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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왕세자 방한 (4) (106/529)

 107화. 왕세자 방한 (4)

 라시드 왕자의 몸에서는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이놈을 끌고 가 목을 쳐라!’라고 소리칠 것 같다.

 그가 전제군주국의 왕자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났다.

 난 기세에 눌리지 않고 고개를 똑바로 들며 계속 말했다.

 “이렇게 하면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최소 2천억에서 많게는 3천억 달러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기가 막히는 아이디어다.

 나도 뉴스를 보고 무릎을 탁 쳤을 정도니까. 그렇다면 이 기가 막힌 아이디어는 과연 누가 생각해냈을까?

 바로 내 눈앞에 있는 남자다.

 권력을 장악한 라시드 왕세자는 반부패위원회를 만들어 왕족들을 부패혐의로 싹 다 붙잡아 감금시킨다.

 감금장소는 무려 5성급의 리츠칼톤 호텔.

 당시 리야드의 리츠칼톤 호텔은 세상에서 제일 호화로운 감옥으로 불렸다.

 라시드는 그들에게 재산의 일부를 내놓으면 사면을 해준다는 약속과 함께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내밀었다.

 사인을 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지만, 사인을 안 하면 평생 호텔 밖으로 못 나간다.

 전방위적인 압박을 버티지 못한 왕족들은 사인을 하고 재산의 70~90퍼센트를 국가에 헌납했다.

 그렇게 해서 거둬들인 돈은 대략 2~3천억 달러.

 이게 어느 정도 금액인지 감이 안 잡힌다면 사우디의 1년 GDP가 8천억 달러다. 그러니까 국가 GDP의 25퍼센트에 해당하는 돈을 삥 뜯은 것이다!

 아니, 그 전에 그만큼 해먹었다는 게 더 신기하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라시드 왕자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당신, 재밌는 사람이군요.”

 이건 칭찬이겠지?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시드 왕자는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마음에 들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걸 내가 대신 말해준 거니까.

 “하지만 강한 반발이 터져 나올 텐데요.”

 돈과 권력이 있는 왕족들을 싹 다 붙잡아다가 삥을 뜯는 일이다. 엎드려뻗쳐 시킨 다음 ‘뒤져서 나오면 100만 달러에 한 대’라는 식으로.

 이들이 순순히 재산을 내놓을 리 없겠지.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일인 만큼 국민들은 지지할 테고, 국제 여론 역시 호의적일 테니까요. 반발하는 건 어디까지나 당사자들뿐입니다. 어차피 국가를 좀먹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동안의 한 짓을 생각한다면 목숨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죠. 전 그저 하나의 방법을 말씀드렸을 뿐, 선택은 왕자님의 몫입니다.”

 “그래서······ 저보고 왕세자가 돼서 이런 일들을 하라는 겁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사우디에는 강력한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재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을 뒤바꿀 수 있는 것은 왕자님께서 왕세자가 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사촌형을 밀어내고 왕세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왕세자만 바뀌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그동안 이어왔던 형제상속제를 폐지하고, 부자상속제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제상속제에서는 형제와 그 자식들까지도 왕위계승권자가 되기 때문에 다른 친인척들을 숙청하기가 힘들다.

 왕족들이 부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하지만 부자상속제에서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만큼 형제와 친척들을 부담 없이 털 수 있다.

 그편이 왕권 강화에도 도움이 될 테니.

 “그 과정에서 얼마나 큰 혼란이 일어날지 생각해봤습니까?”

 그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사우디는 국가 성립 이후 한 번도 쿠데타가 발생한 적이 없다. 과연 쿠데타가 성공할지, 권력자들과 국민이 자신을 인정할지 걱정하는 거겠지.

 “우려하시는 혼란 같은 것은 없을 겁니다. 사우디 국민들이야말로 누구보다 개혁을 바라고 있는 만큼 왕자님을 지지할 테니까요.”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만큼이나 바라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신의 뜻이라면서요.”

 다시 말하지만 사우디라는 나라는 사우드 가문과 와하브파의 거래로 인해 탄생한 국가다. 왕가와 와하브파 종교지도자들은 국가 권력의 양대 축이다.

 와하비즘이 이슬람 근본주의인 만큼, 라시드 왕자의 개혁 조치에 가장 반발할 사람들 역시 바로 이들이다.

 실제로 라시드 왕자가 왕세자가 된 뒤 개혁조치를 단행하자 와하브파 성직자들은 왕가에 전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라시드 왕자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고,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여성이 운전을 하거나 스포츠를 관람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이슬람 율법자들을 줄줄이 처형했다.

 “그건 신의 뜻이 아닌 그들의 뜻일 뿐입니다. 손에 피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신다면 지금의 왕세자를 밀어내고 차기 국왕이 되시는 것도 불가능하겠죠.”

 라시드 왕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얘기를 하기 위해 보자고 한 겁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지금까지 내가 한 얘기들은 어차피 그가 권력을 잡은 뒤의 일. 단지 이것뿐이라면 굳이 힘겹게 만날 이유가 없다.

 때문에 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하는 듯했다.

 그 짐작대로 이제부터가 본게임 시작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라시드 왕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찾아온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보통 둘 중 하나입니다.”

