 진품이라고 판단된 후 구매하시면 됩니다.”

 라시드 왕자는 바로 내 말의 진의를 눈치챘다.

 “감정과 복원을 저한테 떠넘기겠다는 거군요.”

 내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연구자와 미술계 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라시드 왕자의 영향력과 인맥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감정 과정에는 꽤 큰 비용과 수고가 들어갑니다.”

 “왕자님께 부담이 될 정도의 비용은 아닐 겁니다.”

 “비용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까지 했는데 위작으로 판명나면 제 명성에 흠집이 날 수도 있겠죠.”

 나 같은 범인이야 명예 같은 건 별 신경 안 쓰더라도, 사우디 왕족인 그는 다르겠지.

 게다가 그는 조만간 쿠데타를 일으켜 왕세자를 밀어낼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시기에 괜한 구설수에 오르는 건 피하고 싶겠지.

 이를 감수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제까지 최선을 다해 입을 턴 거고.

 왠지 자꾸 약 파는 것 같지만······.

 “때로는 그림보다 화상을 믿어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감정해서 진품이 아니라고 판단되면요?”

 “그땐 찢든 태우든 알아서 처분하시면 됩니다.”

 라시드 왕자가 진품이라는 확인을 받아내지 못할 정도라면, 그림을 되돌려 받아봐야 아무런 방법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테지만.

 “그럼 제가 진품임을 확인한 뒤, 돈을 주지 않으면 그땐 어떻게 할 겁니까?”

 1억 5천만 원도 아닌 무려 1억 5천만 달러다.

 아무리 양심적인 사람이라도 이만한 돈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림의 가치는 공개적으로 인정을 받느냐 안 받느냐에 따라 크게 차이 납니다. 왕자님이라면 진품을 손에 넣고도 그 사실을 숨기는 어리석은 선택을 할 리 없을 테니까요.”

 그림의 유통 경로는 진품과 위작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가 나에게 돈을 지불하면 공식적으로 유통 경로를 공표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가짜로 만들어내야 한다.

 가뜩이나 위작 논란이 있는 작품인 만큼 이는 치명적이다.

 “반대로 왕자님께서 저에게 1억 5천만 달러를 지불하고 그림을 구매하신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걸 진품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 돈을 걸고 거짓말을 하진 않는다.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위작에 1억 5천만 달러를 지불하겠는가?

 사우디 왕자가 그 금액을 주고 산다면, 그 사실 자체가 진품임을 입증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진품이라면 4억 603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그림이다. 고작(?) 1억 5천만 달러 내주는 게 아까워 내 뒤통수를 치지는 않겠지.

 라시드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진품이라면 1억 5천만 달러를 지불할 가치가 있겠군요.”

 1억 5천만 달러면 원화로 1600억이 넘는다. 차라리 10억이나 100억이 더 크게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인 금액이다.

 재벌 중에서도 이 만큼의 현금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나에게는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1억 5천만 달러로는 부족하다.

 “판매에 있어서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라시드 왕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1억 5천만 달러에 더해 조건까지 있습니까?”

 “예.”

 나도 뻔뻔하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뭡니까?”

 “컨티뉴 캐피탈에 추가로 1억 5천만 달러를 투자해주셨으면 합니다.”

 라시드 왕자의 표정이 굳었다.

 “그림값으로 1억 5천만 달러를 지불하고, 추가로 1억 5천만 달러를 투자하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게 그림값으로 3억 달러를 달라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 가지가 크게 다르다.

 그림값 1억 5천만 달러는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하지만 투자비 1억 5천만 달러는 아니다.

 그는 사우디 왕실 경제개발위원회의 위원장. 투자라는 명목으로 국고에서 얼마든지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나랏돈은 눈먼 돈 아니겠나?

 “투자를 하면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수익의 30퍼센트를 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투자수익의 70퍼센트를 가져가겠다는 거군요.”

 “30퍼센트만 해도 원금의 배 이상의 수익일 겁니다.”

 “그러려면 최소한 300퍼센트의 수익을 내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토머스 모터스의 경우를 보지 않으셨습니까?”

 “한 번 성공했다고 해서 그게 다음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죠.”

 맞는 말이다.

 뛰어난 투자자라고 매번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에런 베이커 역시 여러 차례 투자에 실패한 적이 있다.

 “만약 수익이 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 경우에도 최소 연 30퍼센트의 수익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연 30퍼센트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2년 반이면 원금이 2배가 된다. 이런 말은 다단계 사기꾼들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수익률을 보장한다면 빌려주는 것과 다를 게 뭔가요?”

