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왕세자 방한 (5)
하긴 뜬금없이 그림을 꺼내놓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품이라고 주장하니 황당하기도 하겠지.
입장 바꿔서 생각하면 나라도 안 믿을 것 같긴 하다.
난 기억하는 내용, 조사해본 자료, 그리고 에펜프리트 갤러리에서 그림을 살 때 들었던 얘기들을 종합해서 말했다.
“이 그림은 1500년경 루이 12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의뢰해서 제작했고, 헨리에타 마리아 공주가 찰스 1세와 결혼하며 영국으로 가져갔습니다. 한동안 영국 왕실에 있었으나,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가 1900년경 다시 등장합니다. 빅토리아 시대 부호인 프란시스 쿡의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었고, 이후 가구 제작자 워렌 쿤츠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컬렉션들은 크리스티 경매에 붙여졌지만 이 그림은 제외되었습니다. 당시에도 이미 훼손과 덧칠이 심각해서 누구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으니까요. 이후 그의 유품들은 골동품상에 팔리며 몇 차례 손 바뀜이 일어났었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렇게 시카고의 한 갤러리 창고에서 10년 넘게 잠들어 있던 것을 지난주에 제가 샀습니다.”
생각해보면 대단히 신기한 일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 무려 600년이 넘는 시간을 넘어 한국까지 건너오게 될 줄이야.
“얼마에 샀습니까?”
어차피 조금만 조사해 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인 만큼 난 솔직하게 말했다.
“12200달러입니다.”
라시드 왕자는 웃음을 지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셰르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12200달러짜리 그림을 일주일 만에 1억 5천만 달러에 팔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제가 얼마에 샀느냐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이 그림에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느냐겠죠.”
세상에 좋은 그림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만큼 명성과 희소성이 있는 그림은 찾기 힘들다.
“다른 투자상품과는 달리 그림은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화가가 죽으면 작품의 가격이 오르기 마련이죠. 왕자님께서는 그동안 여러 화가의 작품을 다양하게 수집하셨지만, 그중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은 없습니다. 지금이 그의 그림을 소장하실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아시겠지만 1억 5천만 달러면 대단히 싼 겁니다.”
라시드 왕자는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심하게 훼손된 그림이지만 형태를 알아보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그림 안에는 머리를 길게 기른 남자가 오른손은 검지와 중지를 살짝 꼬고, 왼손에는 투명한 수정구를 들고 있다.
남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검지와 중지를 교차시킨 것은 축복의 의미고, 수정구는 우주를 의미한다.
라시드 왕자는 손가락으로 그림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부분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수정구라면 뒤에 비친 손과 옷에 굴절이 생겨야 하는데, 이 그림에는 그런 게 전혀 없군요. 정말로 다빈치 그림이 맞습니까?”
예리한 지적이다.
다빈치는 뛰어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고, 해부학에도 능했다. 다빈치가 그렸다면 수정구로 인한 빛의 굴절현상을 그림에 표현하지 않았을 리 없다.
사실 이는 이 그림이 다빈치 진품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기도 했다.
다행히 여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속이 텅 비어있는 수정구라서 그렇습니다. 속이 꽉 찬 구체는 빛을 굴절시켜 후방의 사물을 왜곡시키지만, 속이 비어있는 구체는 왜곡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빛을 정확하게 묘사한 겁니다.”
설명이 통했는지 그는 반론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라시드 왕자는 입을 열었다.
“저에게 그림을 팔겠다고 찾아오는 화상이 한둘이 아닙니다.”
돈이 많으면 사람이 꼬이기 마련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아라비아 사막까지 늘어서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 중에는 위작을 들고 오는 사람도 많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속은 적도 몇 차례 있었죠.”
난 남 얘기하듯 말했다.
“아! 그런 안타까운 일이······. 정말 나쁜 놈들이네요. 그런 놈들은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오기 전 미술품 위작에 대해 좀 알아보았다.
결과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주식시장에 사기꾼이 많다지만, 미술품 시장에 비한다면 애교 수준이다.
금과 원유 같은 상품(Commodity)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주식과 채권은 기업의 가치와 연동된다. 그런데 예술품은 가치를 산정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 캔버스나 물감 가격과 연동되는 것도 아니고.
스케치북에 연필 한 자루로 그린 그림이라도 피카소가 그렸으면 수십만 달러가 기본이다.
진품으로 인정받을 수만 있으면 떼돈을 버는 게 가능하다 보니, 위작들이 넘쳐난다. 문제는 진품과 위작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크 시대의 한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엄지손가락으로 캔버스에 물감을 펼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때문에 그가 그린 그림에는 반드시 그의 지문이 남아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 화가의 그림은 위작이 없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지문이 있으면 곧 진품이라는 인식이 퍼지며, 위조범들은 지문을 복제한 실리콘으로 캔버스에 똑같은 흔적을 남긴 위작을 제작했고, 정작 화가는 그린 적도 없는 그림들이 대거 시장에 쏟아졌다.