 “뭔가요?”

 “돈 아니면 권력이죠.”

 “그렇군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건 대체로 비슷하기 마련이지.

 “당신이 원하는 건 뭡니까?”

 뉘앙스로 봐서는 원하는 걸 줄 수도 있다는 느낌이다.

 사우디 왕가의 부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왕가의 사돈의 팔촌쯤 되는 이들도 수천만 달러씩은 가지고 있다.

 현 국왕의 아들인 그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정확한 자산 규모는 모르나 적어도 30억 달러 이상은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사우디만이 아닌 외국에도 여러 사업체를 가지고 있고, 자산을 관리하는 운용팀을 따로 두고 있다.

 “둘 다 아닙니다. 다만 왕자님과 거래를 하나 하고 싶습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거래라······.”

 그러고는 덧붙이듯 말했다.

 “거래라는 것은 쌍방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저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그 당연한 사실을 잘 모르고 있더군요.”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는 놈들을 많이 만나본 모양이다.

 “이 거래는 분명히 왕자님께 이익이 될 겁니다.”

 “다들 말은 그렇게 하더군요.”

 “아니라고 생각되신다면 거절하셔도 무방합니다.”

 내 말에 그는 흥미를 나타냈다.

 “어떤 거래입니까?”

 “왕자님께서 미술품을 좋아하시고 수집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요?”

 난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그림을 하나 팔고 싶습니다.”

 그는 예술에 관심이 많고 미술품 경매시장에서도 큰손으로 통한다.

 고흐, 피카소, 드가, 렘브란트, 엔디 워홀 등의 작품을 사들여 자신의 개인 미술관에 전시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은 그림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흥미를 끌 만한 그림이 없기 때문이겠죠.”

 라시드 왕자는 이채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 말은 내 흥미를 끌 만한 그림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까?”

 난 자신 있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장담컨대 어디서도 보지 못한 그림일 겁니다.”

 “어디 있습니까?”

 “입구에서 경호원에게 맡겼습니다.”

 “한번 보고 싶군요.”

 라시드 왕자가 손짓을 하자 아셰르가 잠시 나가서 그림을 가지고 들어왔다. 난 직접 포장을 벗기고,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소파 위에 기대놓았다.

 “어떻습니까?”

 그림을 직접 본 라시드 왕자는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보기 드문 그림이로군요.”

 확실히 이 정도로 뭉개진 그림을 보긴 쉽지 않겠지. 상태만 봐서는 당장 쓰레기통으로 직행해도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그림의 크기는 고작 가로 45.4센티에, 세로 65.6센티.

 그림 크기가 가격을 결정짓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 크기의 그림이 높은 가격을 받기는 힘들다.

 이러니 웃음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러나 진가를 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 그림을 저에게 팔겠다는 겁니까?”

 “예. 특별히 싸게 드리겠습니다.”

 “얼마입니까?”

 난 태연하게 말했다.

 “1억 5천만 달러입니다.”

 “······.”

 한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나한테는 말할 것도 없고, 오일국 왕자님께도 엄청난 거액이다.

 드넓은 거실에는 한동안 긴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림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나를 사기꾼처럼 흘겨보던 아셰르는 아예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당장 둘 다 눈앞에서 치우겠습니다.”

 여기서 둘이란 나와 그림을 뜻하는 거겠지?

 아셰르가 손을 들어 경호원을 부르려는데 라시드 왕자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아셰르는 동작을 멈췄고, 라시드 왕자는 눈을 크게 뜨고 그림을 보았다.

 어찌나 집중해서 보는지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난 속으로 놀랐다.

 설마 이 그림에서 뭔가를 본 건가?

 흔히들 예술품에는 특유의 아우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얼마든지 카피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미술관까지 가서 그림을 감상하는 거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나 눈물이 나온다는데, 이 그림은 오래됐다는 점을 제외하면 딱히 아우라 같은 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관점. 전문가나 안목이 높은 사람이 본다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뭐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체감상 30분은 지났을 때쯤 라시드 왕자가 입을 열었다.

 “이 그림은 누구를 그린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목은요?”

 “메시아. 라틴어로는 살바토르 문디가 되겠네요.”

 “구세주라······. 잘 어울리는 제목이군요.”

 턱수염을 만지며 중얼거리던 그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누구입니까?”

 난 침착하게 말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다.”

 아셰르는 깜짝 놀랐다.

 “다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소설과 영화 등 각종 매체에 등장하니까.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으로 다방면에 뛰어난 천재였다. 예술, 문학, 발명, 과학, 기술, 의학, 수학 등등.

 그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기도 했다. 누구나 한 번쯤 본 ‘최후의 만찬’ 벽화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드넓은 공간에는 한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

 설명을 좀 덧붙여야 하나 고민하는데, 다행히 라시드 왕자가 입을 열었다.

 “이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다빈치는 유명세에 비해 작품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회화는 고작 17점이 있을 뿐이죠.”

 역시 잘 알고 있구나.

 “그중 하나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죠.”

 “제가 알기로 그 17점 중 이런 그림은 없을 텐데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건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작품이니까요.”

 라시드 왕자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게 정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라면, 어째서 한국에 있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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