 “빌려준 돈에는 이자가 지급되지만 투자한 돈에는 수익이 지급되죠.”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사실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슬람은 샤리아에 따라 이자를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때문에 이슬람 국가들은 이자 대신 수쿠크라는 채권을 만들어서 거래한다.

 수쿠크는 여러 종류가 있고, 방법도 좀 복잡하다.

 하지만 똑같은 돈이라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안 되지만, 투자해서 수익을 받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쨌거나 투자라면 원금이 손해 볼 가능성도 있겠군요.”

 “펀드에 질권을 설정해 펀드 자금이 투자금 이하로 떨어질 경우 바로 원금을 회수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마이너스 50퍼센트가 되면 펀드를 강제로 청산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투자금을 먹고 나르는 것은 방지할 수 있다.

 “정말로 자신이 있는 모양이로군요.”

 “예. 이미 생각해 놓은 투자처가 있습니다.”

 단지 돈이 없을 뿐이지.

 그러니 그가 반드시 나에게 투자를 해야 한다.

 라시드 왕자는 한동안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이제까지 한 말은 거짓이 아니다.

 미래를 알고 있으면 돈 버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한동안 깊게 생각하던 그는 나에게 말했다.

 “이런 자리에 있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우디가 부자나라라는 이미지가 있긴 해도 경제 규모가 한국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같은 정치인이라 해도 전제군주국 왕족은 민주공화국 정치인에 비해 막강한 권력을 갖는다.

 괜히 한국 대통령과 장관, 그리고 재벌그룹 총수들이 버선발로 달려나가 왕세자 일행을 맞이한 게 아니다.

 애초에 내가 이렇게 그를 독대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들 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저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도 있고 손해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되기도 하고, 우연히 만난 사람이 평생을 함께하기도 합니다.”

 “저는 어떤 것 같습니까?”

 내 물음에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군요. 솔직히 말해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봅니다.”

 하긴, 그의 입장에서는 지금 상황이 황당 그 자체일 것이다.

 대뜸 찾아와서 사우디 개혁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다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림을 팔겠다고 하니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겠지.

 “인샬라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라시드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사우디를 떠나 이곳에 온 것도, 당신이 그림을 손에 넣은 것도,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전부 신의 인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일은 오직 신만이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뜻을 따를 뿐이죠.”

 “······.”

 사실은 신 말고 나도 미래를 알고 있다.

 내가 돈을 벌고 회사를 만들고, 그림을 손에 넣고, 여기서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그 덕분이다.

 하지만 이 얘기를 했다가는 신성모독이라고 욕먹을 수 있는 관계로 그냥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로 제가 왕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는 더 이상 내 앞에서 왕좌를 향한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결심은 진작 했을 테니 지금 필요한 것은 확신이다.

 그래서 난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었다.

 “인샬라.”

 라시드 왕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는 사우디의 왕이 될 것이다. 그게 신의 뜻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내가 아는 미래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된다.

 라시드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진품이라면 1억 5천만 달러에 사고, 컨티뉴 캐피탈에 1억 5천만 달러를 투자하도록 하죠.”

 그 말에 기쁨 대신 안도감이 들었다.

 이걸로 단기간에 3억 달러를 마련했구나. 이 정도면 이제 해볼 만하다.

 “최대한 빨리 감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보름 안에 답변 드리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얘기가 다 끝나고 나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시드 왕자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 그림이 진품이었으면 좋겠군요. 그래야 당신을 또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림이 진품이 아니라면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얘기인가?

 난 그 손을 맞잡았다.

 “저 역시 왕세자님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직은 왕자(Prince)지만 난 일부러 ‘왕세자(Crown Prince)’라고 칭했다. 그는 웃음을 지을 뿐 굳이 내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 * *

 한미루가 떠나고 나자 라시드 왕자는 아셰르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 같으냐?”

 아셰르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다른 왕족의 사주를 받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림을 팔러 왔다는 얘기에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유재호 회장의 요청을 받은 후 한미루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를 해보았다.

 그는 평범한 증권사 직원이었다. 그런데 반년 만에 회사가 판매하는 펀드에 부실이 있다고 폭로하고 회사를 나왔다.

 부실은 10억 달러에 육박했으나 놀랍게도 그가 폭로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후의 행보는 더욱 놀라웠다.

 ‘컨티뉴 캐피탈을 창업했다니.’

 그렇다는 건 토머스 모터스 사태와 스노우 크래시 인수에도 관여했다는 뜻이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증권사 신입사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행보다.

 이에 대해 그는 큰 흥미를 느꼈고 만나기로 마음을 정했다.

 라시드 왕자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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