네덜란드의 화가 판 메이헤런은 나치에게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라는 유명 화가의 그림을 판매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국보급 미술품을 팔아넘긴 것은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중죄였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얘기했다. 전문가들도, 나치도 진품이라고 인정한 그림을 자신이 직접 그렸다는 것이다.
이에 그림을 진품이라고 감정한 전문가들은 그가 죄를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주장했지만, 메이헤런은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똑같은 위작을 그려냈고, 전문가들은 전부 입을 다물었다.
최근에는 아예 3D 프린터기 같은 첨단장비까지 동원해 원작자의 붓질 패턴까지 그대로 복제한다고 한다.
게다가 위작이란 현대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만들어진 경우도 많다.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도 위작을 만든 전력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당대에도 유명인이었던 만큼 그 시대에도 많은 위작들이 만들어졌다. 이런 위작들은 연대측정으로도 밝혀내기가 힘들다.
지금 시중에 떠도는 다빈치의 위작이 적어도 수백 점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 기준은 무엇일까?
냉정하게 말해 이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화가 본인밖에 없다. 아니, 사실은 그것조차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화가 본인이 그린 적 없다는 그림을 국립현대미술관이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일도 있었으니까.
루브르나 오르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걸려있는 그림들은 과연 전부 진짜일까? 그 그림들 중 위작이 섞여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반대로 얼마나 많은 진품들이 위작 취급받으며 버려졌을까?
당장 이 그림만 해도 아무도 다빈치의 진품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10년 넘게 창고에 처박혀 있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결론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진짜라고 믿으면 위작도 진품이 되고, 가짜라고 믿으면 진품도 위작이 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600년 전에 죽었다. 그 시절에 살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를 판단하는 것은 이 시대 사람들의 몫이다.
“당신은 어째서 이 그림이 진품이라고 확신하는 겁니까?”
난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그림을 좀 볼 줄 알아서요.”
“정말입니까?”
거짓말이다.
그림 애호가인 그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얼마 전 랭크시가 자신의 그림을 센트럴파크 노점에서 판매한 일이 있었습니다.”
라시드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한’이라는 한국인이 그림을 알아보고 전부 구매했다고 하던데.”
그는 말을 하다가 멈칫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접니다.”
리사드 왕자는 할 말을 잊은 표정이었고, 아셰르는 놀라 한마디했다.
“······말도 안 돼.”
“원하신다면 그날 산 그림을 가져와 보여드리겠습니다.”
어차피 거짓말이라면 금방 들통날 일이다. 내 뒷조사를 했다면 내가 그날 뉴욕에 있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겠지.
“랭크시가 그 장소에서 그림을 판매한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간 겁니까?”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점에서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랭크시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거짓말이라는 게 한번 시작하는 게 힘들지, 막상 하기 시작하니 술술 나왔다.
“화가마다 그림에 나타나는 특징이 있으니까요. 냉철한 시선으로 그림을 분석하면 누가 그렸는지, 진품인지 아닌지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하면서도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러하다.
“설사 다빈치의 진품이라고 해도 이런 그림이 1억 5천만 달러라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난 차분하게 말했다.
“모나리자에는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게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매년 800만 명이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고, 관람객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모나리자를 본다.
관광 유발 효과를 생각한다면 10억 달러를 준다고 해도 루브르 박물관은 모나리자를 팔지 않을 것이다.
“그 절반만 해도 5억 달러의 가치는 있지 않겠습니까?”
“이 그림이 모나리자와 비교가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럼요. 아직 복원 전이라서 그렇지, 복원하고 나면 ‘남자 모나리자’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 그림은 6년 뒤 크리스티 경매에 4억 6030만 달러에 그에게 팔린다. 그렇다면 굳이 지금 3분의 1 가격에 팔 필요가 있을까?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6년 뒤의 4억 6천만 달러보다 당장의 1억 5천만 달러가 더 필요하다.
둘째로 그림은 거래가 이뤄질 때마다 가격이 뛴다는 특징이 있다. 원래 이 그림을 산 뉴욕 화상들은 복원을 끝마친 뒤 1억 달러에 러시아 부호에게 팔았다.
러시아 부호는 다시 그림을 크리스트 경매에 내놓았고, 크리스티는 의뢰를 받은 후 수년에 걸쳐 전 세계를 돌며 전시회를 열어 홍보를 했다.
또한 이 그림에 ‘남자 모나리자’라는 명칭을 붙여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한 일련의 작업들 덕분에 4억 달러가 넘는 가격에 판매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라시드 왕자가 그림을 구매했을 때는 이미 왕세자가 돼 국가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다.
그러니 4억 6030만 달러를 부담 없이 지를 수 있었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가 사우디 왕족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부자라고 해도 현재로서 그 금액은 힘들 것이다.
현실적으로 1억 5천만 달러가 그가 당장 지불할 수 있는 한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